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23년 삼월 상순의 새벽.
약당(藥堂) 뒷칸은 아직 어두웠다.
뜸쑥 타는 냄새 위로 당귀 달이는 김이 낮게 깔렸다.
서문백(西門柏)은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불탄 낱장을 한 장씩 기름 먹인 천 위에 올렸다.
사각.
서문표국(西門鏢局)의 철장부(鐵帳簿)에서 타다 남은 종이들이었다.
가장자리가 숯이 된 낱장은 손끝만 스쳐도 재를 남겼다.
묶음 가장 안쪽에 따로 접어 둔 한 장이 있었다.
백은 접힌 결을 펴지 않았다.
펴지 않아도 무게를 아는 종이였다.
'이 종이가 내 빚이다.'
숨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갚으러 가는 것이다.
새벽 내내 되뇐 문장을 한 번 더 눌러 두고 천의 매듭을 여몄다.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매향(梅香)이 약탕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가."
낮고 험한 목소리였다.
백은 매듭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접수가 오늘 닫힙니다."
"닫히라지. 죽을 자리 들어가는 접수가 뭐 그리 급해."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관이 네놈 사정 봐 가며 문 열어 두는 데더냐. 하루 늦으면 반년 기다리면 될 일이지."
"반년이면 늦습니다."
"뭐가 늦어. 대체 뭐에 늦는데."
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어르신."
"어르신 소리 집어치워. 새벽밥은 먹었고."
"먹었습니다."
"거짓말 마라. 부뚜막에 손도 안 댔더라. 빈속에 맞으면 멍이 두 배로 드는 법이다. 죽이라도 먹고 가."
"시간이 없습니다."
"죽 한 그릇에 늦을 접수면 애초에 못 붙는 접수다. 앉아. 손목도 내놓고."
"다 먹어라. 남기면 안 보낸다."
백은 앉았다.
김이 오르는 죽사발이 먼저 왔다.
맥을 짚는 손은 말보다 부드러웠다.
매향의 눈썹이 좁아졌다.
"맥이 이 모양인데 비무를 하겠다고. 세 합 넘기면 어찌 되는지 네 몸이 제일 잘 알 텐데."
"넘기지 않습니다."
"넘기지 않으면? 칼 든 놈들이 네 사정 봐 가며 덤빈다더냐."
"수전 든 손으로 젓가락도 못 쥐던 게 반년 전이다. 피 토하고 사흘을 죽은 듯 누웠던 일은 잊었고."
"잊지 않았습니다."
"잊지 않은 놈이 검을 지고 그 담을 넘겠다는 거냐. 거긴 네가 찾는 것이 있는 데가 아니라 너를 찢을 놈들이 모여 사는 데야."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갚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 몫을 산 사람 몸으로 갚겠다고. 몸이 남아야 갚는 것도 있는 게다."
"압니다."
"아는 놈 대답이 그 모양이냐. 정 가겠다면 나도 수가 있다. 오늘 이 문을 나서면 탕약이고 침이고 없는 줄 알아."
백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숨겨야 할 것을 세는 버릇이 만든 박자였다.
"그러셔도 갑니다. 다만 어르신께 진 빚이 하나 더 늘 뿐입니다."
"빚, 빚, 또 빚 타령이냐. 지겹지도 않아."
"제가 가진 말이 그것뿐입니다."
"장부에 적을 줄만 알았지 제 몸 축나는 건 셈에 안 넣는 놈. 네 장부는 처음부터 엉터리야."
"그래서 약조를 드리겠습니다."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백은 봇짐에 묶어 두었던 목검(木劍)을 풀어 두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진검과 무게가 다른 나무의 결이 손에 설었다.
"담장 안에서는 이 목검만 씁니다. 호표검(護鏢劍)은 뽑지 않습니다. 어르신 앞에서 겁니다."
"목검이라. 그 잘난 가전 검을 나무토막에 가두겠다고."
"가두는 것이 아니라 봉하는 겁니다. 봉해 두면 세 합을 넘길 일도 없습니다."
