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23년 오월 하순.
축제의 밤이었다.
골목의 소동에서 열흘 남짓이 지나 있었다.
오른손 손끝의 저림은 이튿날 낮게 가라앉았다.
물 당번은 닭 울기 전마다 채워졌다.
약당(藥堂) 문 앞은 이 열흘 조용했다.
잔불이 꺼진 조용함인지 숨을 고르는 조용함인지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축제 앞 사흘에는 개방비무(開放比武)의 예선이 치러졌다.
서문백(西門柏)의 판들은 받아넘기기 삼합으로 지나갔다.
어느 판도 넷째 합을 부르지 않았다.
서열비(序列碑)의 숫자는 쉰여덟째 줄 그대로였다.
저녁이 되자 등불이 먼저 왔다.
관 앞 저자의 처마마다 등이 걸렸다.
담과 골목을 지키던 눈들이 불빛 쪽으로 걸어 나갔다.
표사의 눈에는 비어 가는 담부터 보였다.
등불은 하룻밤짜리 창이었다.
결승 대진의 방문(榜文)은 서열비 곁에 붙어 있었다.
두 이름이 나란히 먹으로 앉아 있었다.
내원(內院) 서열 3위 진소하(陳素河).
외원 한백(韓柏).
방문 아래에는 서열 관원이 서서 생도들의 물음을 받고 있었다.
"예선 명부는 어제로 닫았다. 결승은 열흘 뒤, 서열전 대무대다. 병장기는 목검, 판정은 공개다."
앞줄의 생도가 방문의 아래쪽 이름을 가리켰다.
"쉰여덟째 줄이 결승에 서는데 비석은 그대로입니까."
"예선은 자격의 판이지 재산정의 판이 아니다. 지명이 승급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야."
뒤쪽에서 다른 물음이 겹쳐 들어왔다.
"후보 자격을 묻던 말은 어찌 됩니까."
"예선 명부에 이름이 올랐으면 그 말은 거기서 닫힌다. 재산정은 결승의 판정과 함께 붙는다는 관례다. 오늘 비석의 줄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한다."
백은 인파의 가장자리에서 한 걸음 들어섰다.
판의 문면부터 알아 두는 것이 표사의 버릇이었다.
"여쭙겠습니다. 결승의 판정은 몇 판으로 갈립니까."
"세 판이 아니라 한 판이다. 서열전 결승은 한 판으로 끝난다. 관원 셋이 보고 판정은 그 자리에서 붙는다."
관원이 방문의 끝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병장기 검사는 언제입니까."
"판 전날 물목에 적고 받는다. 제 것을 쓸 참이면 그날 가져오게. 판은 진시(辰時) 초입에 연다. 늦으면 기권으로 적는다."
"외원도 참관합니까."
"관 안팎에 다 연다. 서열비 앞이 아니라 대무대다. 만인이 본다는 말이 그 말이야."
"예. 그리하겠습니다."
물음이 닫히자 생도들의 말소리가 낮아졌다.
"예선을 전부 삼합으로 지나갔다더라. 넷째 합은 한 번도 안 갔다는군."
곁의 동기가 받았다.
"줄은 그대로라던데. 재산정은 결승 뒤라지. 별난 신입은 오르는 길도 별나구먼."
뒷줄에서 낮은 소리가 하나 더 얹혔다.
"내원 3위 상대로 몇 합이나 버티려나. 축제 구경보다 그 판 구경이겠어."
같은 자리에서 웃음 섞인 소리가 이어졌다.
"오늘은 등불이나 보세. 그 판은 열흘이나 남았는데."
방문 앞에 진소하가 서 있었다.
시선이 발끝이 아니라 눈에서 왔다.
"한백 씨. 예선의 판 넷을 다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합은 셋이더군요."
"예. 셋이면 닫히는 판들이었습니다."
"닫히는 판과 닫는 판은 다릅니다. 제가 본 것은 닫는 손이었습니다."
백은 부정도 설명도 얹지 않았다.
"판이 순했습니다."
"순한 판 넷을 모두 셋에 접는 손은 순하지 않지요. 우연이 넷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관찰까지만 올리겠습니다. 해석은 결승의 판에 두겠습니다."
진소하의 시선이 방문의 두 이름에 잠시 닿았다가 돌아왔다.
"대진의 먹은 말랐습니다. 미뤄 온 약정이 판이 되었습니다."
"예. 방문으로 보았습니다."
"열흘 뒤입니다. 목검이고, 판정은 만인의 눈앞에서 붙습니다. 그 판은 셋으로 닫히지 않을 겁니다."
백의 대답이 반 박자 늦게 왔다.
