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23년 삼월 중순.
외원(外院) 숙사의 아침은 닷새째 물지게로 열렸다.
서문백(西門柏)은 우물가에서 지게를 졌다.
왼 어깨의 멍은 누렇게 가라앉는 중이었으나 멜대가 얹힐 때마다 속에서 결렸다.
부엌 독까지 왕복 여덟 번.
독에 차오르는 물 높이가 당번의 끝을 재는 자였다.
여섯 번째 왕복에서 뒷마당을 지나던 고참 하나가 발을 멈췄다.
입관 비무를 구경했다는 낯이었다.
"병자 놈이 부지런은 하다."
곁의 동기가 낄낄대며 받았다.
"비무에서 어깨 내준 놈이 지게는 용케 지는구나."
"맷집으로 버티는 게지. 말석은 원래 몸으로 사는 자리다."
먼저 멈췄던 고참이 지게 위 물통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물은 넘치지 않게 길어라. 마당에 흘린 물도 말석 몫이니."
"예. 흘리지 않겠습니다."
백은 대답을 짧게 끊고 지게를 고쳐 멨다.
셈은 닷새 전부터 서 있었다.
수모는 값이다.
값은 치르면 된다.
맞서도 시선을 사고 웃어 보여도 시선을 산다.
시선은 언제나 수모보다 비쌌다.
일곱 번째 물을 붓고 돌아설 때 침상 셋째 줄의 고참이 앞을 막았다.
개방비무 소리가 돈 뒤로 목검을 끼고 자는 사내였다.
"한백이. 오늘 창고 당번은 네가 서라."
"물 당번을 마치고 가겠습니다."
"그래, 부지런한 놈이 마저 부지런해야지. 시험이 코앞인데 수련할 사람이 창고 먼지를 마시겠느냐."
"알겠습니다."
"명부에는 내 이름이 올라 있다만, 서는 건 네가 선다. 집사한테는 말해 두마."
"예."
"해 지기 전에 물목을 맞춰 놓아라. 하나라도 어긋나면 네 몫이다."
"예."
"재미없는 놈이라니까."
고참은 하품을 하며 갔다.
하루치 노동이 하나 더 얹혔다.
백은 마지막 물을 붓고 지게를 벽에 세웠다.
밑지기만 한 셈은 아니었다.
시험 철의 창고는 관의 물목이 다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시선 없는 자리에서 줍는 것은 값이 붙지 않은 정보였다.
창고로 가는 길은 서열비(序列碑) 앞을 지났다.
비석 곁에 새 방문(榜文)이 붙어 생도들이 웅성거렸다.
개방비무(開放比武), 삼월 하순 개최.
도전은 명부 기재로 신청한다.
승자는 판정에 따라 승급한다.
백은 활자를 한 자씩 옮겨 읽었다.
말석에게 열리는 유일한 공식 문이었다.
문에는 값이 붙어 있을 것이었다.
곁에서 방문을 읽던 생도 하나가 일행에게 물었다.
"명부는 언제부터 받는다더냐."
"열흘 전부터라더라. 올리는 거야 아래 서열도 자유라지."
"올리고 나서가 문제지. 첫 판에 어느 고참 앞에 서게 될 줄 알고."
"그러니 명부가 얇은 게다. 이름 석 자에도 값이 붙는 자리니까."
"승자는 그 자리에서 승급이라니, 한 판에 몇 계단을 오르는 셈이냐."
"오르는 만큼 다음 상대가 사나워지는 게지. 공짜 계단이 어디 있어."
백은 그 셈을 같이 들었다.
이름 석 자에도 값이 붙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비석 맨 끝으로 눈을 내렸다.
한백(韓柏) 두 글자가 얕게 새겨져 있었다.
손톱 반만 한 깊이였다.
이름의 깊이가 서열의 깊이라면 지금 제 이름은 돌 위에 겨우 얹혀 있는 셈이었다.
잡역 창고는 외원 담 모퉁이의 낡은 기와채였다.
시험 철이라 맡길 짐이 아침부터 밀렸다.
봉인 상자, 궤짝에 든 병장기, 사가에서 부쳐 온 옷 궤.
백은 짐마다 물목 쪽지를 대조하고 시렁에 올렸다.
문서를 아는 손에는 익은 일이었다.
동기들은 창고를 사랑방처럼 썼다.
짐을 맡기고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소문을 부렸다.
백은 손을 늦추지 않았다.
낯선 객잔에서 표사가 하던 버릇 그대로 귀만 열어 두었다.
키 큰 동기가 운을 뗐다.
"위쪽 방 고참들은 벌써 대련 상대 맞추느라 야단이더라."
