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23년 사월 상순.
서열 재산정 방문(榜文)이 붙는 아침이었다.
서문백(西門柏)은 방문 앞 인파의 가장자리에 섰다.
개방비무(開放比武)의 남은 판들도 같은 받아넘기기 삼합으로 지나갔다.
진품각(珍品閣) 반입 배역의 새벽은 닷새로 끝나 있었다.
물 당번은 닭 울기 전마다 채워졌다.
왼 어깨의 누런 자국은 이제 만져도 결리지 않았다.
방문의 활자는 위에서 아래로 읽혔다.
서른아홉째 줄에 한백(韓柏) 두 자가 적혀 있었다.
앞줄의 생도가 활자를 짚으며 소리를 높였다.
"서른아홉째 줄을 봐라. 물지게 지던 신입이 마흔다섯 안까지 올라왔다."
곁의 동기가 받았다.
"잔여 판을 죄 받아넘기기로 이겼다지. 시원한 맛은 없어도 지는 법이 없더라."
뒷줄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마흔다섯 안이면 장서각(藏書閣) 열람 아니냐. 입관 한 계절짜리가 벌써."
앞줄의 생도가 받았다.
"재산정은 붓이 하는 게 아니라 판이 하는 게다. 다음 방문에서 내려앉는 이름도 수두룩해."
곁의 동기가 웃음을 흘렸다.
"오르는 줄만 셈하지 마라. 마흔다섯 안은 드는 값보다 지키는 값이 비싸다더라."
백은 셈을 낮게 눌렀다.
장서각은 마흔다섯째 줄 안의 이름에게만 열린다.
열흘 전에는 지붕의 윤곽이던 거리가 문 앞의 거리로 줄어 있었다.
품 안 가슴께의 낱장 꾸러미가 여느 날처럼 눌려 있었다.
갚을 항목의 좌표도 그대로였다.
표사 장평(張平)의 미지급 삯 두 냥 여섯 전.
먹이 마르기도 전에 관복 소매가 인파를 갈랐다.
내원(內院)의 서리였다.
손에 든 종이 한 장이 방문의 지질과 격부터 달랐다.
"외원(外院) 한백. 내원 지명 대련의 초청장이다. 받는 자리에서 읽고 응낙 여부를 정한다."
인파가 반 걸음 물러났다.
앞줄의 생도가 입을 벌렸다.
"내원 지명장이다. 실물은 처음 본다."
곁의 동기가 목을 뺐다.
"지명자가 진소하 사형이라는군. 저 신입, 다음 방문이 볼만하겠어."
뒷줄의 생도가 아는 체로 받았다.
"지명 대련이 몇 해 만이냐. 재작년 가을에 하나 있고 처음이지."
곁의 동기가 손가락을 꼽았다.
"그때 지명받은 승급자는 다음 방문에서 열두 계단이 내려앉았다더라. 내원의 저울은 후하지 않아."
백은 두 손으로 받았다.
종이의 결이 곱고 인장이 깊었다.
지명자 진소하(陳素河).
판은 이튿날 아침, 내원 연무장.
끝줄에 기재 조항이 붙어 있었다.
"지명 대련이 무엇인지부터 여쭙겠습니다."
서리가 관 사무의 어조로 답했다.
"개방비무 뒤 열흘 안에는 내원이 외원 승급자를 지명해 검증 대련을 청할 수 있다. 관례다. 오른 서열이 진짜인지 내원의 눈으로 저울에 다는 게다."
"판정도 기재됩니까."
"기재된다. 결과는 다음 재산정에 그대로 반영된다. 응낙이면 응낙 명부에 올리고 거절이면 기권으로 적는다."
백은 조항의 끝줄을 다시 눈으로 짚었다.
"기권도 기재입니까."
"기권은 기권대로 적힌다. 지명을 받고 물러난 이름은 내원이 오래 기억하지."
서리의 어조는 문서를 읽듯 평평했다.
백은 물음의 순서를 골랐다.
"지명을 물리는 법은 없습니까."
"지명은 내원의 권한이다. 물리는 법은 없다. 응낙과 기권이 있을 뿐이지."
물릴 수 없는 종이라는 뜻이었다.
"내원의 판에 외원 생도가 지킬 예는 무엇입니까."
"예법은 지명자가 판에서 놓는다. 듣고 따르면 된다."
백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몇 시에 들면 됩니까."
"진시 초입이다. 초청장을 지니고 와라. 내원 문지기가 볼 게다."
곁에서 듣던 생도들의 수군거림이 낮게 번졌다.
