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23년 사월 중순.
재산정 방문(榜文)이 다시 붙는 아침이었다.
서문백(西門柏)은 인파의 가장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섰다.
사월 중순 초입의 약당(藥堂) 걸음은 내민 손목에 별말 없이 지나갔다.
물 당번은 여전히 닭 울기 전마다 채워졌다.
대련에서 받은 어깨의 멍은 누렇게 가라앉는 중이었다.
방문의 위쪽이 소란했다.
맨 위 어림의 세 이름 곁에 내원(內院) 진발이라는 작은 주가 달려 있었다.
세 이름이 외원(外院) 명부에서 빠지고 아래 활자들이 그만큼 당겨 적혀 있었다.
마흔넷째 줄에 한백(韓柏) 두 자가 있었다.
앞줄의 생도가 활자를 짚으며 소리를 높였다.
"위 세 줄이 한꺼번에 빠졌다. 개방비무(開放比武) 성적으로 내원 진발이 났다는군."
곁의 동기가 받았다.
"진발은 승급이 아니라 이관이다. 명부에서 이름이 빠지면 아래가 그만큼 당겨 새겨지는 게지."
뒷줄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칼 한 번 안 섞고 오른 세 줄이라. 그 덕에 마흔넷까지 올라온 이름도 있구먼. 마흔다섯 안이면 장서각(藏書閣) 열람 아니냐."
곁의 동기가 웃음기 없이 받았다.
"제 판으로 오른 서열이 아니니 다음 판이 무겁겠지. 붓이 올린 줄은 붓이 도로 내리는 법이다."
앞줄의 생도가 손가락을 꼽았다.
"당겨 새김이 처음도 아니라더군. 재작년 가을에도 두 줄이 한 번에 올랐다지."
곁의 동기가 받았다.
"남의 붓에 오른 줄이 제일 무섭다더라. 제 판 없이 오른 자리에는 지킬 판부터 온다는 게야."
뒷줄에서 누군가 심드렁하게 얹었다.
"마흔다섯 안이 열람이면 뭘 하나. 낮에는 일과가 잡아먹는데."
곁의 동기가 받았다.
"그러니 밤을 사는 게지. 신청 기재에 서고 일손을 얹는 관례가 왜 있겠나."
백은 마흔넷째 줄 앞에 오래 서지 않았다.
셈은 짧고 이물감은 길었다.
하락은 제 손으로 샀는데 상승은 남의 붓에서 왔다.
서열을 움직이는 것이 판만이 아니라는 실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열흘 전에 제 손으로 닫은 문이 도로 좌표 안에 들어와 있었다.
문 안에는 시험의 명부와 대여의 장부가 있다.
붓이 문을 열었다면 문 안에서 찾을 것도 붓의 흔적이었다.
백은 그날로 장서각의 돌계단을 올랐다.
문간의 접수상에 늙은 서고지기가 앉아 있었다.
먹 얼룩이 든 손끝이 명부의 귀를 넘기고 있었다.
백은 종이와 손을 먼저 보는 순서대로 보았다.
"외원 마흔넷째 줄 한백입니다. 열람을 신청하러 왔습니다."
서고지기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답했다.
"마흔넷이라. 오늘 방문인가."
"오늘 아침에 적혔습니다."
"기준선은 마흔다섯 안이다. 줄이 도로 내려가면 열람도 그날로 끝난다. 알고 왔나."
"알고 왔습니다. 주간 열람의 시각부터 여쭙겠습니다."
서고지기의 붓이 명부 위에서 멎었다.
"주간은 진시부터 신시까지, 자리는 열람상까지다. 일과 중인 생도가 쓸 수 있는 시각이 아니지."
"일과와 겹칩니다. 야간 열람의 관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야간은 공으로 여는 자리가 아니다. 신청 기재에 서고 일손을 얹는 게 통례다. 마침 등사할 판례가 밀려 있지."
값을 먼저 묻는 자리가 아니라 값을 먼저 내놓는 자리였다.
"필사 일손으로 서겠습니다."
서고지기의 눈이 처음으로 올라왔다.
