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23년 칠월 상순의 아침이었다.
은가락(殷家洛)은 저잣거리 끝의 약당(藥堂) 앞문으로 갔다.
뒷문이 야산 오솔길로 이어진다는 말은 들었다.
등재된 유족이 뒷문으로 들 까닭은 없었다.
어사부(御史府) 문전에서 열흘 남짓이 지나 있었다.
열람의 날은 잡혔다.
아직 오지 않았다.
날을 전하러 온 서리는 피의자가 이미 열람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종이를 읽기 전에 말을 먼저 듣는다 — 그것이 오늘 아침의 조건이었고 조건은 집을 나서기 전에 정해 두었다.
문 앞에 둘이 서 있었다.
상가의 딸도 발은 읽는다.
무게가 뒤꿈치에 앉아 있었다.
저자의 발이었다.
그 건너편, 담 그늘에 나졸(邏卒) 하나가 있었다.
나졸의 눈은 문 쪽에만 가 있었다.
문 앞의 둘 사이를 지나도 눈은 따라오지 않았다.
관의 눈은 피의자만 본다.
둘 가운데 하나가 왼 손목을 보았다.
무명 팔찌였다.
시선은 곧 거두어졌다.
앞칸은 약재 냄새로 어두웠다.
약재를 썰던 늙은 여자가 칼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들었다.
매향(梅香)이었다.
은가락은 물목을 놓듯 놓았다.
"은가락이에요. 유족 당사자로 등재된 사람이고요. 뒷칸에 계신 분을 뵈러 왔어요."
"뒤뜰. 약재 고르는 중이다."
칼이 먼저 움직이고 말이 뒤에 왔다.
손이 뒤뜰 쪽 문을 가리켰다.
무엇을 하러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칼이 다시 내려가기 전에 한마디가 더 왔다.
"학생. 문 앞의 둘, 학생 보고 온 게 아니야. 이 집 문에 붙은 지 열흘 됐어. 신경 쓰지 마."
"알아요. 관의 눈도 저를 보지 않았고요."
정이 손에 있고 말에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 두 마디로 알았다.
뒤뜰은 좁았다.
뒷문 너머로 오솔길이 보였고 채반 위에 약재가 널려 있었다.
감초와 황기의 뿌리가 두 무더기로 나뉘어 가는 중이었다.
상가의 딸은 물목부터 훑는다.
담에 목검 한 자루가 기대 서 있었다.
손잡이 쪽이 담에 닿아 있었다.
쥐는 쪽이 비어 있는 검이었다.
그 곁에 서문백(西門柏)이 앉아 채반의 약재를 고르고 있었다.
왼손이었다.
서툴렀다.
오른손은 소매 안에 있었다.
소매가 한 번 떨렸다.
발소리로 먼저 알았는지 고개를 들기 전에 약재를 내려놓았다.
백이 일어섰다.
한 겹 더 조심스러운 존대가 먼저 왔다.
"오셨어요."
"열람의 날이 잡혔어요. 서리가 피의자는 이미 열람했다 했고요. 읽은 사람의 말을 먼저 듣겠습니다. 그다음에 종이를 읽고요. 물목은 말 다음에 대조하지요."
조건을 앞에 놓고 결론을 뒤에 두는 것이 그녀의 어순이었다.
"예. 말씀드리지요."
그리고 그녀가 묻기 전에 놓았다.
묻지 않은 것을 먼저 놓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결승의 무대에서 이미 보았다.
"말씀드리기 전에 하나 있어요. 관아 종결 문서 둘째 장에 검시 기재가 두 줄 있고요. 피의자 열람으로 읽었어요. 은진서(殷振瑞) — 검 중동에서 꺾임, 날 뿌리에 남의 피. 서문송(西門松) — 등에 두 줄. 저는 윗줄을 읽지 못해요. 어사도 읽지 못한다 했고요."
"어사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읽지 못한다고."
"예. 판별이 필요한 자리에는 다른 눈을 부른다고 했어요. 어느 눈인지는 말하지 않았고요."