"판이 정하는 대로 서겠습니다."
"저는 청람검결(靑嵐劍訣)로 섭니다. 아껴 두는 초식은 없습니다. 그 판에서는 서로 그래야 정당합니다."
"새기겠습니다."
진소하의 어미가 조금 짧아졌다.
"쉰여덟째 줄과 셋째 줄이 마주 서는 판이라고들 하더군요. 사람들은 줄을 보고 웃을 겁니다. 저는 줄을 보지 않습니다."
"…예."
등불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렸다.
"저는 서열을 제 손으로 내려놓는 손을 두 번 보았습니다. 그 손이 되사 온 자격으로 제 앞에 섭니다. 그 값이 무엇이었는지는 오늘 묻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축제입니다, 진 사형."
진소하의 말이 처음으로 느려졌다.
"사부님 밑에 든 이름과 사부님의 제자가 마주 서는 판입니다. 관에서는 그 판을 두고 말이 많더군요. 저는 말을 보지 않고 판만 보겠습니다."
"저도 판만 보겠습니다."
"궁금한 것은 전부 결승의 판에서 묻겠습니다. 검으로 묻고 검으로 듣는 판입니다. 그날 대답이 얇으면 그 얇음까지 판정으로 받겠습니다."
"결승에서 뵙겠습니다, 진 사형."
진소하의 눈이 반 호흡 머물렀다.
캐묻는 눈이 아니었다.
재는 눈이었다.
"축제의 밤에 사람을 붙드는 것은 명예가 아니지요. 등불 구경 잘 하십시오. 판에서 뵙겠습니다."
진소하가 예를 남기고 인파 쪽으로 돌아섰다.
백은 등불의 거리에 낯을 한동안 세워 두었다.
결승 대진에 오른 이름은 어디에 서 있어도 눈에 띄었다.
오늘 밤에는 눈에 띄는 낯이 오히려 방패였다.
인파가 가장 두터워진 시각, 백은 등불을 등지고 관 뒷길로 꺾었다.
열흘을 쉰 캐는 걸음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부관주 담기원(譚沂源)은 오늘 밤 관의 연회를 주재한다.
사저(私邸)가 비는 밤은 오늘뿐이었다.
집무 서재의 서가에서 본 것은 전부 공적 기록의 등이었다.
매관의 사삿셈이 적힐 방은 관의 눈 밖에 있어야 했다.
캘 창의 좌표는 열흘 사이에 한 번 굴절되어 있었다.
사저는 관 뒷길 너머에 제 담장을 따로 두른 별저였다.
연회의 소리는 먼 등불 쪽에 있었다.
마당 건너 서재의 창은 불이 꺼져 있었다.
담 위에 손이 걸렸다.
넘으면 제도 밖이었다.
백은 반 호흡을 세고 담을 넘었다.
숨은 반으로 줄었다.
잦아들지 않는 맥의 기척을 호흡으로 눌렀다.
은신은 보법이 아니라 셈이었다.
소리가 나는 자리와 나지 않는 자리를 가르는 셈.
마당에는 디딤돌 셋과 향나무 하나가 있었다.
백은 그늘의 선만 밟아 서재의 창 아래에 닿았다.
창은 안에서 걸려 있지 않았다.
서재의 어둠은 종이 냄새부터 왔다.
달빛이 문갑의 윤곽을 세웠다.
백은 등불 없이 손끝으로 읽는 법을 알았다.
불탄 문서를 다섯 달 읽어 온 손끝이었다.
문갑의 첫 칸에서 종이 뭉치가 나왔다.
달빛에 큰 글자만 떠올랐다.
정정(訂正) 방의 초안들이었다.
몇 해 치의 문면이 겹으로 쌓여 있었다.
장서각(藏書閣) 보관철에서 외워 둔 정정 방의 글줄이 초안의 획으로 먼저 앉아 있었다.
같은 손의 손질이 쌓인 획의 결이었다.
직인은 절차를 말할 뿐 손을 말하지 않는다.
다섯 회차를 버텨 온 선이었다.
초안 뭉치가 버텨 온 선을 실물로 뒤집었다.
관주 직인으로 나간 통상 결재의 붓이 이 문갑의 주인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여숭(呂嵩)이라는 물음표가 소리 없이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저울 하나가 자리를 바꿨다.
내려간 자리에 오른 것은 결론이 아니었다.
붓의 죄까지였다.
붓의 죄와 칼의 죄 사이에 다리는 없었다.
물음표는 이름만 바꿔 달았다.
깊은 칸은 문갑의 바닥에 있었다.
얇은 장부 한 권이 나왔다.
