대력(大曆) 23년 팔월 상순, 순휴(旬休)의 저녁이었다.
대질에서 열흘 남짓이 지나 있었다.
은가락에게서는 전갈이 없었고 진소하는 근신 중이었다.
약당 뒷칸의 외상은 그대로였고 나졸(邏卒)은 문 앞에 그대로 있었다.
빌릴 손이 없었다.
그것이 오늘의 셈이었다.
갚는 자리에는 빌린 손을 데려가지 않는다.
제 입으로 놓은 규칙이었다.
대여가 멎기 전에 놓은 규칙이라, 오늘 그 규칙은 지킬 것이 없었다.
지킬 것이 없는 규칙이 사람을 혼자 세운다는 것을 그는 문을 나서며 알았다.
서시(西市) 어귀까지는 저잣거리를 가로질러야 했다.
순휴라 닫힌 가게와 열린 가게가 섞여 있었다.
국숫집 앞에 사람이 앉아 있었고 대장간은 불이 죽어 있었다.
걸음마다 눈이 붙었다.
관의 눈이 다섯 걸음 뒤에 하나, 저자의 눈이 몇인지 모를 만큼 여럿.
품 안에 낱장이 있었다.
소매 안에는 두 냥 여섯 전, 갚음도 삯도 아닌 돈.
그리고 오른손에는 여덟 전이 있었다 — 아니, 왼손이었다.
오른손은 셈을 못 한다.
걸으면서 셈을 했다.
오늘 갚을 것은 여덟 전 하나.
남은 항목은 표사 넷의 유족과 은진서 앞의 가장 큰 항목.
그리고 관이 판정으로만 받는 배상 하나.
장부의 위쪽은 여전히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있었다.
대장간 앞을 지날 때 누군가 그를 보고 옆 사람에게 무엇인가 말했다.
알아들을 거리는 아니었다.
표사의 눈은 말보다 발을 본다.
그 둘은 따라오지 않았다.
서시 어귀에서 말먹이 냄새가 났다.
마구간 곁방이었다.
처마가 낮고 널문에 빗장이 하나 걸려 있었다.
지킬 수 있는 문인가.
표사의 눈이 먼저 그것을 쟀다.
문은 하나였고 골목은 좁았으며 큰길은 열 걸음 밖이었다.
다섯 달 동안 좌표였던 것이 문이 되어 있었다.
두드렸다.
빗장이 안에서 물러났다.
"뉘요."
"서문백(西門柏)입니다."
노인은 문틈으로 오래 보았다.
일흔 안팎의 얼굴이었고 손등에 고삐 자국이 남아 있었다.
"표국 막내로군."
"예."
문틈이 반 뼘 더 열렸다.
"혼자 왔는가."
"혼자 왔어요."
노인의 눈이 백의 어깨 너머로 갔다.
"저 뒤에 창 든 사람은."
"관에서 붙은 사람이에요. 저를 따라다녀요."
"…들어오게."
곁방은 좁았다.
벽에 낡은 곁마 줄이 걸려 있었다.
표국의 것이었다.
백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알아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
"앉게. 자리랄 것도 없네만."
"괜찮아요. 오래 안 있겠습니다."
노인이 벽 쪽 물동이를 보았다.
"물은 있네."
"됐어요. 여덟 전만 놓고 가겠습니다."
백이 왼손을 품에서 꺼냈다.
"여덟 전을 가져왔어요."
"여덟 전."
노인이 그 말을 한 번 되풀이했다.
말 사이에 숨이 길었다.
"두 달 치 말먹이 삯이지. 재 넘기 전에 두 번, 넘고 나서 한 번. 콩을 섞은 값이라 좀 비쌌네. 그래도 여덟 전일세. 표국 셈은 늘 그렇게 맞았지."
"기억하고 계시네요."