문서의 문면을 옮기는 소리였다.
해석이 없었다.
그래서 더 또렷했다.
은가락의 엄지가 허리춤 안쪽의 자루로 갔다.
단조각인을 문지르는 버릇이었다.
윗줄은 귀에 닿는 순간 읽혔다.
중동에서 받으면 꺾인다.
꺾이기 전에 뿌리로 긋는다.
아버지가 상가 뒷마당에서 열 번도 더 보여 준 것이었다.
다른 눈이 어느 눈인지 어사는 몰랐을 것이다.
은가락은 알았다.
읽어 주면 되는 줄이었다.
읽어 주는 순간 유족이 피의자의 눈이 된다.
읽은 것을 내놓지 않았다.
"아버지의 검은 제가 압니다."
백의 시선이 담의 목검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은가락은 그 시선이 가는 데를 보았다.
백은 그 검을 쥐지 못한다.
은가락은 쥘 수 있다.
"제 쪽에서 청할 자리가 아닌 것은 알아요."
"청하신 것이 아니에요. 제가 값을 놓는 거예요."
그가 그 문형을 알아들었다는 것이 보였다.
어사부 문전에서 그녀가 놓았던 것과 같은 문형이었다.
"가르쳐 드리지는 않습니다. 빌려 드릴 수는 있습니다. 값이 있습니다."
"빌리겠습니다."
은가락은 한 박자 기다렸다.
값을 묻는 말이 오지 않았다.
"값을 묻지 않으시네요."
"묻지 않을게요. 정하시는 대로 치르지요."
값을 묻지 않았다.
채권자에게 도구를 빌리는 자리라는 것을 백도 셈하고 있었다.
셈이 얼굴에 있었다.
빌리는 쪽이 더 낮은 자리라는 것을 은가락은 상가에서 배웠다.
오늘 그 자리에 선 사람은 갚아야 할 상대 앞에서 빌리고 있었다.
그 줄은 장부에 적지 않았다.
적으면 값이 된다.
은가락은 값을 놓았다.
"그 밤을 처음부터 끝까지. 노선지 위에서부터."
"앉아서 하셔도 돼요."
"서서 하지요."
채반 곁에 선 채로 시작했다.
"섣달 초순에 떠났어요. 노선지는 제가 적었고요. 허가 없이 고쳤습니다. 제 몸의 약 때문이었어요. 표국의 정례 길이 아니었고요. 재를 넘어 약당 쪽으로 꺾이는 샛길이었어요. 더 좁고 외진 길이었고요. 병자는 저 하나였습니다."
표국의 정례 길이 어디인지 은가락은 몰랐다.
아는 것은 아버지가 그 길을 산 것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호송을 맡기는 사람은 길을 사지 않는다.
도착을 산다.
은가락은 끝까지 들을 작정이었다.
어긋난 줄을 찾는 귀를 세우고 왔다.
방의 매도와 결승의 변경이 어긋났던 것처럼 어디선가 어긋나리라 여겼다.
첫 문단에서 어긋난 것은 없었다.
백은 불리한 것을 먼저 놓고 있었다.
상인의 귀는 먼저 놓인 것을 기억한다.
"방금은 약이라 하셨는데요. 무슨 약이에요."
한 박자 늦게 답이 왔다.
"단맥이에요. 맥의 병이고요. 그때는 치료약이 필요했어요. 약당에 들르면 구할 수 있었습니다. 허가는 받지 않았고요. 고쳐 적은 노선지대로 갔어요."
엄지가 자루의 각인을 한 번 더 문질렀다.
"아버지는 그 길을 아셨나요."
"모릅니다. 의뢰인께 길을 여쭙지 않았어요. 길은 표국의 일이었고요."
은가락은 다음을 놓았다.
"매복은 바뀐 길을 어떻게 알았어요."
"모릅니다. 어사부에도 같은 말로 놓았어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꾸미지 않을게요."
거기가 방의 여덟 자가 선 자리였다.
팔았다는 말과 모른다는 말 사이에 증명이 없었다.
증명은 관아가 한다.