앞줄의 생도가 목소리를 낮췄다.
"서열 3위의 지명이다. 오른 계단이 마르기도 전에 저울에 오르게 생겼구먼."
곁의 동기가 받았다.
"받아도 값이고 물러도 값인 종이지. 나 같으면 병을 칭하겠다."
백의 셈은 길지 않았다.
거절은 숨는 자의 걸음으로 적힌다.
수락은 방금 오른 계단을 판 위에 올린다.
그리고 지명 대련만이 내원의 검을 정면에서 볼 자리였다.
형의 등에 남은 두 줄과 대조할 단 한 번의 기회였다.
"응낙으로 올려 주십시오. 기재 조항까지 읽었습니다."
"응낙 명부에 올린다. 이튿날 아침, 내원 연무장이다. 병장기는 목검, 관 지급이 원칙이다. 제 것을 쓰겠다면 물목대로 검사를 받아라."
서리가 명부에 붓을 눌렀다.
"제 목검으로 하겠습니다. 검사받겠습니다."
"늦으면 기권으로 적는다."
"늦지 않습니다."
서른아홉째 줄의 먹이 마르기도 전이었다.
오른 계단은 쓰기 전에는 숫자일 뿐이다.
백은 초청장을 접어 품에 넣었다.
알고 무는 청구서였다.
저녁 숙사의 침상 줄에는 소문이 먼저 와 있었다.
셋째 줄의 고참이 물었다.
"내원 지명장이 왔다는 게 참말이냐."
"참말입니다."
고참이 침상에 팔을 괴고 웃었다.
"물지게 신입이 내원 담을 넘게 생겼구나. 지고 와도 흉은 없다. 담 안 구경이나 옮겨 오너라."
"다녀오겠습니다."
고참의 웃음이 짧게 이어졌다.
"상대가 서열 3위라지. 세 합이나 버티겠느냐."
"세 합이면 족합니다."
백은 목검을 물목에 올려 저녁 안에 검사를 마쳤다.
남은 밤은 짧게 잤다.
낯선 마당에 들기 전 표사가 하던 순서대로, 시선이 모일 자리와 빠질 길부터 머릿속에 그려 두었다.
이튿날 아침의 내원 연무장은 결부터 달랐다.
바닥의 다짐이 단단했다.
백토의 금은 가늘고 곧았다.
구경의 자리가 없는 대신 낮은 단 하나가 있었다.
참관 서리가 단 위에 기재 붓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진소하는 금 안에 먼저 서 있었다.
목검을 쥔 손이 검파를 두 번 고쳐 쥐었다.
시선은 이번에도 발끝부터 올라왔다.
얼굴은 마지막이었다.
"오셨군요, 한백 씨. 지명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불러 주셔서 왔습니다, 진 사형. 가르침을 청합니다."
진소하가 목검을 세워 예를 표했다.
"예법을 먼저 놓지요. 초식은 이름을 밝히고 씁니다. 넘어지거나 금 밖으로 나면 그칩니다. 판정은 저 붓이 기재합니다."
"새겨듣겠습니다."
참관 서리가 명부를 펴고 규정을 읽었다.
"내원 지명 대련. 지명자 진소하, 응낙자 한백. 목검 외 병장기 금지. 합의 수는 정하지 않는다. 판이 닫힐 때까지다. 판정은 공개 기재하며 불복은 없다."
진소하가 백의 목검 쪽으로 눈을 주었다.
"목검은 검사받으셨습니까."
"어제 저녁 물목에 올려 검사받았습니다."
진소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한 가지 더 놓지요. 오늘 판은 검증입니다. 사양은 예가 아니라 결례입니다. 온 검으로 받으십시오."
"받아넘기는 것이 제 검의 전부입니다."
진소하의 시선이 백의 목검에 잠시 머물렀다.
"하나만 여쭙지요. 지난 판에서 합을 셋으로 끊으셨습니다. 오늘도 그 검입니까."
"제게는 이 검뿐입니다."
"그럼 그 검이 어디까지 받아넘기는지 보겠습니다. 오늘 판이 그 저울입니다."
백의 설계는 전날 밤에 서 있었다.
제 결은 한 치도 내지 않는다.
상대의 검결을 그대로 비추어 흘린다.
지지도 이기지도 않은 채 삼합 안에 판을 닫는다.
거울은 은폐이자 유일한 관찰 도구였다.
참관 서리가 구령을 놓았다.
"예를 갖춰라. 시작."
진소하가 초식명을 놓았다.