얼굴이 아니라 손을 보는 눈이었다.
"창고 당번에 반입 배역까지 자원해 온 신입이라지. 궂은 몫을 골라 지는 별난 셈이 여기까지 왔구먼."
"빚은 갚는 쪽이 셈이 맞았습니다."
"셈이 맞는 생도가 서고에는 드물지."
서고지기의 시선이 명부로 돌아갔다.
"열람은 무엇을 보려고."
"지난 판례와 방문을 읽으려 합니다. 오른 줄의 값을 하려면 관규부터 알아야 합니다."
서고지기가 명부를 폈다.
붓이 관 사무의 속도로 움직였다.
"야간 열람, 외원 한백. 필사 일손 배정. 등잔은 열람상까지, 폐관 시각은 어김이 없다. 열람 물목은 열람상에 오르는 판례와 방문 보관철까지 — 관 기록은 물목 밖이다."
"방문 보관철도 물목 안입니까."
"지난 방은 판례와 한 묶음이다. 물목 안이지. 시험 명부의 원부와 대여의 장부는 깊은 칸이다 — 서열이 아니라 소임이 여는 칸이야."
깊은 칸이라는 말이 어둠의 좌표 하나로 남았다.
"물목의 경계까지 새겨듣겠습니다. 폐관은 몇 시에 닫습니까."
"해시 초입이다. 등잔은 서고지기가 물리고 문은 서고지기가 잠근다. 늦으면 그날 야간은 지운다. 오늘 밤부터 서라."
"어김없이 오겠습니다."
서고지기가 붓을 놓으며 한마디를 얹었다.
"말이 짧고 셈이 긴 생도군. 가 봐라."
붓 한 자루가 문을 열었다.
문턱의 값은 밤이었다.
백은 줄어들 잠을 장부의 차변에 적었다.
밤을 사는 며칠 동안 목검은 숙사 벽에 세워 둔 채였다.
첫 밤의 장서각은 냄새부터 서가였다.
오래된 종이의 곰팡내 위에 먹 냄새가 얇게 얹혀 있었다.
등잔 빛은 열람상 언저리에서 끝났다.
빛이 닿는 데까지가 허락의 사정거리였다.
그 너머 깊은 칸의 어둠 속에 자물쇠 걸린 관 기록의 시렁이 서 있었다.
본무가 먼저였다.
해진 판례집을 새 종이에 옮기는 등사였다.
손은 본무를 했다.
눈은 틈틈이 같은 상 위의 방문 보관철을 넘겼다.
대력 스무 해부터 스물두 해까지, 재산정의 방들이 회차 순으로 철해져 있었다.
자주 꺼내진 철과 아닌 철은 손때와 접힌 결부터 달랐다.
어긋난 줄은 첫 밤 끝에 걸렸다.
같은 회차의 방이 두 장씩 철해진 해들이 있었다.
앞 장은 첫 공고의 방이고 뒤 장은 정정의 방이었다.
같은 회차인데 먹빛이 달랐다.
표사의 장부 눈은 어긋난 줄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폐관을 알리는 관례의 한마디가 서가 사이로 낮게 지나갔다.
"폐관 시각이다. 등잔을 물린다. 오늘 몫은 여기까지다."
첫 밤은 거기서 닫혔다.
둘째 밤, 백은 본무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일손의 값이 깨지면 자리도 깨진다.
서가 저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한 번 건너왔다.
"등사는 몇 장 남았나."
"두 장 남았습니다. 폐관 전에 마칩니다."
등사 몇 장을 채우는 사이사이 정정의 방들만 눈으로 짚었다.
날짜가 하나씩 쌓였다.
정정 방은 늘 개방비무 직전 순(旬)에 붙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도 순은 같았다.
규칙이 있는 정정은 관례가 아니었다.
낯익은 규칙이었다.
품 안의 낱장은 꺼내지 않았다.
꺼낼 필요가 없었다.
기일들은 진작에 머릿속 장부에 있었다.
푸를 청(靑) 한 자 앞의 대부 기일도 전부 각 개방비무 직전 순이었다.