은가락이 할 일은 대조였다.
"그다음은요."
"섣달 열이레 밤이었어요. 재 너머 좁목이었고요. 눈이 덮여 있었어요. 양쪽이 바위와 비탈이라 수레가 나란히 서지 못하는 자리였고요. 발소리가 먼저 왔어요. 눈 위에서 합을 맞춘 디딤이었어요. 신호가 한 번 있었고, 그다음에 조여들었어요. 칼은 짐수레를 지나쳤고요. 사람부터 쳤습니다. 왼쪽 수레를 몰던 표사가 먼저였어요. 짐은 나중에 보니 그대로 버려져 있었고요. 형이 먼저 알았어요. 저를 밀어 넘어뜨리고 위에 엎드렸고요. 형의 등에 두 줄이 났습니다. 나중에 알았어요."
녹림이 아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문장이 그렇게 서 있었다.
형의 등에 두 줄이 났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시선이 제 오른손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말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제가 느려지는 것을 제가 들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쓰러지셨어요."
"못 보았습니다. 형의 등 아래 있었습니다. 일어났을 때는 눈 위에 아무도 서 있지 않았어요."
은가락은 목검 쪽으로 갔던 시선을 도로 거두었다.
"검시는 누가 했어요."
"관아지요. 둘째 장에 사흘 뒤라 적혀 있었어요. 저는 그때 이 집 뒷칸에 있었고요."
은가락은 장부를 넘기듯 되짚었다.
방의 문면과 방금 들은 말이 한 줄에서 어긋나 있었다.
"방에는 매도라 적혔어요. 방금 들은 것은 변경이고요."
"예. 둘 다 제 이름 아래 있습니다."
"둘 다 적힌 건 관아지 제가 아니에요."
감춘 것이 아니었다.
못 본 것이었다.
그 차이를 은가락은 알았다.
어사부에 낸 짐표 반쪽에 적힌 것은 물목과 날짜뿐이었다.
길은 적혀 있지 않았다.
길은 이 사람이 적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상행 전 며칠 유난히 서둘렀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말은 놓지 않았다.
은가락의 장부였다.
백이 마지막을 놓았다.
"눈이 그친 뒤에 걸었어요. 어디를 어떻게 걸었는지는 모르고요. 이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뒤는 이 집의 장부에 있어요."
거기까지 놓고 입을 닫았다.
판정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은가락은 판정을 놓지 않았다.
장부를 넘기듯 되짚어도 어긋난 줄이 없었다.
어긋난 줄이 없다는 것을 찾아낸 귀가 할 일은 하나였다.
대조는 종이를 읽은 뒤에 닫힌다.
'대조가 끝나기 전에는 닫지 않는다.'
시선은 백의 눈에서 담의 목검으로 옮겨 가 있었다.
값은 치러졌다.
은가락이 목검을 들었다.
백이 한 걸음 물러섰다.
시연의 자리를 비워 주는 걸음이었다.
은가락은 그 걸음을 보았다.
표사의 걸음이었다.
가벼웠다.
아버지의 검은 이보다 무거웠다.
손이 먼저 기억했다.
그녀는 설명하지 않고 먼저 움직였다.
검 끝이 가슴 높이로 가지 않았다.
낮게, 상대의 손이 있을 자리로 갔다.
"보세요. 한 번이에요."
검 끝이 다시 낮은 자리로 갔다.
첫 번째는 물러서며 상대의 손목 바깥을 스치는 자리였고 두 번째는 몸을 낮추며 같은 자리를 안쪽에서 긋는 것이었다.
담 너머로 저잣거리의 아침 소리가 올라왔다.
뒤뜰만 조용했다.
목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없었다.
느린 시연이었다.
세 번째에 멈추고 말을 뒤에 붙였다.
"급소가 아닙니다. 손입니다. 쥔 손을 놓게 하는 검이에요. 호송을 맡기는 사람이 제 몸을 지키려고 익힌 검이고요."
그는 눈으로만 보았다.
몸이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소매 안에서 오른손이 한 번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제 왼손을 상대의 검 자리에 두고 목검의 중동을 거기 댔다.