"봉한 검이 급할 때도 얌전히 있어 준다더냐. 검이란 건 몸이 먼저 나가는 물건이다."
"그래서 목검입니다. 손에 진검이 없으면 몸이 먼저 나가도 셋을 셀 일이 없습니다."
"목검으로 되겠느냐. 거기 모이는 놈들이 너를 몽둥이질 한 번에 곱게 살려 보내 줄 성싶어."
"이기려고 드는 비무가 아닙니다. 들어가려고 드는 비무입니다. 말석이면 됩니다. 눈에 안 띄는 자리가 제일 쌉니다."
"말버릇 하나는 꼭 형을 닮았다. 그 집 사내들은 어째 하나같이 제 몸값만 싸게 부르는지."
백의 손이 멈췄다.
약당은 표국 표사들의 단골 치료처였다.
표국 시절, 형도 저 손에 어깨를 맡긴 적이 있었다.
매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치료를 끊겠다고 하면 돌아설 놈이냐, 너는."
"아닙니다."
"그걸 아는 놈이 제일 밉다."
"증인도 없이 거는 맹세를 무슨 수로 믿으라고."
"그래서 어르신 앞에서 겁니다. 어르신이 증인이십니다."
"…늙은이한테 별걸 다 떠맡기는구나."
"말해 봐라. 보름마다 와서 손목 내밀고, 세 합 안 넘기고, 담장 안에서는 목검만 쓴다. 셋 중 하나라도 어기면 그날로 끝이다."
"예. 셋 다 지킵니다."
"이리 줘 봐라, 그 나무토막."
매향이 목검을 받아 눈대중으로 훑었다.
손잡이의 결을 엄지로 문지르는 손이 느렸다.
"가볍구나. 이걸로 뭘 막겠다는 건지. …아니다, 막지 마라. 맞고 와라. 맞은 몸은 약으로 고쳐도 쓴 몸은 약으로 못 고친다."
"명심하겠습니다."
매향은 오래 백을 보았다.
약탕관의 김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흐려졌다.
"살려 놨더니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 가는 놈을, 내가 왜 또 보태 주는지 모르겠다."
혀 차는 소리가 났다.
매향은 대답 대신 안쪽에서 무명 보퉁이 하나를 들고 나왔다.
미리 싸 둔 티가 나는 약 꾸러미였다.
던지듯 안기는 손이 험했다.
"가라. 대신 보름에 한 번은 와. 안 오면 내가 담을 넘는다."
"오겠습니다."
"어깨든 갈비든 부러져 오면 보름을 안 기다린다. 그길로 와."
"예."
"달이는 법은 안에 적어 뒀다. 태워 먹으면 그날로 끝인 줄 알아."
"봉지 셋째 것은 통증 올 때만 써라. 아껴 쓰고. 다시 지으려면 열흘이다."
"약값은 외상이다. 갚을 셈 좋아하는 놈이니 잊지는 않겠지."
백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매향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약당을 나서는 등 뒤로 당귀 냄새가 오래 따라왔다.
그날 밤 이후 두 번째로 태어난 자리의 냄새였다.
백은 목검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청람관(靑嵐館)의 문전에는 벌써 줄이 길었다.
지원자들의 봇짐과 검집 사이로 백토 먼지가 일었다.
백은 줄 끝에 서서 담장 안쪽을 먼저 읽었다.
문에서 마당까지의 거리, 시선이 모이는 자리, 빠져나갈 길.
표국의 호송꾼이 낯선 객잔에 들 때 하던 순서 그대로였다.
"형씨도 입관이오? 올해는 뽑는 자리가 스물이라는데 줄은 백을 넘는구려."
앞줄의 사내가 말을 붙였다.
세 번은 빨아 입은 티가 나는 무명옷에 낯이 순했다.
"그렇습니까."
"어느 현에서 오셨소."
"청산현에서 왔습니다."