방의 날짜 위에 낱장의 날짜가 겹으로 내려앉았다.
심증은 거기까지였다.
방은 고침의 결과만 말한다.
고침의 실물은 시험 명부의 원부에 있고 원부의 행방은 대여 장부에 적힌다.
둘 다 열람 물목 밖, 등잔 빛 너머의 깊은 칸에 있었다.
폐관 시각이 등잔 기름처럼 줄었다.
등 뒤의 기척은 이틀 밤 내내 일정한 간격으로 오갔다.
눈이 없는 서고는 없다.
백의 대조는 이미 보인 뒤였다.
서고지기의 발소리가 서가 끝에서 돌았다.
"폐관 반 각 전이다."
백은 셈을 마쳤다.
덮으면 침묵이 보고가 된다.
몰래 열면 모함이 사실이 된다.
남은 길은 정면 하나였다.
백은 어긋난 두 장의 방을 나란히 상 위에 놓았다.
"같은 회차의 방이 두 장씩 철해진 해가 있습니다. 정정의 방은 늘 개방비무 직전 순에 붙었습니다. 날짜만 여쭙겠습니다."
단정도 채근도 얹지 않았다.
방 두 장은 서고의 물건이었다.
말석이 지어낼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등잔으로 뻗던 손이 반 박자 멎었다.
서고지기는 두 장의 방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캐묻는 말석은 사무에 보고하는 게 통례다. 그것도 알고 놓았나."
"알고 놓았습니다. 통례대로 하셔도 됩니다. 다만 보고가 올라가도 날짜는 그대로 남습니다."
"겁 없는 소리를 셈처럼 하는구나."
침묵이 등잔 기름 닳는 소리보다 길었다.
"……이 철을 이 순서로 넘긴 눈이 몇이나 됐을 것 같나."
"모르겠습니다."
"스무 해 동안 둘이다. 하나는 나고, 하나는 오늘 밤의 자네지."
서고지기가 등잔을 물리는 대신 들어 올렸다.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가 낮게 울렸다.
깊은 칸의 자물쇠는 무겁게 돌았다.
오래 안 열린 경첩이 마른 소리를 냈다.
"조건은 셋이다. 필사는 없다. 반출도 없다. 본 것은 여기 두고 나간다."
"받겠습니다. 셋 다."
서고지기가 열쇠를 쥔 채 물었다.
"무엇을 찾는지는 묻지 않으마. 하나만 답해라. 본 것을 어디에 둘 셈이냐."
"머릿속에 둡니다. 종이에는 옮기지 않습니다."
"그 대답이면 됐다."
열쇠가 시렁 안쪽으로 들어갔다.
낮은 목소리가 한마디를 더 얹었다.
"명심해라. 여기서 본 것으로 서고 밖에서 종이를 만들면 그 종이가 자네를 먼저 벤다."
"종이는 만들지 않습니다."
시험 명부의 원부와 대여 장부가 상 위에 놓였다.
먹 얼룩 든 손끝이 몇몇 쪽을 먼저 짚어 주었다.
오래 알아 온 자의 손이었다.
오늘 처음 보는 눈이 아니었다.
대여 장부의 갈피를 짚으며 백이 물었다.
"반출의 기재는 누구의 손으로 적습니까."
"빌려 가는 쪽이 적고 결재를 받는다. 서고는 기재를 지킬 뿐 명의 출처를 묻지 않지."
"정정의 방도 서고지기의 손으로 붙이셨습니까."
"붙이라는 방이 오면 붙인다. 그게 소임이다. 어긋난 날짜를 세는 것은 소임 밖이었지. 오늘까지는."
낮게 가라앉는 목소리였다.
묵인은 호의가 아니었다.
오래 눌러 온 침묵의 제 몫 정산이었다.
원부의 종이에는 긁어낸 자리가 있었다.
긁힌 바닥 위에 덧쓴 먹이 도톰하게 앉아 있었다.
불탄 문서를 판독해 온 눈에는 지울 수 없는 요철이었다.