"기수식입니다."
첫 합.
감아 드는 검로가 어깨선을 향해 흘러 들어왔다.
백은 같은 결로 받았다.
감기는 각도를 그대로 비추어 바깥으로 흘렸다.
목검 두 자루가 마른 소리를 내고 갈라졌다.
진소하의 말이 대련의 호흡만큼 짧아져 있었다.
"발이 반 보 빠르시군요. 배운 보법입니까."
"짐을 지고 걷던 발입니다."
진소하의 시선이 발끝에서 손으로 올라왔다.
"한 번 본 검을 그대로 비추시는군요. 눈이 검보다 빠른 편이시고요."
"몸이 따라간 것뿐입니다."
"그럼 비출 수 없는 것을 드리지요."
진소하가 검파를 고쳐 쥐었다.
어깨가 반 치 낮아졌다.
"청람검결(靑嵐劍訣) 삼형, 쌍절(雙截)입니다. 외원에서는 못 보셨을 초식입니다. 쌍절은 내원 담 안에서만 전합니다."
백은 반 박자의 침묵을 관리하며 확인만 얹었다.
"쌍절이라 하셨습니까."
"쌍절. 한 호흡에 얕고 깊게, 두 번 끊는다는 뜻입니다. 담 밖에서는 이름도 처음이실 겁니다. 이름을 밝혔으니 예는 지켰습니다. 받으세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둘째 합.
두 박자였다.
얕게 긋는 앞 박자가 소매를 스치고 지나갔다.
같은 선을 깊게 파고드는 뒷 박자가 반 호흡 늦게 떨어졌다.
백은 비추기를 버렸다.
반 보 물러서서 몸으로 쟀다.
간격이 눈에 새겨졌다.
얕게 한 번, 깊게 한 번.
눈 위에 엎드린 형 서문송(西門松)의 등이 눈앞에 겹쳤다.
형의 등에 남아 있던 두 줄이 그 간격 그대로 포개졌다.
상흔에 이름이 붙었다.
쌍절이었다.
이름이 그 밤을 끌고 왔다.
호표검(護鏢劍)의 응수가 맹세보다 먼저 깨어났다.
손목이 반 박자 일찍 밖으로 나가려 했다.
백은 목검의 나무 결을 쥐어 눌렀다.
반쯤 나간 손목이 반쯤에서 멎었다.
손등에 힘줄이 섰다가 가라앉았다.
맹세의 감촉이 마지막 근거였다.
진소하의 시선이 손목에 멎어 있었다.
발끝부터 읽는 눈이 반 박자를 물고 놓지 않았다.
"한 합 더 받으세요. 같은 선입니다."
같은 선으로 다시 들어오는 궤적이 보였다.
확인하러 오는 검이었다.
되치기의 길이 먼저 보였다.
호표검이라면 셋째 합 안에 판을 뒤집을 수 있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마지막 유혹으로 왔다.
'이기면 들킨다.'
되치기는 검 버릇의 완성이었다.
이기는 순간 서문표국(西門鏢局)의 결이 내원의 눈앞에 새겨진다.
맹세의 상한도 세 합이었다.
지는 것만이 버릇을 묻고 판을 닫는다.
셋째 합.
앞 박자를 목검 면으로 흘렸다.
뒷 박자는 피하지 않았다.
어깨로 받았다.
퍽!
얕음 뒤의 깊음이 뼈까지 울렸다.
형이 받은 것의 아주 작은 견본이었다.
백은 밀리는 무게를 따라 두 걸음 물러났다.
발끝이 백토의 금을 밟고 넘었다.
참관 서리가 붓을 들었다.
"서편 한백, 패. 판정은 기재한다. 결과는 다음 재산정에 반영한다."
붓이 명부 위를 지나갔다.
서리가 기재를 소리 내어 닫았다.
"내원 지명 대련, 지명자 승. 삼합, 판정 종료. 판은 여기서 닫는다. 양편, 이의 없는가."
진소하가 먼저 답했다.
"없습니다."
"이의 없습니다."
관의 어휘는 건조했다.
각혈은 없었다.
손 떨림도 없었다.
합수는 셋에서 닫혀 있었다.
남은 것은 어깨에 앉는 묵직한 멍 하나였다.
백은 숨을 넷 들이쉬고 둘 내쉬었다.
은폐는 완주되었다.
눈 하나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목검을 거두는 백의 곁으로 진소하가 한 걸음 거리까지 왔다.
대련 전의 온도가 돌아와 있었다.