"청산이면 예서 사흘 길 아니오. 방이 붙기 전에는 돌아가지도 못하겠구려."
"저기 마당 복판에 선 돌 보이시오? 저게 서열비요. 관 안의 밥그릇 순서가 저 돌에 다 새겨져 있소."
"그 위로 지붕 둘 보이시오? 왼쪽이 장서각, 오른쪽이 진품각. 서열이 모자라면 평생 문턱도 못 밟는 데라오."
"잘 아십니다."
"삼 년째 낙방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오. 올해마저 미끄러지면 고향 가서 밭이나 갈아야지."
"그래도 말단이라도 붙기만 하면 밥은 나온다오. 나 같은 놈한텐 그게 어디요."
"올해는 관주께서 입관 비무 판정을 직접 보신답디다. 그 어른 눈이 매섭기로 근동에 유명하오."
백은 사내의 손가락 끝을 따라 마당을 읽었다.
서열비(序列碑)의 돌에 새긴 이름들이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아래로 갈수록 글씨가 얕아졌다.
그 너머 높은 곳에 장서각(藏書閣)과 진품각(珍品閣)의 잠긴 지붕이 나란했다.
등급이 모든 것을 배급하는 관이다.
백은 그렇게 읽었다.
진실이 저 안 어딘가에 있다면 진실에도 값이 매겨져 있을 것이었다.
열쇠는 저 비석이었다.
"다음. 이름과 내력."
접수 서기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백은 지원서를 내밀었다.
"한백이라 합니다. 청산현에서 왔습니다."
한백(韓柏).
소리 내어 쓰는 것은 처음인 이름이었다.
혀끝이 반 박자 늦었다.
서기는 알아채지 못했다.
"사문은."
"떠돌이 검객 밑에서 삼 년 배웠습니다. 함자는 여쭙지 못했습니다."
"보증인은."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적는다. 수속비 서 푼."
백은 동전을 세어 내밀었다.
은자는 처음부터 봇짐에 없었다.
"입관이 되면 유시 안에 외원 숙사에 짐을 들인다. 방문은 내일 아침 서열비 곁에 붙는다."
"알겠습니다."
서기의 붓이 움직였다.
명부 끝줄에 새 항목이 생겼다 — 한백, 청산현 사람, 21세, 사문 없음.
명부에 오른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다.
표국에서 배운 문서의 법이었다.
접수대 곁에 서 있던 중년의 문사가 지원서를 집어 들었다.
검 대신 붓을 찬 사람이었다.
서기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부관주라는 말이 낮게 오갔다.
담기원(譚沂源)이었다.
"청산현이면 먼 길인데. 고개를 몇이나 넘었나."
따뜻한 하게체였다.
백은 시선을 지원서에 둔 채 답했다.
"걸을 만했습니다."
"봇짐에 목검 한 자루뿐이군. 진검은 없나."
"손에 익은 것이 이것뿐입니다."
"검이야 관에서 쥐여 주면 되는 것이고. 이름이 한백이라 — 잣나무 백 자를 쓰는가."
"예."
"곧게 자라는 나무지. 이름값 하게. 과묵한 건 요즘 보기 드문 미덕일세."
담기원은 지원서 종이를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종이의 결을 재는 듯한, 버릇으로 굳은 작은 동작이었다.
백의 눈이 저도 모르게 손끝을 좇았다.
문서를 아는 손이 문서를 아는 손을 알아보는 서늘함이 지나갔다.
의미는 오지 않았다.
담기원은 지원서를 내려놓았다.
"몸 성히 겨루게."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까지였다.
온기만 남기고 지나가는 스침이었다.
관심은 비용이다.
다행히 값이 붙지 않은 관심이었다.
"한백. 비무장으로."
호명이 왔다.
앞줄의 사내가 손을 들어 보였다.
"호명이 빠르구려. 방에서 봅시다."
백은 목검을 고쳐 쥐었다.
입관 비무장은 외원(外院) 연무장 구석에 백토로 금을 그어 만든 자리였다.
