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23년 사월 하순.
사무의 담벼락에 방(榜) 두 장이 나란히 붙는 아침이었다.
서문백(西門柏)은 인파의 뒤쪽에 섰다.
서리들이 밤 서고의 명부를 뒤졌다는 말이 돈 지 사흘째였다.
조사가 도는 동안 백은 야간 열람의 걸음을 스스로 멈춰 두었다.
물 당번은 여전히 닭 울기 전마다 채워졌다.
어깨의 멍은 자국만 남기고 내려앉아 있었다.
왼쪽의 방은 조사의 종결이었다.
관 사무의 지질에 관 사무의 어휘가 얹혀 있었다.
앞줄의 생도가 소리 내어 읽었다.
"부정행위의 고발 건. 신청 명부와 일손 배정의 기재대로 확인되어 불문(不問)에 부친다. 보류한 재산정은 재개한다."
곁의 동기가 받았다.
"서리들이 뒤져서 기재가 나왔으면 끝난 게지. 고발한 쪽만 우스워졌구먼."
뒷줄에서 누군가 얹었다.
"고발자가 누군지는 끝내 안 적혔다. 시기인지 겨냥인지도 모른 채 닫힌 게야."
곁의 동기가 목소리를 낮췄다.
"조사가 뭘 뒤지긴 했다던가."
앞줄의 생도가 방문 쪽으로 턱짓했다.
"서리들이 밤 서고 명부를 사흘을 뒤졌다더라. 신청 기재와 일손 배정이 그대로 나온 게지. 기재는 편이 없으니까."
오른쪽의 방은 재개된 재산정이었다.
위쪽 두 이름 곁에 지명 대련 판정패와 벌점의 작은 주가 달려 있었다.
두 이름이 내려앉은 만큼 아래가 올라 있었다.
마흔둘째 줄에 한백(韓柏) 두 자가 적혀 있었다.
앞줄의 생도가 활자를 짚었다.
"별난 신입이 조사를 결백으로 지나갔군. 줄은 또 두 계단 올랐고."
곁의 동기가 웃음기 없이 받았다.
"이번에도 제 판은 없었다. 남의 벌점이 올린 줄이야. 제 판 없이 오른 줄에는 지킬 판부터 온다는 말, 이 사람한테는 두 번째구먼."
뒷줄에서 누군가 하품 섞어 얹었다.
"순휴가 코앞이라 다행이지. 훑는 눈들도 하루는 쉴 테니."
곁의 동기가 받았다.
"쉬는 눈이 어디 있나. 담 안 눈이 감기면 저자 눈이 대신 뜨는 게지."
백은 두 장의 방 앞에 오래 서지 않았다.
눈은 왼쪽 방의 끝자락에 먼저 갔다.
결재 자리에 깊고 단정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관주 직인의 통상 결재였다.
대여 장부의 반출 기재에서 본 인영과 같은 손질이었다.
백은 사실 하나를 사실인 채로 담아 두었다.
풀린 것은 줄과 문이었다.
몸을 낮출 셈은 그대로 남았다.
해가 기울 무렵 백은 약당(藥堂)의 문턱을 넘었다.
보름의 약조가 돌아온 날이었다.
쑥과 당귀 달이는 냄새가 문 앞까지 낮게 깔려 있었다.
매향(梅香)이 썰던 약재를 밀어 두고 턱짓했다.
"앉아. 팔."
백은 소매를 걷어 손목을 내밀었다.
매향의 손끝이 맥 위에 오래 앉았다가 떨어졌다.
"떨림은 없구나. 잠은 도로 자는 게냐."
"조사가 닫혔습니다. 밤 서고는 당분간 쉽니다."
"쉰다는 놈의 낯이 왜 성문 쪽을 보고 있어."
백은 반 박자 늦게 답했다.
"내일 순휴(旬休)에 성밖에 다녀오겠습니다."
"성밖 어디."
"버들골입니다. 갚으러 갑니다."
매향의 손이 멎었다.
약재 써는 소리가 끊긴 자리에 물음이 낮게 앉았다.