대여 장부에는 원부 반출의 기재가 있었다.
반출의 날짜들은 몰려 있었다.
전부 각 개방비무 직전 순이었다.
서고지기가 낮게 물었다.
"찾던 날짜인가."
"예. 방과 반출이 같은 순입니다."
정정 방의 날짜.
원부 반출의 날짜.
낱장의 대부 기일.
세 겹의 날짜가 한 규칙으로 포개졌다.
등잔 하나의 빛 아래에서 묶음의 셈이 닫혔다.
푸를 청의 돈이 산 것은 서열이었다.
매관 대부는 실재한다.
백은 결론의 선을 스스로 그었다.
'여기서 사람까지 정하면 틀린다.'
거기까지였다.
조작의 증명이 학살의 증명은 아니었다.
원부는 사람을 베지 않는다.
붓의 죄와 칼의 죄 사이에는 아직 다리가 없었다.
한 가지 사실이 더 눈에 담겼다.
반출 결재 자리의 직인은 관주 직인이었다.
깊고 단정한 통상 결재의 인영이었다.
백은 사실에 결론을 얹지 않았다.
결재는 관주의 소임이고 직인은 절차를 말할 뿐 손을 말하지 않는다.
가시 하나가 셈 끝에 남았을 뿐이었다.
원부와 대여 장부는 조건대로 깊은 칸에 도로 들어갔다.
자물쇠가 무겁게 돌아 잠겼다.
철컹.
"서고는 기억하는 곳이지 말하는 곳이 아니다. 나는 오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저도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나갑니다."
밤길은 가볍고 무거웠다.
얻은 것은 전부 머릿속 장부에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규칙 하나.
명징은 차가웠다.
이튿날 아침, 방문 곁의 수군거림은 결이 달라져 있었다.
앞줄의 생도가 목소리를 낮췄다.
"밤마다 서고에 드나든다더라. 폐관 무렵까지 남는 날도 있다지."
곁의 동기가 받았다.
"붓으로 오른 세 줄이 마침 그 방에 있잖나. 시험철을 베껴 서열을 샀다는 말이 돌던데."
뒷줄에서 누군가 얹었다.
"고발장이 사무에 들어갔다는군. 조사가 열리면 열람부터 막힐 게다."
곁의 동기가 목을 움츠렸다.
"고발한 쪽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지. 시기인지 겨냥인지."
앞줄의 생도가 방문 쪽으로 턱짓했다.
"보류면 다음 방문에 저 이름이 그대로 얼어붙는 게지. 오르다 만 줄이 제일 볼만하거든."
뒷줄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서고지기 영감이 순순히 문을 열어 줬을까."
곁의 동기가 손을 저었다.
"그 영감이야 규정 덩어리지. 폐관 종처럼 어김이 없는 사람이야."
사무의 방은 한나절 만에 붙었다.
관 사무의 지질에 관 사무의 어휘였다.
부정행위의 고발이 접수되어 조사를 연다.
조사 종결까지 해당 생도의 다음 재산정은 보류할 수 있고 열람은 정지할 수 있다.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적히지 않아서 더 크게 읽히는 이름이었다.
곁을 지나던 생도 하나가 대놓고 물었다.
"네가 그 밤의 서고 신입이냐. 시험철은 정말 안 베꼈고."
"명부에 적힌 대로 다녀왔습니다. 조사가 열리면 같은 대답을 할 겁니다."
생도가 코웃음을 얹었다.
"사무 조사가 뭔지는 아나. 서리들이 밤 서고의 명부부터 뒤질 게다."
"뒤지면 기재가 나올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생도가 재미없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겁이 없는 건지 셈이 없는 건지."
백은 소문과 싸우지 않기로 한 셈을 다시 눌렀다.
출처를 캐는 걸음도 결백의 주장도 소문의 값만 키운다.
신청 명부와 일손 배정의 기재는 관이 이미 받아 적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몸에 지닌 것이 없었다.
종이 한 장 지니지 않은 손이 유일한 방패였다.