"중동에서 받으면 꺾입니다. 검시에 그렇게 적혔다 하셨죠."
목검을 돌렸다.
날 뿌리가 제 왼손 등을 지나갔다.
"꺾이기 전에 뿌리로 긋습니다. 여기. 상대의 손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합이었다.
아버지가 뒷마당에서 가장 늦게 가르친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것을 이기는 검이 아니라 하셨어요. 상대의 손을 놓게 하고 달아나는 검이라고. 상행길에서는 이기지 않는다고."
소녀의 손목에 맞추어 짧은 막대로 보여 주었었다.
그 손목이 지금 목검을 쥐고 있었다.
은가락은 목검을 내렸다.
백은 묻지 않았다.
어디서 배웠느냐고도, 몇 번을 보았느냐고도.
백의 얼굴을 보았다.
결승에서 형의 상흔으로 초식을 세우던 눈이었다.
상처 자국에서 초식을 거슬러 올라가는 눈이 지금 그 밤을 다시 짜고 있었다.
표사의 순서였다.
상흔, 초식, 손.
"검이 중동에서 받았다는 것은 아버님이 먼저 받으셨다는 뜻이에요. 받은 검을 돌려 뿌리로 그으셨고요. 날 뿌리에 남의 피. 아버님의 마지막 합이 살수의 손에 닿았습니다. 상한 손입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문장을 더 놓았다.
"누구의 손인지는 모릅니다. 명부 안에 있습니다."
명부.
쌍절(雙截)은 내원 전수 한정이라는 백의 공리였다.
결승에서 들었다.
어사부에서도 놓았다고 들었다.
그 공리 위에 은가락의 안쪽에서 한마디가 떠올랐다.
결승 무대에서 이름을 들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담기원(譚沂源).
명령한 손.
은가락은 그 한마디를 입 밖에 내고 제가 늦게 들었다.
"그 손이 그 손이면 다 닫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쉼 하나가 있었다.
"닫힙니다, 그 손이 그 손이면. 명부가 먼저입니다."
부정이 아니었다.
백도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닫힌다는 것이 무엇을 닫는 것인지 은가락도 몰랐다.
명부가 먼저라는 말은 백의 것이었다.
은가락의 것은 아직 없었다.
목검을 쥔 채 서 있었다.
아버지의 검을 아버지를 죽게 한 길의 이유 앞에서 보였다.
그 값은 제 장부에만 적었다.
누구에게도 청구하지 않을 줄이었다.
뒷문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매향이 붓 한 자루와 종이 묶음을 들고 서 있었다.
검 이야기는 듣지 않은 얼굴이었다.
들었어도 듣지 않은 쪽을 고른 얼굴이었다.
"학생, 그거 내려놔. 우리 집 마당에서 칼 들고 서 있지 마."
은가락은 목검을 내렸다.
매향은 등을 돌린 채 뒷칸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따라 들어갔다.
침상 둘, 등잔 하나, 상 하나.
등잔은 켜지 않았다.
아침 빛이 창호지로 들어와 상 위에 앉았다.
상 위에 약방문 묶음과 벼루가 놓였다.
매향은 붓을 백의 왼손 쪽에 놓았다.
오른손 쪽이 아니었다.
말 대신 위치였다.
"왼손. 이거 베껴."
"예."
붓이 왼손으로 건너갔다.
매향은 그 손을 보지 않고 종이 묶음을 상 위에 폈다.
"외상은 붓으로 갚아. 글자 하나 틀리면 사람이 죽어. 석 돈이 넉 돈 되면 약이 독이다. 이놈아, 글자 수 세 가면서 해. 이 약이 얼만 줄 알아. 석 장이다. 다 베끼면 앞칸으로 가져와."
"예."
매향의 눈이 은가락 쪽으로 한 번 왔다.
"학생은 거기 서서 뭐 해. 볼 거면 보고 갈 거면 가."
"보겠어요. 손이 글자를 어떻게 잡는지 보고 갈게요."