"갚으러 간다는 놈이 조사 끝난 다음 날로 담을 나서. 훑는 눈이 아직 안 식었는데."
"순휴 하루면 다녀올 길입니다."
"길 얘기가 아니라 몸 얘기다. 훑는 눈에 성밖 걸음이 어찌 보일지 셈은 해 봤느냐는 게야."
백은 다투는 대신 항목의 이름을 낮게 놓았다.
"장평(張平)이라는 표사의 삯입니다. 다섯 달 밀렸습니다."
침묵이 약탕 끓는 소리보다 짧았다.
죽은 사람의 이름 앞에서 매향의 저울이 몸에서 걸음으로 옮겨 앉았다.
매향은 혀를 한 번 차고 물었다.
"삯은 무슨 돈으로 갚아. 네 형편에."
"입관 전에 저자에서 짐삯으로 모은 돈이 있습니다. 석 달 몫입니다."
"약값 외상은 여태 그대로면서."
"약값은 산 사람의 항목입니다. 죽은 사람들 것이 먼저입니다."
매향이 대꾸 대신 시렁에서 달인 약 한 꾸러미를 내려 백의 품에 밀어 넣었다.
"버들골 어귀 국숫집 노모한테 가는 약이다. 어차피 인편을 구하던 참이야. 심부름이면 성문지기도 까닭을 묻지 않는다."
"맡겠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라. 늦으면 그날로 약은 끊는다."
"어김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숙사의 밤, 백은 침상 밑에서 전대(纏帶)를 꺼냈다.
입관 전 석 달 저자에서 짐삯으로 모은 돈이 들어 있었다.
두 냥 여섯 전과 몇 푼.
변제의 전대에는 약값 외상도 손대지 않았다.
무명천의 닳은 결 위로 동전의 무게가 낮게 눌렸다.
백은 전대를 낱장 묶음 곁에 나란히 두고 눈을 감았다.
순휴의 아침 저자는 소리부터 달랐다.
좌판을 펴는 손들과 흥정의 첫마디가 길바닥에 깔렸다.
백은 약 꾸러미와 전대와 낱장 묶음을 품 안에 겹쳐 누르고 성문 쪽으로 걸었다.
세 가지 무게가 한 겹씩 다르게 눌렸다.
소목방 앞에서 걸음이 반 박자 걸렸다.
대패밥 냄새가 문밖까지 밀려 나왔다.
낯익은 뒷모습이 좌대 앞에 서 있었다.
은가락(殷家洛)이었다.
좌대 위에 부러진 검자루가 놓여 있었다.
늙은 장인이 자 눈금을 대며 말했다.
"갑을 뜨려면 감개부터 벗겨야 하네. 가죽에 곰팡이가 앉았고 치수도 이 감개 때문에 안 맞아."
은가락의 손이 좌대 가장자리에서 멎어 있었다.
엄지가 버릇처럼 코등이 안쪽을 문질렀다.
"감개는 그대로 두고 싶어요."
장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받았다.
"그대로 두면 갑 안에서 삭네. 손님 뜻이 그러면 할 수 없네만."
은가락이 고개를 돌리다가 백을 보았다.
단정한 해요체가 반가움의 온도만큼만 올라왔다.
"한백 씨. 창고에서 뵌 뒤로 처음이네요."
백은 목례로 받았다.
"은 소저."
은가락의 눈이 좌대의 검자루와 백의 손을 한 번씩 오갔다.
"창고에서 싸던 손이 조심스러웠지요. 지나는 길에 하나만 여쭐게요. 벗기지 않고 넣는 길은 없을까요."
백은 물건을 물건으로만 보는 순서로 보았다.
가죽 감개에 오래 쥔 손의 모양이 배어 있었다.
다섯 달 품 안의 낱장을 지켜 온 손이 손때의 값부터 먼저 읽었다.
말이 길어지면 손이 내력을 말한다.
한 마디의 절제가 은폐이자 예의였다.
"기름 먹인 무명으로 싸서 넣으면 됩니다. 기름이 습을 막고 천이 치수를 줍니다."