"말먹이 값은 잊는 법이 없네. 사람 이름은 잊어도 주막 이름은 안 잊지. 자네 형님도 그랬네. 표두는 재 이름부터 부르는 사람이었어."
백의 목이 한 번 움직였다.
"형님 말씀을 하시는 분이 오랜만이에요."
"표국 사람이 몇 안 남았으니 그렇지. 나는 표두가 열두 살 때부터 봤네. 말 등에 처음 올라가던 날도 봤고, 떨어져서 우는 것도 봤네. 그 사람이 짐을 지키다 갔다는 것만 아네. 나머지는 관이 적었다니 관이 알겠지. 나는 종이를 못 읽으니 관이 뭘 적었는지도 모르네."
"…예."
백의 시선이 벽으로 갔다.
"저 줄은 표국 것일세. 곁마 줄이지. 끊어져서 안 가져갔던 게 남았네."
백은 그것을 이미 알아보았고 알아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
"저자에서 들었네. 결승에서 이름을 말했다더군. 서문가 막내가 살아 있다고."
"예."
노인은 그 말을 하며 백을 보지 않았다.
"팔았다는 말도 같이 돌더군. 그 말도 들었네."
"팔지 않았어요. 길은 제가 고쳤고요. 증명은 못 합니다."
숨이 한 번 지나갔다.
"세 마디로군."
"그 세 마디밖에 없어요."
노인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관에서도 그리 말했는가."
"그리 말했어요."
"마지막 표행에 나는 못 갔네. 나이 때문에 곁마를 뺐지. 그래서 살았고."
숨이 길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둘이라는 말은 저자에서 안 하더군. 자네하고 나하고."
"…"
노인의 손이 무릎 위에서 한 번 폈다 오므라들었다.
"그 아침에 내가 편자를 봤네. 앞말 왼쪽이 닳아 있어서 갈아야 한다고 했지. 표두가 다음 참에 갈자고 했고."
"다음 참이 없었지요."
"없었네."
노인이 손바닥을 무릎에 놓았다.
"받겠네."
백의 손이 멎었다.
버들골에서 배운 것은 되돌아오는 손이었다.
그는 거절을 셈하고 왔다.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향해 있었다.
"이름을 알고 받는 게 셈이 맞나 물었네. 자네가 온 걸 보니 맞겠지. 삯은 삯일세."
"버들골에서는 돌아왔어요."
"거긴 핏값이 섞였고 여긴 말먹이 값일세. 셈이 다르지. 나는 말만 봤네."
백이 왼손을 내밀었다.
"세어 보시겠어요."
"세겠네. 셈은 세는 게 예의지."
여덟 전이 노인의 손으로 갔다.
짤랑.
노인이 세었다.
여덟 개였다.
다섯 달 만에 항목 하나가 닫혔다.
백의 안쪽 장부에서 줄 하나가 지워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느꼈다.
"자네."
"예."
"어사부(御史府)에서 부르면 나가겠네."
숨이 한 번 길었다.
"표국 정례 노정은 그 재를 넘지 않네. 나는 그걸 몸으로 아네. 곁마잡이가 삼십 년일세. 어느 재를 넘고 어느 주막에서 말을 쉬는지, 약당 길로 꺾은 적이 없다는 것도."
백은 그 말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정례 노정이 재를 넘지 않았다는 증언은 노정을 고친 손을 가리킨다.
그 손은 그의 손이다.
말릴 수 있었다.
갚음에 조건을 붙이면 된다.
조건이 붙는 순간 갚음이 아니게 되고 그것은 버들골에서 배운 것이었다.
'갚음에는 조건을 달지 않는다.'
"예."
"어르신. 정례 노정을 여쭤도 될까요."
"물어보게."
노인이 무릎을 고쳐 앉았다.
"성문에서 나가 첫 참이 어디였습니까."