판정석 난간에 마른 체구의 노인이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관주 여숭(呂嵩)이라는 말이 대기 줄에서 낮게 돌았다.
난간을 짚은 손이 산의 뿌리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백. 동편에 서라."
"입관 비무는 목검으로 한다. 상대가 넘어지거나 금 밖으로 나면 끝난다. 예를 갖춰라."
진행 교관의 구령은 짧았다.
상대는 머리 하나가 더 큰 지원자였다.
목검을 쥔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대기 줄에서 수군거림이 들렸다.
"덩치 좀 봐라. 신입 하나 잡겠구먼."
"목검 쥔 꼴 하고는. 서당에서 회초리나 잡던 솜씨 아니냐."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끝내 주마."
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를 갖춰 목검을 세웠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셈이 끝나 있었다.
화려하게 이기면 눈에 남는다.
호표검으로 이기면 서문표국이 드러난다.
맞으면서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시작."
첫 합.
내리치는 목검을 반 걸음 물러나 흘렸다.
손목으로 마른 진동이 탔다.
힘으로 받으면 표국의 결이 나온다.
백은 받지 않았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테냐! 검이 아깝다, 이놈아!"
둘째 합.
상대의 검이 어깨를 노리고 떨어졌다.
백은 반만 피했다.
왼 어깨에 나무가 박히는 둔통이 터졌다.
관전하던 줄에서 웃음이 샜다.
그 각도였다.
위에서 아래로, 어깨에서 등으로 떨어지는 각도.
눈앞의 연무장이 한순간 그날 밤의 눈길로 바뀌었다.
뒤집힌 수레, 눈 위의 불빛, 백을 가리고 엎드린 형의 등.
서문송(西門松)의 등에는 베인 자국이 두 줄로 나란히 지나가 있었다.
얕은 상처와 깊은 상처가 짝을 이룬 두 줄.
얕게 한 번, 깊게 한 번.
눈이 그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손목까지 반사가 올라왔다.
흘리고 되돌리는 호표검의 결이 몸보다 먼저 움직이려 했다.
백은 손바닥 안의 나무 결을 움켜쥐었다.
맹세의 감촉이었다.
반사를 눌러 삼켰다.
넷 들이쉬고 둘 내쉬었다.
셋째 합.
상대가 승기를 잡았다고 믿고 크게 들어왔다.
디딤발이 앞으로 쏠렸다.
백은 물러나던 걸음을 반 박자 멈추고 상대의 앞발 바깥을 목검 끝으로 짚듯 밀었다.
균형이 무너졌다.
덩치 큰 몸이 백토 위에 제 힘으로 넘어졌다.
마른 먼지가 올랐다.
"발이, 발이 미끄러졌다!"
"승부 났다. 동편 승."
"저게 이긴 건가."
"운이 좋았구먼."
관전 줄의 수군거림이 어중간하게 식어 갔다.
승부로는 이긴 것이고 구경으로는 초라한 것이었다.
백이 바란 꼭 그만큼이었다.
판정석의 여숭이 입을 열었다.
"통과. 외원 말석."
짧은 판정문이었다.
백이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 할 때 한마디가 더 왔다.
"검은 어디서 익혔느냐."
"떠돌이 검객에게 배웠습니다. 함자는 모릅니다."
여숭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한 박자 길게 머물렀다.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을 읽지 못한 자의 시선이었다.
백은 고개를 숙인 채 그 무게를 견뎠다.
힘이 없어 절제한 것인지 감추느라 절제한 것인지, 판정문은 답을 적지 않았다.
방문(榜文) 끝줄에 한백 두 글자가 붙었다.
해 지기 전에 외원 말석 숙사에 짐을 들였다.
침상 여덟이 놓인 방의 문가 자리, 바람이 제일 먼저 드는 끝이었다.
고참 생도 셋이 문을 막아섰다.
가운데 하나가 팔짱을 꼈다.
"신입은 짐부터 푼다. 숙사 규칙이다."