장인이 바로 수긍하지 않고 자 눈금을 다시 댔다.
"기름천이 곰팡이야 막겠지. 치수는 어쩌고. 감개가 울면 갑이 헐거워질 텐데."
백은 물성의 근거 한 줄로만 받았다.
"천을 감는 두께로 치수를 맞추면 됩니다. 우는 자리는 천이 받쳐 줍니다."
장인이 자를 내려놓고 셈을 고쳤다.
"물건 만져 본 손이구먼. 그 셈이면 감개를 벗길 일이 없네. 천 값은 몇 푼이면 되고."
은가락이 좌대의 검자루를 눈으로 한 번 쓸었다.
"기름 먹인 무명이요. ……그 천이면 감는 것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백은 방법의 절차만 짧게 놓았다.
"어렵지 않습니다. 결을 따라 한 방향으로만 감으면 됩니다."
장인이 검자루를 들어 코등이 안쪽을 한 번 더 살폈다.
"관 대장간 각인이구먼. 관 대장간 물건이야 저자에도 흔하니 값으로 칠 표는 아니야. 값 말고 다른 셈이 있는 물건이겠지."
은가락이 절차의 어휘로 받았다.
"진품각(珍品閣) 위탁이 개방비무(開放比武)까지였어요. 어제 서명을 대조하고 제가 직접 찾아왔고요. 이제는 곁에 둘 갑이 필요해서요."
은가락이 백 쪽으로 반듯하게 목례했다.
"고마워요, 한백 씨."
백은 사례를 물성으로 되돌렸다.
"물성의 셈일 뿐입니다. 살펴 가십시오."
은가락이 반 걸음 물러서며 답례했다.
"살펴 가세요, 한백 씨. 천 값은 셈에 적어 둘게요."
백은 저자의 소음 속으로 도로 걸음을 옮겼다.
갚을 수도 알은체할 수도 없는 항목의 채권자가 등 뒤에 있었다.
도움 하나가 항목의 가장자리에 놓였다.
갚음은 아니었다.
갚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채로 놓는 도움이었다.
걸음의 무게가 한 겹 늘었다.
성문은 심부름의 매듭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문지기는 약 꾸러미의 매듭과 얼굴을 한 번씩 보고 턱짓으로 길을 열었다.
성밖의 길은 수레바퀴 자국을 따라 낮게 굽었다.
버들골 어귀 국숫집에서 백은 노모에게 약 꾸러미를 건넸다.
"약당 심부름입니다. 하루 두 번, 끼니 뒤에 달여 드시랍니다."
노모가 꾸러미를 받으며 답했다.
"고맙수. 요즘 다리가 이 모양이라 성안 걸음을 통 못 했는데."
노모가 국수 한 그릇을 말아 주겠다는 손짓을 했다.
백은 사양으로 물리고 길을 물었다.
"장평이라는 표사의 댁이 이 골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모의 손이 반 박자 멎었다.
"장씨네 말이구려. ……그 집에 뭘 전할 게 남았수."
백은 심부름꾼의 자리에서 답했다.
"전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문간에 나와 있던 예닐곱 살 아이가 발끝으로 오르막을 가리켰다.
"장씨 아저씨네는 저 오르막 끝 집이에요. 이맘때면 아주머니가 물 길으러 내려와요."
오르막 중턱에서 물지게를 진 여인과 마주쳤다.
멜대가 마른 어깨를 깊게 누르고 있었다.
백은 말없이 지게 곁에 서서 몸을 낮췄다.
"지게를 이리 주십시오. 올라가는 길입니다."
여인의 눈이 낯선 얼굴을 한 번 쟀다.
"남의 골 손님한테 지울 짐이 아니오."
"길이 같습니다. 지고 오르는 쪽이 빠릅니다."
여인이 잠깐 망설이다 지게를 넘겼다.
물지게 멜대가 어깨에 앉았다.
물 당번으로 다져 온 등이 무게를 받았다.
오르막의 반쯤에서 여인이 곁눈으로 물었다.