곰보 자국의 동기가 심드렁하게 받았다.
"그러니 잡역이 죄 신입한테 밀리는 게지. 시험 철 창고 당번을 누가 서겠냐."
키 큰 동기가 화제를 바꿨다.
"외원 중상위 은씨 소저도 이번 개방비무에 나온다더라."
곰보 자국이 되받았다.
"은가락(殷家洛) 씨 말이냐. 셈 밝고 예의 바르기로 소문난."
"그래. 이번에는 내원 문턱까지 간다는 말이 많다."
"교관들 신임이 두터운 생도지. 규정 하나 안 어기고 오른 서열이니."
"그 댁이 참사 유족인 건 알고 하는 소리냐."
키 큰 동기가 목소리를 낮췄다.
"서문표국(西門鏢局) 일 말이지. 지난 섣달에 상행이 통째로 몰살당했다는."
"그 마지막 호송의 의뢰인이 그 댁 어른이다. 은진서(殷振瑞)라고, 근동 상가에서 모르는 이가 없던 어른이지."
"검을 찬 장사꾼이었다지. 배상이니 재조사니 말만 돌다가 흐지부지 끝났다더라."
"장사치 집안 일에 관이 오래 매달릴 리가 있나."
"소저가 내원에 들면 유족 말이 좀 서려나."
"서기는 뭘 서. 끝난 일이라고 방까지 붙은 일인데."
은진서.
백의 손이 물목 쪽지 위에서 반 박자 느려졌다가 제 속도를 찾았다.
품 안 낱장 묶음에서 가장 큰 항목에 적힌 이름이었다.
셈이 서지 않아 덮어 둔 항목이었다.
곰보 자국이 말을 이었다.
"그 소저가 유품을 지니고 다닌단다. 부러진 검자루라던가."
"지난해에는 진품각(珍品閣)에 위탁해 뒀다더라. 위탁 물목에서 봤다는 생도가 있다."
"진품각 물목을 네가 어찌 아느냐. 예순 안에 들어야 문턱을 밟는 데를."
"본 놈이 예순 안이니 봤다는 게지. 참사 유품이라고 물목에까지 말이 돌았단다."
"그 성미에 아비 물건을 관에 맡기는 심정이 오죽하겠냐."
"맡길 데가 관밖에 없으니 맡기는 게지. 시험 철 숙사가 어디 물건 둘 데더냐."
곰보 자국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검자루에 관 대장간 각인이 찍혀 있다지. 아비 유품에 관 물건 표식이라, 묘한 일 아니냐."
"묘하긴 뭐가 묘해. 관 대장간 검이야 저자에도 쌨다. 각인이 무슨 대수라고."
"부러진 검이면 날 반쪽은 어디 갔대냐."
"눈밭에서 못 찾았다더라. 찾은들 부러진 검을 누가 잇겠냐만."
문가에 걸터앉았던 셋째가 하품 섞어 끼어들었다.
"유족이야 딱하지만 팔아먹은 놈이 문제지. 서문표국 막내가 돈을 받고 노정을 팔았다지 않느냐."
키 큰 동기가 맞장구를 쳤다.
"녹림(綠林) 떼가 그 노정을 그대로 쳤다더라. 방까지 붙었던 일이다."
"그 막내는 그 뒤로 코빼기도 안 보인다지."
"낯짝이 있어야 보이지. 무너진 표국 문짝에 아직도 배신자라고 먹칠이 돼 있다더라."
셋째가 손가락을 꼽아 보였다.
"노정 값이 은자 오백 냥이라던가."
키 큰 동기가 코웃음을 쳤다.
"오백은 무슨. 내가 들은 데서는 천 냥이더라. 소문마다 값이 오르는 게 그 장사다."
셋째가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값이야 어떻든 그 밤에 산 사람은 그 막내 하나뿐이었다지. 판 놈만 살았으니 세상 참 고르다."
웃음이 낮게 돌았다.
백은 시렁의 짐을 고쳐 쌓았다.
손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듣고 있는 것이 된다.
끼어들면 관심이라는 값이 붙는다.
다만 물지게보다 무거운 것이 어깨에 얹혔다.
소문 속에서 가장 큰 항목이 얼굴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창고 문이 다시 열렸다.
비단 주머니를 두 팔로 안은 여학생이 문턱을 넘었다.
짐보다 걸음이 먼저 눈에 왔다.
서두르지 않되 물러서지도 않는 걸음이었다.
문가의 동기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수군거림이 낮게 오갔다.
"저 소저가 창고엔 웬일이냐."