상환의 세로줄이 앉은 장부의 결이었다.
종이를 넘기던 손끝에 물무늬가 걸렸다.
낯익은 결이었다.
어디서 만진 결인지, 이름은 어둠 속에서 잡히지 않았다.
다만 손끝이 놓지 않았다.
등불을 켤 수는 없었다.
기일도 액수도 어둠이 삼켰다.
눈에 새겨 나갈 수 있는 문면과 가져가야만 말하는 물성은 다른 항목이었다.
물무늬는 베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은 초안 뭉치를 결 그대로 첫 칸에 되돌렸다.
종이들의 놓인 순서가 들어올 때의 결로 돌아갔다.
장부 한 권만 품 안으로 들어갔다.
낱장 묶음 곁이었다.
마당을 되건너기 전에 등불이 먼저 왔다.
빛 하나가 마당의 어둠을 갈랐다.
발소리가 서재 쪽으로 왔다.
연회가 끝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백은 서가의 그늘로 물러나 숨을 정지시켰다.
문이 열렸다.
등불이 문갑 위에 놓였다.
서두르지 않는 디딤.
접수의 새벽에 들었던 박자였다.
부관주의 걸음이었다.
종이를 쓸어 보는 손끝의 버릇이 등불 아래에서 반복되었다.
문갑 위의 종이들을 손끝이 천천히 지나갔다.
첫 칸의 초안 뭉치 위를 지나 깊은 칸의 뚜껑 반 뼘 곁에서 손끝이 멎었다.
백의 숨이 같이 멎었다.
잦아들지 않는 맥이 귓속에서 북처럼 울렸다.
호의와 일상의 문형이 이토록 무거운 것이었다.
언성 없는 사람의 방에서는 어긋남 하나가 언성을 대신한다.
손끝이 떠났다.
등불이 문갑 위에 남은 채 발소리가 안채 쪽으로 건너갔다.
문 너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말소리가 울렸다.
짧은 틈이었다.
되돌려 놓는 안전한 수와 품은 채 나가는 도박이 반 호흡 안에서 저울에 올랐다.
이 창은 다시 오지 않는다.
매향(梅香)의 경고를 아는 몸이 도박 쪽을 물었다.
백은 창턱을 넘었다.
마당의 길목에 그림자 둘이 서 있었다.
호위들이었다.
디딤이 저자 삯꾼의 것과 달랐다.
담까지는 여남은 걸음.
소리를 지르게 두면 사저가 깬다.
잡히면 전부가 무너진다.
백은 구령부터 삼켰다.
골목의 밤에 반말 한 줄이 실려 나간 값을 배운 몸이었다.
오늘의 검에는 목소리가 없어야 했다.
"누구냐."
앞선 호위의 외침이 마당을 갈랐다.
대답 대신 몸이 먼저 들어갔다.
첫째 합, 들어오는 칼을 반 보 안에서 흘렸다.
흘린 힘 그대로 상대의 검을 칼집째 빼앗았다.
날은 뽑지 않았다.
호표검(護鏢劍)은 어둠 속에서도 지키는 검이어야 했다.
"담 쪽이다! 담을 막아라!"
둘째 합, 곁의 칼이 허리를 노렸다.
칼집의 몸통으로 받아 밖으로 밀었다.
셋째 합, 되돌아온 칼끝이 어깨선을 그었다.
반 보 물러서며 흘렸다.
세 합의 담장이 거기서 끝났다.
맥이 임계를 두드렸다.
급소를 겨누면 셋 안에 닫히는 길이 있었다.
사람이 상하는 길이었다.
'사람을 베고 나갈 수는 없다.'
호표검의 소임이 아니었다.
장부를 버리면 몸이 가벼워지는 길도 있었다.
역전이 무산되는 길이었다.
백은 알면서 넷째 합을 열었다.
목소리 없는 넷째 합이 앞선 호위의 병장기를 손에서 떨궜다.
다섯째 합이 남은 호위의 무릎 앞에서 길을 끊었다.
챙!
두 몸은 상하지 않은 채 마당에 주저앉았다.
빼앗은 검은 칼집째 디딤돌 곁에 내려놓았다.
날은 끝내 칼집을 나오지 않았다.
합은 다섯에서 닫혔다.
백은 담을 넘었다.
등 뒤의 마당에 남긴 것은 침입자의 그림자 하나와 검로의 잔상뿐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이름도 넘어가지 않았다.
어둠의 골목에서 삼켰던 것이 올라왔다.
쇠맛이 먼저였다.
소매로 막은 입 안쪽이 뜨거웠다.
각혈이었다.