"장고개 아래 주막일세. 밤에 들어 새벽에 나오지. 거기서 말을 먹이고, 이튿날 아침에 사평(沙坪) 큰길로 붙네. 표두 때부터 삼십 년을 그리 다녔어. 재는 안 넘어. 재 넘는 길은 짐수레가 못 지나고, 지나려면 짐을 나눠 실어야 하는데 그러면 사람이 더 드네."
백이 물었다.
안쪽 장부가 열려 있었다.
"짐수레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고, 눈이 오면 재는 하루가 이틀이 되네. 표행은 날짜가 값일세. 하루를 늦추면 삯이 깎이고, 이틀을 늦추면 다음 일이 끊기지. 그래서 안 넘는 걸세. 삼십 년 동안 한 번도. 그 겨울에 넘었다면 그건 누가 그리 적었기 때문일 걸세."
백은 그 말을 안쪽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것이 어사부에서 나올 말이었고 나오면 그의 손을 가리킬 말이었다.
"그 말씀을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리 할 참이네."
백은 그 말을 받아 적을 자리를 안쪽에 만들었다.
"언제 부르는지는 관이 정합니다. 통지가 갈 거예요."
"기다리지. 나는 여기 있네. 삼십 년 있었으니 더 못 있겠나."
백은 그 자리에 놓일 종이의 수를 셈했다.
서면, 검험, 진술.
셋이 서기 전에는 이름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제 이름이 적힌 종이가 같이 갈 겁니다. 어르신 말씀은 그 종이 옆에 놓일 거예요."
"놓이라지. 나는 말만 하네."
노인이 헝겊을 무릎 위에 놓았다.
"원망은 안 하네.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겠네. 사실이 그러니 사실대로 나가는 걸세. 자네가 오늘 여덟 전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고, 그 길을 자네가 고쳤다는 것도 사실이면 둘 다 적히면 되네."
"압니다."
노인의 눈이 여덟 전 위에 있었다.
"자네한테 좋을 게 없는 말인 건 아네."
"압니다. 그래도 가셔야 하는 말이에요."
노인이 처음으로 오래 그를 보았다.
노인이 여덟 전을 헝겊에 쌌다.
그것으로 오늘의 셈은 끝이었다.
골목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넷이었다.
백의 몸이 먼저 알았다.
발바닥이 바깥으로 벌어진 걸음.
무게가 앞에 쏠려 있고 보폭이 고르지 않았다.
저자의 발이었다.
그 밤 눈 위에서 합을 맞춰 조여들던 발이 아니었다.
다섯 달 동안 그 소리를 세어 온 귀가 그것을 먼저 갈랐다.
실행자는 저자의 손이 아니다.
그 확인은 오늘 아무 값도 하지 않았다.
"어르신. 들어가세요."
"저것들이 자네를 따라온 겐가."
발소리가 골목 어귀에서 멎었다.
"제 이름을 따라온 겁니다. 들어가세요."
"…"
"빗장을 주십시오."
노인이 빗장을 뽑아 건넸다.
무공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백은 문을 등지고 섰다.
빗장은 목검보다 짧고 무거웠다.
넷이 골목 어귀에 섰다.
몽둥이 둘, 짧은 칼 둘.
얼굴은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품에 있는 종이만 내놓으면 손은 안 댄다."
하나가 말했다.
"왼손도 내놔라. 그거면 끝난다."
백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것이 없었다.
낱장과 왼손.
몸이 아니라 도구를 노리고 왔다.
종이를 잃으면 진술이 무너지고 왼손을 잃으면 쓸 손이 없어진다.
누가 그것을 알고 삯을 주었는지는 오늘 알 수 없었다.
첫째 합.
몽둥이가 위에서 왔다.
급소를 겨눈 것이 아니라 어깨를 노린 것이었다.
부러뜨리러 온 손이었다.
빗장으로 받아 흘렸다.
손목이 저리지 않았다.
셋까지는 저리지 않는다.
둘째 합.
짧은 칼이 품 쪽으로 왔다.