"지는 품이 익은데. 물 일을 하오."
"물지게는 오래 졌습니다."
오르막 끝의 사립문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토방에는 빗물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여인이 물독에 물을 다 비우고 나서야 물었다.
"뉘시오. 이 골에 올 심부름꾼이 없는데."
"장평이라는 표사의 댁을 찾아왔습니다. 떼인 삯을 전하러 온 심부름입니다."
여인의 낯이 굳었다.
과부의 눈이 토방과 사립문과 백의 행색을 차례로 쟀다.
"삯이라니. 다섯 달 동안 온 것은 관아의 여덟 자 방문뿐이었소. 이제 와서 누가 삯을 보낸단 말이오."
"장부가 남았습니다. 장부의 심부름입니다."
"장부라니. 뉘 장부 말이오."
"표국의 장부입니다. 표사들의 삯이 항목대로 남았습니다."
과부의 눈이 좁아졌다가 물독 곁의 빈 지게 위로 옮겨 갔다.
"……물 진 손님을 문밖에 세워 두는 법은 없지. 들어오시오."
방 안은 낮고 깨끗했다.
방구석에 삯바느질감이 밀려 있었다.
개다 만 무명과 이 빠진 그릇이 살림의 다섯 달을 대신 말했다.
과부는 돈보다 먼저 저울을 내놓았다.
"판 놈의 돈이면 서방의 목숨값이오. 목숨값은 못 받소."
백은 변명을 얹지 않았다.
품 안에서 그을린 낱장을 꺼냈다.
손끝에 재가 묻었다.
그을음 냄새가 방 안에 낮게 앉았다.
"장부에 적힌 그대로 읽겠습니다."
백은 항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표사 장평. 마지막 표행에서 왼쪽 짐수레를 몰았다. 미지급 삯 두 냥 여섯 전. 처는 성밖 버들골."
과부의 입이 반쯤 열렸다가 닫혔다.
"……왼쪽 짐수레."
"장부에는 수레의 자리까지 적습니다. 삯은 자리로 셈하니까요."
과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풀렸다.
"그이는 왼쪽 바퀴 소리만 듣고도 제 수레를 알았소. 왼쪽이 늘 그이 자리였지. ……그건 장부 아니면 모르는 일이오."
과부의 시선이 낱장의 그을음 위에 오래 머물렀다.
"불탄 종이구려. 그 밤에 다 탔다더니. ……장부가 살아 있었소."
"항목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남은 항목이 그럼 더 있단 말이오."
"있습니다. 차례대로 갚으러 다닐 겁니다."
과부가 관아 쪽 하늘을 한 번 보았다.
"관아의 방이 뭐라 적었는지 아시오. 여덟 자였소. 노정 매도, 녹림 소행. 사람이 여럿 죽었는데 여덟 자로 끝났소. 다섯 달 동안 그게 전부였소."
"여덟 자는 너무 짧습니다."
과부가 낱장과 백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삯이라는 걸 어찌 믿소. 판 놈의 돈에도 이름은 안 적혀 있을 텐데."
"돈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부를 읽었습니다. 왼쪽 짐수레는 돈이 지어낼 수 있는 세목이 아닙니다."
과부가 저울의 말을 그대로 입에 올렸다.
"핏값이면 안 받소. 삯이면 받겠소. 어느 쪽이오."
'내 죄값과 장평의 삯은 다르다.'
"판 돈이 아니라 떼인 삯입니다. 장부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침묵이 문지방의 길이만큼 지나갔다.
과부는 치마폭에 손을 한 번 닦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삯이면 받겠소. 그이 몫이니."
백은 전대를 풀어 두 냥 여섯 전을 하나씩 세어 올렸다.
동전이 손바닥 위에서 낮게 울렸다.
짤랑.
"두 냥 여섯 전입니다. 세어 보십시오."
"장부가 센 것을 내가 왜 또 세오."
과부의 손이 동전을 세지 않고 감쌌다.
다섯 달 만에 항목 하나가 닫히는 소리였다.