"마지막 합, 물러나기 전에 손목이 먼저 나갔습니다. 그건 비추는 검이 아니었습니다."
관찰의 진술이었다.
물음표가 없는 만큼 피할 자리도 없었다.
백은 반 박자를 눌러 답했다.
"손목이 늦은 것뿐입니다. 쌍절이 빨랐습니다."
"늦은 손목은 안으로 굽습니다. 한백 씨의 손목은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어깨가 밀린 값입니다. 판정이 결과를 새겼습니다."
진소하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셋째 합도 그렇습니다. 어깨로 받으셨지요. 받을 필요가 없는 박자였습니다."
"받고서야 아는 박자도 있습니다."
시선이 손목에 오래 머물렀다.
단정의 말은 오지 않았다.
물음이 방향을 바꿨다.
"사문이 어디십니까."
정면의 물음이었다.
새 거짓은 뒤가 밟힌다.
침묵은 자백처럼 선다.
백은 관에 이미 적힌 한 줄만을 내밀었다.
"떠돌이 검객 밑에서 삼 년 배웠습니다. 함자는 모릅니다."
"접수 기재와 같은 대답이군요."
"관에 적힌 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시선이 이번에는 눈을 향했다.
피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어였다.
"한 번 본 초식을 그대로 비추는 눈은 사흘 배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떠돌이 검객이 그 눈까지 가르쳤습니까."
"눈은 가르침이 아니라 버릇입니다. 짐꾼은 앞사람의 발끝을 보고 걷습니다. 눈썰미는 거기서 왔습니다."
진소하가 반 박자 침묵했다.
저울이 움직이는 침묵이었다.
"판정은 결과만 새깁니다. 오늘은 그 여덟 자가 다 담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판정대로 기억해 주시면 됩니다."
"저울에 달아 두겠습니다. 오늘의 대답도, 오늘의 검도. 다음 판에서 다시 달겠습니다."
대답은 저울에 달렸다.
진소하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몸을 돌리기 전에 한 문장이 남았다.
"다음 비무도 보겠습니다."
지난번에는 예고로 들렸다.
이번에는 약정으로 들렸다.
"살펴 가십시오, 진 사형."
이튿날 아침, 재산정 방문이 다시 붙었다.
마흔일곱째 줄이었다.
한백 두 자가 여덟 줄 아래로 내려가 적혔다.
마흔다섯째 줄 안이 열어 주던 장서각의 문이 도로 닫혔다.
지붕의 윤곽이 다시 멀어 보였다.
방문 곁의 수군거림은 짧았다.
한 생도가 활자를 짚었다.
"지명 대련에서 졌다지. 거기까지였던 게지."
곁의 동기가 받았다.
"내원 서열 3위 앞이면 진 것이 흉도 아니다. 그래도 여덟 계단이면 뼈아프겠구먼."
뒷줄에서 누군가 심드렁하게 얹었다.
"기권으로 적히는 것보다야 낫지. 지명을 받고 물러서지 않은 이름은 명부에 남는다더라."
백은 활자 앞에 오래 서지 않았다.
숙사의 밤, 백은 어둠 속에서 품 안 꾸러미를 손끝으로 확인했다.
그을음 냄새가 손에 남았다.
낱장의 재가 손끝에 묻었다.
보름의 약조는 아직 기한 전이었다.
다음 약당 걸음은 사월 중순 초입의 몫이었다.
셈을 닫을 시간이었다.
잃은 것은 여덟 계단과 문 하나.
얹힌 것은 어깨의 멍과 벼려진 의심.
얻은 것은 상흔의 이름 하나와 좁혀진 좌표 하나였다.
형을 벤 검은 쌍절이다.
쌍절은 내원 담 안에서만 전해진다.
도둑맞은 검이 아니라면 그 밤의 칼은 담 안에서 나왔다.
향할 곳 없던 분노가 담 안쪽의 좌표를 쥐었다.
서열은 다시 오를 수 있다.
이름은 오늘만 얻을 수 있었다.
후회는 장부에 적히지 않는 항목이었다.
서른아홉과 마흔일곱 사이의 여덟 줄은 은폐의 삯으로 적혔다.
반 박자의 값이 여덟 계단이라면 온 박자의 값은 이름 전부였을 것이다.
싸게 산 셈이었다.
닫힌 문 안에는 기록이 있다.
시험의 명부와 대여의 장부.
마흔다섯째 줄 안으로 돌아가는 절차를 백은 어둠 속에서 셈하기 시작했다.
입안이 오래 썼다.
뱉을 자리가 없는 쓴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