사람이 아니라 종이를 찾는 손이었다.
몸을 틀어 옷섶을 문 쪽으로 돌리고 빗장 끝으로 손목을 쳤다.
칼이 떨어지지는 않았고 대신 그의 옷섶이 반 뼘 뜯겼다.
셋째 합.
둘이 동시에 들어왔다.
하나는 다리, 하나는 왼팔.
빗장을 세워 다리를 막고 왼팔을 접어 들였다.
합은 셋에서 닫혔다.
거기까지가 규율이었다.
다섯 달 동안 지켜 온 숫자였다.
셋에서 끊으면 몸은 값을 청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넷이 물러나지 않았다.
셋을 막은 자리에서 넷째가 문 쪽으로 돌아 들어왔다.
문틈에 손이 닿았다.
안에 노인이 있었다.
품에서 낱장이 반쯤 밀려 나와 있었다.
셋으로는 문이 지켜지지 않았다.
백은 반 호흡을 멈췄다.
넷째 합을 열면 왼손이 열린다.
왼손은 형을 배우지 않았다.
배우지 않은 손은 닫는 법도 배우지 않았다.
열리면 셋에서 멎지 않는다.
열리면 값이 나간다.
몸의 장부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 그가 갚은 사람이었다.
갚은 자리에서 갚은 사람을 잃으면 갚음은 무효가 된다.
장부는 그렇게 적힌다.
값을 알면서 여는 자리였다.
그는 열었다.
왼손이 빗장을 고쳐 쥐었다.
오른손이 하던 각도를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형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다음은 그의 것이 아닌 속도였다.
빗장이 문틈의 손을 걷어 냈다.
돌아 나오며 몽둥이 하나를 부러뜨렸고 짧은 칼 하나가 흙바닥에 떨어졌다.
손목을 노린 것도, 급소를 겨눈 것도 아니었다.
호표검(護鏢劍)은 짐과 사람을 지키는 검이라 쥔 것을 놓게 하는 데까지만 간다.
넷이 반 걸음씩 물러났다.
그 반 걸음이 오늘 그가 산 전부였다.
그리고 값이 왔다.
쇠맛이 먼저였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고 무엇인가가 밀려 올라왔다.
소매로 입을 막았다.
손등이 젖었다.
각혈이었다.
이번에는 목이 함께 갔다.
뜨거운 것이 지나간 자리가 찢기듯 아팠고 숨을 들이켜자 쇳소리가 났다.
골목 끝에서 호각이 울렸다.
날카로운 소리가 좁은 골목을 세로로 갈랐다.
나졸이었다.
다섯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발이 큰길에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판정 미결의 감시였다.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고 따라올 뿐인 눈이었다.
넷이 흩어졌다.
저자 쪽으로, 어둠 쪽으로.
백은 쫓지 않았다.
쫓을 몸이 아니었고 쫓을 자리도 아니었다.
이기지 않았다.
버텼다.
빗장이 손에서 떨어졌다.
문에 등을 대고 미끄러져 앉았다.
안에서 걸쇠가 열리고 노인이 나왔다.
손에 물그릇이 있었다.
백은 말하려 했다.
괜찮습니다, 라고.
들어가 계십시오, 라고.
숨은 나왔다.
소리가 얹히지 않았다.
다시 시도했다.
목 안에서 쇳소리만 났다.
낱말이 되지 않았다.
몸의 장부에 무엇이 적히는지 그는 알았다.
매향이 말한 목록이었다.
검을 쥐는 손이 먼저 갔고 그다음이 있었다.
그다음이 이것이었다.
"입을 헹구게. 삼키지 말고."
노인이 물그릇을 내밀었다.
백은 두 손으로 받았다.
입을 헹구고 흙바닥에 뱉었다.
붉었다.
"…자네."
노인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백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그 뜻이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졸이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창을 들고 있었고 숨이 차 있었다.
"몇이었어요."