학살의 밤 이후 처음으로 몸의 장부가 당일로 값을 걷었다.
오른손 손끝에서 떨림이 시작되었다.
저림이 아니었다.
백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 밤의 걸음이 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약당 뒷문의 돌쩌귀가 삐걱 울었다.
기름을 먹이지 않은 소리가 문보다 먼저 안에 닿았다.
매향이 등잔을 들고 나왔다.
소매의 핏자국에 눈이 먼저 닿았다.
핀잔이 나오지 않았다.
잔소리의 자리에서 손이 먼저 움직였다.
팔을 끌어 앉히고 등잔을 돌렸다.
백은 물음이 오기 전에 손목을 내밀었다.
숫자부터 놓았다.
"다섯이었습니다. 각혈이 한 번 있었습니다. 오른손이 떨립니다."
"셋까지는 받아넘기기였습니다. 본식을 연 것은 넷째와 다섯째 합입니다."
"누워라. 말은 이따가다. 소매부터 걷어."
맥 위에 앉은 손끝이 오래 내려오지 않았다.
침이 놓였다.
데운 탕약이 먼저 넘어왔다.
치료가 말보다 먼저 왔다.
맥을 세 번 짚은 뒤에야 물음이 왔다.
"숨을 깊이 들이쉬어 봐라. 어디가 걸리느냐."
"오른쪽 아래가 결립니다. 끝까지 들이쉬면 기침이 답니다."
맥을 짚던 손이 손목 안쪽으로 옮겨 갔다.
"각혈은 언제 어디서였느냐."
"담을 나와 어두운 길에서 한 번입니다. 삼킨 것까지면 두 번입니다."
물음이 한 칸 더 들어왔다.
"어디서 썼느냐."
"말씀드릴 수 없는 자리입니다."
"거짓말은 아니구나. 짐을 제 몸에만 두는 버릇도 여전하고."
매향의 시선이 소매의 핏자국에 한 번 더 다녀왔다.
"네 낯을 본 사람은 있느냐."
"얼굴도 목소리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는 다행이다."
매향이 침통을 닫았다.
"삼합 안에서 끊을 수는 없었느냐."
"끊는 길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상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몸으로 값을 치렀다. 네 셈은 늘 그 모양이다."
혀 차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침묵이 어떤 핀잔보다 무거웠다.
"손을 펴서 그대로 들고 있어 봐라."
백이 오른손을 펴 들었다.
손끝이 등잔 불빛 안에서 잘게 흔들렸다.
매향이 그 손목을 두 손가락으로 눌렀다.
"저림은 손끝에서 멎던 것이다. 이건 손목까지 올라와 있어. 자리가 다르면 값도 다른 게다."
"몸의 셈부터 일러 주마. 남은 교환은 바닥이다. 오늘 같은 초과가 한 번 더 오면 사나흘 떨림으로 끝나지 않는다. 각혈로 열리고 눕는 데로 간다."
"바닥이라는 것은 어느 만큼입니까."
"크게 쓸 판이 한 번 남았다는 소리다. 그 한 번도 공짜가 아니고. 어디에 쓸지는 네가 정할 일이다만, 두 번은 없다."
등잔이 백의 얼굴 쪽으로 반 뼘 돌아왔다.
"문턱은 그대로 셋이야. 늘어난 것은 문턱이 아니라 값이다. 예전에는 넷째 합이 손끝을 저리게 했다면, 오늘은 넷째 합이 피를 올렸다. 다섯째 합은 그 값을 곱으로 얹고."
"쌓인 것을 덜어 내는 약은 세상에 없다. 나는 늦춰 주는 손이지 되돌리는 손이 아니야."
"압니다. 처음부터 그리 들었습니다."
백은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떨림은 며칠입니까."
"사나흘은 각오해라. 그동안 젓가락도 붓도 네 것이 아니야."
"결승까지는 열흘 남짓입니다."
"그 판 이야기는 셈이 끝난 뒤에 해라. 세 합의 맹세는 오늘 넷째 합에서 죽었다. 죽은 문서를 붙들고 울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다."
등잔의 심지가 한 번 튀었다.
매향의 말이 못을 박는 박자로 왔다.
"끊는다고 적어 둔 문면대로 오늘 끊었으면 너는 새벽까지 못 간다. 그러니 약은 안 끊는다. 대신 값을 다시 매긴다."
"말뚝은 셋이다. 하나, 결승의 판까지 본식은 봉인한다. 목검이고 멜대고 본식은 없다."
"둘, 보름이 아니라 사흘마다 와서 손목을 내민다. 하루라도 거르면 그날로 끊는다."