연무장 모퉁이에서 진소하(陳素河)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이 이번에는 발끝이 아니라 눈부터 왔다.
"지난 판 뒤로 연무장에서는 뵙지 못했습니다. 밤의 서고에 계셨다더군요."
"필사 일손으로 서고 있습니다, 진 사형."
진소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한백 씨. 전언에 얹혀 묻지 않고 본인에게 묻겠습니다. 밤의 서고에서 시험철을 베껴 서열을 샀다 — 도는 문장 그대로입니다. 사실입니까."
"신청 명부와 일손 배정의 기재대로입니다. 야간 열람은 필사의 값으로 샀습니다. 베낀 것도, 가져온 것도 없습니다."
"압니다. 서열을 제 손으로 내려놓는 사람이 서열을 위해 부정을 저지른다 — 그 셈은 맞지 않습니다. 받을 필요가 없는 박자를 받아 놓고 지는 사람이 시험철을 훔쳐 서열을 살 이유가 없지요. 그 소문은 저울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반 박자의 침묵이 지나갔다.
시선은 여전히 눈에 있었다.
"대신 하나만 여쭙지요. 밤의 서고에는 무엇을 하러 가십니까."
"판례와 지난 방문을 읽으러 갑니다. 열람 물목 안의 것들입니다."
"사실이겠지요. 전부는 아니고요."
피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어였다.
백은 시선을 받았다.
"물목 밖의 것은 지닌 게 없습니다."
"관의 어휘로 물러서시는군요. 명부, 기재, 물목."
"제가 설 수 있는 자리가 거기까지입니다."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단정의 말은 이번에도 오지 않았다.
"숨기시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판에도, 오늘도. 그것까지 부정하시겠습니까."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일 뿐입니다."
진소하가 반 박자 침묵했다.
저울이 움직이는 침묵이었다.
"그 대답도 저울에 달아 두겠습니다. 모함은 내렸습니다. 물음은 남겨 두겠습니다. 조사가 열리면 제 눈으로 본 것만 말하겠습니다. 다음 비무의 약정은 그대로입니다."
백은 목례로 닫았다.
"살펴 가십시오, 진 사형."
진소하는 더 파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남긴 것은 단정이 아니라 저울의 눈금 하나였다.
숙사의 침상 줄에는 소문이 먼저 와 있었다.
셋째 줄의 고참이 어둠 속에서 물었다.
"조사가 열리면 어쩔 셈이냐."
"기재대로 답할 뿐입니다."
고참이 낮게 웃었다.
"겁도 없는 신입일세. 명부가 네 편이기를 빌어라."
"명부는 편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고참이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물지게 신입이 별나게도 크는구나. 다음 방문이 또 볼만하겠어."
어둠 속에서 백은 품 안 꾸러미를 손끝으로 확인했다.
그을음 냄새가 손에 남았다.
낱장의 재가 손끝에 묻었다.
오늘은 펼치지 않아도 셈이 섰다.
갚을 항목의 첫 줄 — 표사 장평(張平), 미지급 삯 두 냥 여섯 전, 처는 성밖 버들골.
가장 큰 항목, 은진서(殷振瑞) 앞의 줄은 여전히 갚을 수도 알은체할 수도 없는 자리에 있었다.
몸에 남은 것은 줄어든 잠과 먹물 든 손끝, 붓을 쥐던 손목의 뻐근함뿐이었다.
오늘의 장부는 한 줄로 닫히지 않았다.
잃을 위기에 오른 것은 줄과 문이었다.
보류될 수 있는 재산정과 정지될 수 있는 열람.
얻은 것은 종이에 없는 것들이었다.
세 겹의 날짜와 한 규칙, 매관 대부의 실재.
조여드는 소문 속에서 셈만은 맑았다.
몰린 자리의 명징이었다.
원부를 꺼내 가 긁고 덧쓸 수 있는 손.
결재의 절차를 지나 문서고를 드나든 붓.
붓을 쥔 손은 누구인가.
백은 물음을 머릿속 장부의 첫 줄로 옮겨 적었다.
갚는 걸음은 성밖 버들골이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