"볼 건 손이 아니라 글자다. 틀리면 사람이 죽는다니까."
백은 왼손으로 붓을 잡았다.
은가락은 그 손을 보았다.
약방문의 첫 줄은 감초 석 돈이었다.
뒤뜰 채반의 것이었다.
작약 두 돈, 계지 한 돈.
은가락은 물목을 읽다가 멈추었다.
남의 약을 읽을 일이 아니었다.
남의 필적을 읽는 것은 상가의 딸의 일이었다.
첫 획이 흉하게 앉았다.
느렸다.
한 글자를 앉히는 데 숨이 둘 들어갔다.
어사부 문전에서 본 왼손 수결과 같은 손이었다.
검을 쥐지 못하는 손이 붓을 배우고 있었다.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도구가 바뀌는 것이었다.
매향은 백을 이놈이라 불렀다.
이름은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첫 글자가 앉은 뒤에 그가 붓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사각.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약방문을 보고 있었다.
방 안의 누구에게도 아닌 문형이었다.
"빌린 손은 읽는 자리에만 쓰겠습니다. 갚는 자리에는 빌린 손을 데려가지 않겠습니다."
"읽는 자리고 갚는 자리고 간에 글자나 세."
"예."
은가락의 장부가 낯설어졌다.
빌린 손을 어디까지 쓸지는 빌려주는 쪽이 정하는 줄 알았다.
빌리는 쪽이 먼저 그었다.
그녀의 대여는 읽는 자리까지였다.
갚는 자리에는 그의 몸만 간다는 뜻이었다.
갚을 상대가 바로 앞에 서 있는데 그 상대의 손은 거기 데려가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붓 소리가 났다.
둘째 글자였다.
그녀는 목검을 뒤뜰로 가지고 나가 담에 도로 기대 놓았다.
쥐는 쪽이 다시 비었다.
뒷칸으로 돌아와 상 앞에 섰다.
닫을 차례였다.
다음을 약속하면 관계가 되고 오늘로 끝이라 하면 유보가 문장이 된다.
어느 쪽도 오늘 적을 줄이 아니었다.
그녀는 셋째 문형을 골랐다.
"값은 받았습니다. 오늘 것은 한 번입니다.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빌려 드린 것입니다."
그가 붓을 멈추었다.
"다음이 있으면 그때 다시 정합니다.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값의 일부입니다."
"예."
청하지 않았다.
예 한 음절이었다.
붓이 다시 움직였다.
은가락은 앞칸으로 나갔다.
매향이 약재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학생. 뒷문 있다. 야산으로 빠진다. 문 앞의 둘은 내가 안다."
"등재된 유족은 숨지 않습니다. 앞문으로 나갈게요."
혀 차는 소리가 한 번 났다.
말리지는 않았다.
은가락은 앞문으로 나갔다.
문 앞의 둘이 은가락을 보았다.
아까 팔찌를 보았던 자가 이번에는 손을 보았다.
빈손이었다.
따르지 않았다.
나졸의 눈은 문 쪽으로만 가 있었다.
뒤에는 아무 발소리도 붙지 않았다.
저잣거리로 나섰다.
담벼락의 방은 볼 필요가 없었다.
거기 적힌 것은 여덟 자였고 오늘 들은 것은 그 밤 전부였다.
걸으며 그녀는 오늘의 줄을 적었다.
빌려준 것은 시연 한 번이었다.
받은 것은 그 밤 전부였다.
아버지의 검을 보인 값은 따로 적었다.
청구할 데 없는 줄이었다.
응답은 오늘도 놓지 않았다.
빌려준 것이 응답의 한 칸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장부에는 대여라고만 적었다.
그 줄 아래 한 줄을 비워 두었다.
다음이 있으면 그때 적을 줄이었다.
없으면 빈 채로 남을 줄이었다.
뒤뜰에 남은 소리는 둘이었다.
붓이 종이에 앉는 소리, 그리고 목검이 담에 닿았던 소리.
빌린 것보다 내준 것이 큰 아침이었다.
그쪽에도, 제 쪽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