"셋, 결승의 판이 닫히면 이기든 지든 그 길로 이리 온다. 어기면 이번에는 정말로 끊는다."
말뚝 셋이 다 박힐 때까지 백은 끼어들지 않았다.
"받아 적었습니다. 봉인, 사흘, 결승 뒤. 셋 다 지키겠습니다."
"지키겠다는 말은 넷째 합 전의 몸이 하던 말이다. 지금 네 몸은 지켜야 사는 몸이야."
"열흘이면 손은 가라앉는다. 몸은 안 가라앉아. 가라앉은 손으로 바닥난 몸을 끌고 그 판에 서는 게다."
"결승의 판에서 셋을 넘기면 어찌 됩니까."
한참 만에 대답이 왔다.
"그 판이 네 마지막 판이 된다. 이긴 쪽이든 진 쪽이든. 그 뒤로는 검을 쥐는 손이 아니라 남의 손에 잡히는 손으로 산다."
"예. 새기겠습니다."
"피가 다시 올라오면 그날로 와라. 한밤중이라도 문을 두드려. 참았다가 아침에 오는 놈이 제일 늦게 온다."
"예. 두드리겠습니다."
약봉지를 접는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 당번은 어쩔 참이냐. 그 손으로 두레박을 잡겠느냐."
"왼손으로 잡겠습니다. 닭 울기 전이면 보는 눈도 없습니다."
"붓은 쥐지 마라. 쥐면 또 무얼 적을 게 아니냐."
"열흘 동안 무엇을 더 조심해야 합니까."
"찬물, 밤길, 그리고 네 성질이다. 무거운 것은 오른손으로 들지 마라."
백은 셈 하나를 어둠에 놓았다.
갚을 몸이 무너지면 장부째 무너진다.
변제(辨濟)의 유일한 도구는 처음부터 몸 하나였다.
시렁에서 새로 달인 약 꾸러미가 내려왔다.
"사흘 치다. 아침저녁으로 달여라. 식기 전에 이것부터 마저 마시고."
"성밖 걸음이 하나 밀려 있습니다. 서시(西市) 어귀입니다."
"여덟 전입니다. 표국 곁마잡이 노(盧) 노인의 몫입니다."
백이 꾸러미를 받아 품에 넣었다.
"이 손으로는 못 간다. 갚는 걸음도 몸이 밑천이야. 손이 가라앉거든 가라."
"그 여덟 전이 사흘 늦는다고 죽는 사람은 없다. 네가 먼저 죽는다."
"예. 미루겠습니다. 사흘 뒤에 오겠습니다."
매향이 손을 저었다.
"침값과 약값은 제 장부에 얹어 주십시오. 갚는 순서는 지키겠습니다."
"얹어 봐야 못 받는 장부다. 네 장부는 네가 지켜라. 나는 네 몸만 받는다. 그게 내 이자다."
"오는 길은 뒷문이다. 돌쩌귀 소리가 내 귀다."
인사는 어느 쪽에도 없었다.
꾸러미의 무게가 말을 대신했다.
이튿날 새벽, 말석 숙사.
등잔 없는 어둠 속에서 백은 오늘의 셈을 닫았다.
오른손은 붓을 쥘 손이 아니었다.
장부는 머릿속에서만 펼쳐졌다.
내려간 물음표 하나.
여숭이라는 이름이 여섯 회차 만에 저울에서 내려왔다.
올라온 물음표 하나.
후원자의 이름이 물음표째로 빈자리에 앉았다.
품 안의 장부 한 권.
기일도 액수도 아직 어둠의 것이었다.
말석 숙사에는 등잔이 배급되지 않는다.
물무늬의 이름은 등불 아래의 몫으로 남았다.
몸의 줄도 나란히 적혔다.
각혈 한 번.
떨리는 오른손.
바닥이라는 진단.
새 말뚝 셋.
노 노인의 여덟 전은 서시 어귀에 그대로 있었다.
갚는 걸음이 몸 때문에 미뤄진 것은 다섯 달 만에 처음이었다.
사저의 밤은 아직 어긋남을 모른다.
문갑의 깊은 칸이 언제 열릴지는 백의 셈 밖이었다.
종이를 쓸어 보는 손끝이 빈자리를 짚는 순간부터 남은 날들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축제의 등불은 새벽 바람에 하나씩 꺼져 갔다.
결승의 판이 다음 창으로 걸려 있었다.
봉인된 본식과 바닥난 잔고로 서야 하는 판이었다.
품 안의 무게는 둘이 되어 있었다.
낱장 묶음 하나.
장부 한 권.
새 조각을 누르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전리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