"말석 보퉁이가 뭐 볼 게 있다고. 은자 나올 보퉁이는 위쪽 방에나 있지."
"시끄럽다. 규칙은 규칙이다."
낄낄대는 소리가 뒤따랐다.
백은 잠깐 셈을 했다.
맞서면 첫날부터 표적이 된다.
은자를 찔러 주면 만만한 전주로 찍힌다.
낱장 꾸러미는 비무장을 나서며 이미 옷 속 가슴께로 옮겨 둔 뒤였다.
보퉁이 안에는 약 꾸러미와 여벌 옷과 목검뿐이었다.
백은 웃는 낯으로 보퉁이를 열어 보였다.
"보실 것도 없습니다."
고참의 손이 보퉁이를 뒤적였다.
마른 약재 냄새에 코를 찡그리는 얼굴이 보였다.
"약봉지에 목검 한 자루라. 살림 한번 단출하다."
"병자 놈이었군. 어쩐지 비무 꼴이 그렇더라."
"비무장에서 봤다. 어깨 맞고도 소리 한 번 안 내던 놈이다."
"맷집 하나는 타고났나 보지."
"이름이 뭐랬지."
"한백입니다."
"한백이. 문가 자리 쓰고, 아침 물 당번은 신입 몫이다. 물은 우물이 아니라 부엌 독에 채운다."
"알겠습니다."
"비무에서 어깨 내준 놈이 물지게는 지겠느냐."
"집니다."
"재미없는 놈이다. 가자."
텃세는 싱겁게 시들었다.
수모는 값이다.
값은 치르면 된다.
백은 문가 침상에 앉아 그 셈을 한 번 더 눌러 두었다.
시선이 없는 자리는 숨기에 좋은 자리이기도 했다.
밤이 왔다.
말석 숙사에는 등잔이 배급되지 않았다.
코 고는 소리가 고르게 가라앉기를 기다려 백은 가슴께의 꾸러미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기름 먹인 천을 폈다.
손끝에 재가 묻었다.
그을음 냄새가 코끝에 낮게 앉았다.
보이지 않아도 읽혔다.
수백 번 만져 외운 낱장들이었다.
죽은 표사들의 이름과 미지급 삯이 적힌 장들이 손끝을 지나갔다.
갚아야 할 항목들이었다.
장부에 적힌 것은 반드시 갚는다.
표국이 백에게 남긴 마지막 법이었다.
가장 안쪽의 한 장을 폈다.
반쯤 탄 대부 기록이었다.
액수는 표국이 다룬 어떤 계약보다 컸다.
기일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채무자의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푸를 청(靑) 한 자.
성인지 호인지 알 수 없는 외자 표기였다.
누가 이만한 돈을 빌렸는가.
왜 이름이 절반만 남았는가.
낱장은 그 앞에서 말을 멈췄다.
백의 셈도 거기서 멈췄다.
낱장 하나로 세울 수 있는 답은 없었다.
그날 밤과 닿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종이가 타다 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라는 감각만이 손끝에 분명했다.
백은 낱장을 다시 싸서 품에 넣었다.
창밖을 보았다.
달빛 아래 서열비가 검게 서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비석 맨 끝에 한백이라는 이름이 얕게 새겨질 것이었다.
잠긴 문들은 전부 비석 위쪽에 있었다.
장서각도, 진품각도, 그 너머 내원(內院)의 담도.
어깨의 멍은 맞아서 든 것이지 검을 써서 든 것이 아니었다.
단맥(斷脈)은 오늘 잠잠했다.
백은 오늘 치른 값을 셈했다.
맹세 하나, 멍 하나, 수모 하나.
취득은 담장 하나.
셈은 맞았다.
그러나 말석에서는 아무 문도 열리지 않는다.
오르려면 값이 더 필요했다.
백은 품 안의 종이 무게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갚아야 할 이름들이 거기 잠들어 있었다.
비석의 돌은 차가웠다.
새길 이름은 얕았다.
갚을 장부는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