"위탁하러 왔겠지. 시험 철엔 다들 맡긴다."
소문의 주인이었다.
은가락이 접수대 앞에 섰다.
"위탁 접수를 하러 왔어요. 진품각 재위탁이에요."
관 기물의 출납을 쥔 창고 집사가 물목 장부를 폈다.
늙수그레한 사내였다.
"물목은."
"검자루 하나예요. 예전 위탁 이력이 진품각 명부에 있어요."
집사가 장부를 넘기며 되물었다.
"기한은."
은가락이 또박또박 답했다.
"개방비무가 끝날 때까지요. 찾을 때는 제가 직접 옵니다."
"시험 철에는 위탁 접수를 창고가 대행한다. 포장은 당번이 하고 물건은 내일 아침 관 절차로 진품각에 든다. 수수료는 두 푼이다."
"알아요. 그래서 왔어요. 시험 철 숙사에는 둘 수 없는 물건이라서요."
집사가 장부 곁의 벼루를 당겼다.
"소유주 성명과 서명. 위탁 물건은 소유주 허락 없이는 감정도 반출도 없다. 그건 알고 있겠지."
"압니다. 그 규칙을 믿고 맡기는 거예요."
붓을 받아 쥔 손이 흔들림 없이 이름 두 자를 적었다.
집사가 장부를 돌려받으며 물었다.
"생김새를 부른다. 기재할 것이니 그대로 말해라."
"부러진 검의 자루 쪽 반절이에요. 날은 중동에서 꺾였고 밑동이 한 뼘쯤 남았어요. 감개는 가죽이고요."
"표식은."
"코등이 안쪽에 단조 각인이 있어요. 관 대장간 것이라 들었어요."
"됐다. 꺾인 날과 흠은 위탁 전 것으로 기재한다."
집사의 턱이 백을 가리켰다.
은가락의 시선이 백을 스쳤다.
낯선 신입을 확인하는, 무게를 얹지 않은 시선이었다.
"손 타는 물건이에요. 날 밑동이 성치 않으니 천으로 먼저 받쳐 주세요."
백은 고개를 숙였다.
"받겠습니다."
접수대에 무명천을 폈다.
비단 주머니가 탁자에 놓였다.
아가리가 열리고 부러진 검자루가 나왔다.
날은 중동에서 꺾여 사라지고 자루와 코등이와 한 뼘 남짓한 날 밑동만 남은 반절이었다.
손때 먹은 가죽 감개에 오래 쥔 손의 모양이 배어 있었다.
죽은 사람의 손 모양이었다.
백은 그 독해를 손끝에서 지웠다.
유품에 시선이 반 박자만 길게 머물러도 관심이 된다.
관심은 유족의 상처를 건드리는 값이다.
구경이 모였다.
말석이 시중드는 꼴을 보러 동기들이 시렁 사이로 어깨를 들이밀었다.
좁은 통로에 사람이 찼다.
그때 누군가의 어깨가 시렁 기둥을 쳤다.
시렁 위의 봉인 상자 더미가 기울었다.
무게가 떨어질 자리를 눈이 먼저 보았다.
유품이 놓인 탁자였다.
백은 생각보다 먼저 몸을 넣었다.
검이 아니었다.
보법도 아니었다.
물지게와 짐으로 다져 온 등이었다.
상자 모서리가 등줄기를 치고 흘렀다.
맨 위의 등잔 기름 단지가 어깨 너머로 넘어가 바닥에서 깨졌다.
쨍그랑!
기름 냄새가 퍼졌다.
창고가 잠깐 조용해졌다.
구경꾼 사이에서 낮은 소리가 샜다.
"굼뜬 놈이 시렁을 통째로 받네."
"말석이 말석 값을 하는 게지."
집사가 혀를 찼다.
"관 기물이다. 파손은 당번 책임이야."
시렁을 친 어깨의 임자는 이미 구경꾼들 뒤로 물러나 있었다.
집사가 벌역(罰役) 명부를 폈다.
붓이 먹을 머금었다.
은가락이 한 걸음 나섰다.
"제가 본 것은 다릅니다. 시렁이 먼저 흔들렸어요. 이분은 상자를 등으로 받았고요."
집사가 붓을 든 채 백을 보았다.
"당번. 할 말 있나."
백은 한 호흡 늦게 대답했다.
"제 손이 미끄러졌습니다. 당번 책임이 맞습니다."
은가락의 시선이 백에게 잠깐 머물렀다.
제 잘못이 아닌 것을 제 잘못으로 적게 두는 신입을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다 절차의 어휘 안으로 돌아갔다.