백은 손가락 넷을 폈다.
"먼저 친 쪽은요."
백은 골목 어귀를 가리켰다.
"병장기는."
백은 흙바닥의 짧은 칼과 부러진 몽둥이를 가리켰다.
나졸이 그것을 발끝으로 굴려 보고 등불을 낮췄다.
"손에 든 건 저 집 빗장이고요."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 방어는 즉각성을 사후에 진술해야 성립합니다. 먼저 맞았는지 먼저 쳤는지가 갈리는 자리예요. 관부에서 진술하십시오. 말로 하십시오."
백은 제 목을 한 번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졸이 잠깐 말이 없었다.
등불이 백의 입가를 비췄다.
소매의 붉은 자국을 보았을 것이다.
"…서면으로도 됩니다. 필적은 접수철과 대조합니다. 오늘 밤 안에 관부로 가시지요. 즉각성은 늦어지면 다투기 어려워집니다."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집 어른의 진술도 받겠습니다. 문이 어느 쪽에서 열렸는지가 기재에 들어갑니다."
백이 문 쪽을 가리켰다.
안에서 열렸다는 뜻이었다.
"압니다. 제가 봤어요. 문은 안에서 열렸고 서문백 씨는 등을 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적겠습니다."
백이 흙바닥의 병장기를 다시 가리켰다.
"거두어 갑니다. 수령 기재를 남기고요. 걸으실 수 있겠어요."
백이 일어섰다.
다리는 성했다.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도구였던 자리에 붓이 들어섰다.
왼손이 붓을 잡은 지 한 달이 못 되었는데 그것이 이제 그의 유일한 입이었다.
노인이 헝겊에 싼 여덟 전을 다시 한 번 손에 쥐어 보였다.
받았다는 표시였다.
"어사부에서 부르면 나가겠네."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였다.
"자네가 오늘 문을 지킨 것도 말하겠네. 물으면."
백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으면.
관은 묻지 않은 것은 적지 않는다.
"말이 안 나오는 겐가."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인가, 아주인가."
백은 잠깐 답하지 않았다.
답을 아는 채로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오늘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가."
노인은 위로를 놓지 않았다.
무슨 병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말이 안 나오는 젊은이를 보았을 뿐이고 그 젊은이가 피를 토하며 제 문을 지켰다는 것만 알았다.
"말 못 하는 사람 말은 관에서 잘 안 듣네. 그러니 종이를 잘 챙기게. 자네 종이 말일세."
"…"
"오늘 여기 온 건 잘한 일일세. 삯은 삯이고 사실은 사실이니 둘 다 제자리에 놓였어. 나는 그거면 되네. 다음에 올 때는 말이 나오면 좋겠네만, 안 나오면 종이로 써서 오게. 내가 못 읽으면 아무나 읽어 주겠지."
백이 옷섶을 한 번 눌렀다.
노인은 더 묻지 않았다.
묻는 말에 한 박자 늦게 답하는 사람이 답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묻기를 멈추었다.
그것이 이 문간의 예법이었다.
문이 닫혔다.
빗장이 안에서 걸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들렸다.
백은 옷섶 안으로 손을 넣었다.
낱장이 그대로 있었다.
마른 종이가 손끝에서 서걱거렸다.
도구는 남았다.
나졸이 앞장서서 큰길 쪽으로 걸었다.
백이 뒤를 따랐다.
오늘은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말먹이 냄새가 등 뒤로 멀어졌다.
저자의 불빛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안쪽 장부에 오늘의 줄을 적었다.
갚은 것 하나 — 여덟 전, 수령 확인.
얻은 것 하나 — 삯꾼의 디딤은 그 밤의 디딤이 아니다.
잃은 것 하나.
그 칸에는 낱말을 적지 않고 빈 채로 두었다.
적을 낱말이 목이었는데, 그 낱말을 소리로 내 본 적이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낼 수 없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