과부가 부엌으로 나가 숭늉 한 그릇을 들고 왔다.
이 빠진 그릇에 온기가 낮게 담겨 있었다.
"먼 길에 입이라도 데우고 가시오."
숭늉은 따뜻했다.
과부가 동전을 감쌌던 손으로 그릇 곁을 짚었다.
"그이는 삯 받는 날이면 꼭 국수를 사 들고 왔소. 애가 그 맛을 아직 기억하오. ……오늘은 다섯 달 만에 삯날이구려."
백은 그릇 위로 고개를 낮췄다.
같은 상 위로 저주가 함께 올라왔다.
"고맙소. 심부름꾼 양반한테 할 소리는 아니오만, 노정을 팔았다는 그놈은. 서문가 막내라는 그놈은 천벌을 받아야 하오. 우리 그이는 그 노정을 끝까지 몰다 갔소."
백은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온기와 저주가 한 손에 얹혔다.
변명은 어느 쪽에도 놓지 않았다.
"국이 따뜻합니다."
과부의 눈이 문득 백의 얼굴 위에 오래 머물렀다.
"낯이 설지 않은데. 뉘시오."
"심부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시오. 삯은 돌아왔다고, 장부는 살아 있다고, 그이 영전에는 고하리다."
백은 사립문을 나서며 한 번 목례했다.
등 뒤에서 사립문이 낮게 닫혔다.
등에는 숭늉의 온기가, 어깨에는 멜대의 눌린 자리가 남아 있었다.
돌아오는 성문 길에 그림자가 길어졌다.
품 안의 무게가 한 겹 얇아져 있었다.
전대는 비었다.
낱장은 그대로였다.
오늘 나간 값은 은자 두 냥 여섯 전과 순휴 하루와 낯이 설지 않다는 눈길 하나였다.
다섯 달 동안 유족에게 닿은 것은 관아의 여덟 자가 전부였다.
노정 매도, 녹림 소행.
그 여덟 자를 백은 관중석에서 들어 알고 있었다.
저주는 갈 곳이 없어 판 놈에게만 갔다.
명령한 손은 저주조차 받지 않았다.
갚는 셈이 맑아질수록 차변의 빈자리가 이름을 요구했다.
사실은 둘이었다.
반출 결재의 직인은 관주 직인이었다.
종결 결재의 직인도 관주 직인이었다.
결재의 자리 없이 반출은 없다.
두 인영이 한 절차 위에 겹쳤다.
여숭(呂嵩)이라는 이름이 물음표째로 차변에 올랐다.
백은 스스로 선을 그었다.
기울음이지 확정이 아니었다.
증명된 것은 매관 대부의 실재까지였다.
직인은 절차를 말할 뿐 손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표사의 장부 눈은 방향 없는 물음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캐되 단정하지 않는다.
다음 캘 것의 방향이 그리로 기울었다.
약당 앞을 지날 때 해는 아직 지붕 위에 있었다.
문틈으로 약재 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백은 문을 두드리는 대신 걸음 소리를 한 번 크게 냈다.
써는 소리가 반 박자 멎었다가 이어졌다.
돌아왔다는 기척은 그 소리로 족했다.
숙사의 밤, 백은 어둠 속에서 낱장을 다시 쌌다.
장평 항목의 낱장은 접힌 결 그대로였다.
훼손은 없었다.
그을음 냄새가 손에 남았다.
손끝의 재를 옷자락에 닦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오늘만은 재가 갚음의 자국이었다.
머릿속 장부에 오늘의 결산이 앉았다.
갚은 항목 하나.
나간 값 셋.
남은 목록과 물음표 하나.
목검은 이번에도 숙사 벽에 세워 둔 채였다.
오늘 쓴 것은 등과 입이었다.
물지게를 받아 진 등과 항목을 읽은 입.
서열비의 어떤 승급도 주지 못한 종류의 갚음이 거기 있었다.
숭늉의 온기가 혀끝에 오래 남았다.
저주도 같은 상에서 왔다.
온기는 낮았다.
낮은 온기가 오래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