"…기재는 정확히 부탁드려요. 깨진 것은 등잔 기름 단지 하나입니다."
집사의 붓이 움직였다.
"창고 당번 한백. 관 기물 파손 하나. 벌역 명부에 올린다."
집사가 붓을 놓으며 덧붙였다.
"벌역은 명부 순서대로 부른다. 부르면 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소동은 그렇게 닫혔다.
구경꾼들의 흥미는 깨진 단지와 함께 쓸려 나갔다.
유품은 화제가 되지 않았다.
그거면 된 셈이었다.
은가락은 싸다 만 무명천과 백의 손을 잠시 보았다.
"싸던 손이 조심스럽네요. 마저 부탁드려요."
무심한 허락이었다.
백은 고개를 숙이고 유품 위로 무명천을 여몄다.
은가락이 싸이는 유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덧붙였다.
"매듭은 두 번 지어 주세요. 옮겨 가는 길에 풀리지 않게요."
"그리하겠습니다."
집사가 물목 쪽지를 접수대에 밀어 놓았다.
"물목과 실물 대조는 당번 몫이다. 어긋나면 네 벌역에 얹힌다."
"대조하겠습니다."
코등이 안쪽이 손끝에 닿았다.
단조 각인이었다.
화로 위에 구름 세 줄을 얹은 문양.
청람관(靑嵐館) 부속 대장간의 표식이었다.
눈이 한 번 읽고 손끝이 한 번 더 읽었다.
이 검은 관 대장간에서 벼려졌다.
각인이 말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어디서 벼려졌는가는 말해도 누구의 손에 갔는가는 말하지 않는 반쪽짜리 글자였다.
집사가 물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위탁 물목, 부러진 검자루 하나. 소유주 은가락. 보관처 진품각."
소재가 소리로 확정되었다.
낱장 하나뿐이던 셈 곁에 두 번째 조각의 좌표가 생겼다.
백은 낱장을 싸던 결 그대로 유품을 쌌다.
기름 먹인 천과 무명천.
싸는 물건이 다를 뿐 손의 순서는 같았다.
집사가 장부를 덮으며 일렀다.
"찾을 때는 서명과 대조한다.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
"네. 그때도 제가 옵니다."
"물표는 내일 진품각 도장이 찍혀 나온다. 창고로 찾으러 와라."
"알겠습니다. 내일 다시 오죠."
은가락이 접수 기재를 훑고 붓을 놓았다.
명부의 이름을 본 뒤였다.
"고마워요, 한백 씨."
"살펴 가십시오."
대답은 반 박자 늦었다.
은가락은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챌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네게 한백이어야 한다.'
빈 두 팔로 문턱을 넘는 등이 곧았다.
문이 닫혔다.
밤이 왔다.
말석 숙사의 어둠은 등잔 없이 고른 숨소리로 찼다.
백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 가슴께의 꾸러미를 꺼냈다.
손끝에 재가 묻었다.
그을음 냄새가 낮게 앉았다.
수백 번 만져 외운 결이라 보이지 않아도 읽혔다.
오늘은 처음으로 한 항목을 끝까지 골랐다.
갚음은 순서를 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갚을 수 있는 것부터.
얼굴을 마주칠 일 없는 항목부터.
표사 장평(張平).
마지막 표행에서 왼쪽 짐수레를 몰던 사람.
미지급 삯 두 냥 여섯 전.
처가 성밖 버들골에 산다.
백은 낱장의 획을 어둠 속에서 하나씩 짚었다.
젓가락질이 헤프고 웃음이 크던 사람이었다.
삯은 종이 위에 남고 사람은 없었다.
은진서 항목은 그 곁에 있었다.
가장 큰 항목.
오늘 그 항목의 채권자가 얼굴을 얻었다.
갚을 수도 알은체할 수도 없는 항목이었다.
비단 주머니를 안고 있던 두 팔과 제가 본 것은 다르다던 목소리가 셈의 줄을 자꾸 흐트러뜨렸다.
백은 낱장을 다시 싸서 품에 넣었다.
벌역은 값이었다.
값이면 치를 수 있고 값이면 다른 값과 바꿀 수도 있었다.
개방비무는 하순이었다.
도전 명부에 말석의 이름을 올리는 데에도 값이 필요할 것이었다.
창밖으로 진품각의 지붕이 검게 웅크리고 있었다.
부러진 검자루는 오늘 밤부터 저 안에서 잔다.
아버지의 손 모양이 밴 물건을 맡기고 딸은 낯선 신입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백은 숨을 낮게 골랐다.
갚을 얼굴을 보고 온 밤이었다.
손끝의 재를 옷자락에 닦았다.
재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