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2년 무렵 초여름 다섯째 날 오후, 제지방 지붕 위로 검은 연기가 접힌 칼처럼 솟았다.
골목 끝에는 장환이 있었다.
그는 불길 반대쪽 진흙에 발자국을 깊게 남기며 일부러 정산을 보았다.
장환은 달아나는 사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젖은 천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정산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도 골목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삼식 조장."
불길 너머에서도 옛 호칭이 또렷했다.
"이번에는 누구를 먼저 버릴 셈이냐?"
정산의 오른발이 장환 쪽으로 돌아갔다.
몸이 기억한 추격 자세였다.
그 순간 압착틀 아래에서 쇠막대가 바닥을 긁었다.
길게 둘, 짧게 하나.
소하의 신호는 압착틀 아래에서 울렸다.
길게 둘은 아이가 셋 있다는 뜻, 짧게 하나는 뒤 물문이 아직 열렸다는 뜻이었다.
전날 소하가 직접 고른 신호였다.
주혜가 물었다.
"뜻을 기억해요?"
"아이 셋, 뒤 물문 하나."
"그럼 장환이 아니라 그 숫자를 따라가요."
정산은 장환 쪽으로 향했던 발을 돌렸다.
정산은 한세정에게 말했다.
"장환은 군졸에게 맡기십시오. 나는 안으로 갑니다. 소하가 아이 수와 출구를 알고 있습니다."
"저자를 놓치면 다시 못 잡을 수 있다."
"내가 따라가면 아이와 표가 탑니다. 저자는 그걸 원합니다."
한세정은 골목 양끝에 군졸 넷을 나눴다.
"나는 저자를 쫓지 않고 길을 닫겠다. 심 검법관은?"
"젖은 천과 봉함 집게를 들고 입구까지만 갑니다. 사람을 받는 손과 원본을 받는 손을 나눠야 합니다."
주혜가 물동이를 들었다.
"나는 뒤 물문을 열어요. 정산은 들보만 받아요. 안에서 순서는 소하가 정합니다."
정산이 짧게 답했다.
"따르겠소."
장환은 그 말을 듣고 골목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쫓아오지 않는 정산을 확인한 뒤였다.
한세정이 외곽 봉쇄를 명했다.
정산은 장환의 등을 보지 않고 주혜와 불 속으로 들어갔다.
'뒤를 보지 말자. 이번에는 안에 남은 사람부터다.'
젖은 닥 타는 단내가 목을 막았다.
건조대는 이미 쓰러졌고 압착틀 위 들보가 붉게 갈라졌다.
불은 지붕에서 아래로 번진 것이 아니었다.
압착틀 네 모서리의 기름 먹은 닥더미가 먼저 타고 있었다.
사람과 종이를 함께 가두려 불길의 시작점을 나눠 놓은 방화였다.
주혜는 정문 쪽에 물을 붓지 않았다.
"정문으로 물을 대면 뜨거운 김이 압착틀 아래로 들어가요. 뒤 홈에만 부어요."
심연은 입구 바닥에 젖은 천 두 장을 펼쳤다.
큰 천은 사람을 눕힐 자리, 작은 천은 종이를 받을 자리였다.
"나오는 대로 말하십시오. 만지기 전에 어느 천인지 정합니다."
소하가 틀 아래 엎드려 있었다.
곁에는 민호 묶음에서 빠졌던 아이 둘과 작업장 아이 하나가 웅크렸다.
"압착틀 밑에 셋이야. 뒤 물문으로 한 명씩 나가야 해. 들보를 먼저 들면 무너져."
소하의 얼굴에는 그을음이 묻었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아이 셋은 가장 작은 아이, 다리를 다친 아이, 숨이 가쁜 아이로 구분돼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불길 밖까지 들릴 수 있어 소하가 상태로 나눈 것이었다.
"작은 애가 먼저. 그다음 다친 애. 숨 가쁜 애는 내가 같이 밀게."
정산이 물었다.
"너는?"
"마지막. 내가 고임목 위치를 알아."
"위험하다."
"알아. 그래서 내가 정했어."
정산은 더 말하지 않았다.
주혜가 바닥의 젖은 대나무 판을 가리켰다.
"판을 아이 쪽으로 밀어요. 내가 고임목을 빼면 틀이 물문 쪽으로 기울어요."
주혜는 바닥에 엎드려 판 한끝을 잡았다.
뜨거운 물이 소매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소하, 작은 아이 발이 판 가운데 오게 해."
"됐어."
"정산, 지금 한 치만."
정산은 오른어깨로 들보를 밀었다.
우지끈.
한 치가 넘어가면 틀이 아이들 쪽으로 무너졌다.
그의 일은 힘껏 드는 것이 아니라 소하와 주혜가 말한 만큼만 버티는 일이었다.
정산의 왼팔은 불길 속에서도 몸통에 묶인 채였고 셋째 회수는 하지 못했다.
그는 오른어깨와 등으로 들보를 받았다.
소하는 한 아이씩 젖은 판 위로 밀었다.
첫째가 물문을 나갔다.
둘째가 따라갔다.
셋째의 옷자락에 불이 붙자 소하가 젖은 닥죽을 덮었다.
첫째 아이가 젖은 천 위에 나오자 심연은 이름을 묻지 않았다.
"숨은 쉽니까?"
"예."
"큰 천 왼쪽에 누우십시오."
둘째는 다친 발 때문에 기어 나오지 못했다.
밖의 군졸이 손을 뻗었으나 아이가 뒤로 움찔했다.
"잡아도 됩니까?"
심연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군졸이 팔꿈치를 받쳐 큰 천 오른쪽으로 옮겼다.
셋째 아이의 불붙은 옷은 닥죽에 덮여 꺼졌다.
소하가 아이를 먼저 밀어 낸 뒤 자기 종아리를 바닥에 끌었다.
소하의 오른 종아리에는 얕은 화상이 남았다.
주혜는 딸을 보자 물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소하가 손을 내저었다.
"아직 고임목 하나 남았어. 엄마가 빼면 틀이 내려와."
"너부터 나와."
"내가 빼고 나갈게. 밖에서 세 번 세어 줘."
주혜는 이를 깨물고 물문 밖에서 셋을 셌다.
하나에 소하가 고임목을 밀고 둘에 몸을 돌리고 셋에 젖은 판 위로 미끄러져 나왔다.
주혜는 딸을 안는 대신 먼저 물었다.
"어디를 잡아도 돼?"
"왼팔. 다리는 만지지 마."
그제야 주혜가 소하의 왼팔을 잡아 큰 천으로 옮겼다.
"소하야, 이제 너다."
"표가 틀 밑에 있어. 엄마가 말한 삼베 결이 보여."
"네가 나간 뒤에 꺼낸다."
"약속해."
"네가 밖에 나간 뒤, 심 검법관의 천 위로만 꺼내겠다."
소하는 그 문장을 듣고서야 물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하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뒤 물문으로 기어 나갔다.
정산은 그 뒤에야 틀 아래 손을 넣었다.
종이와 얇은 목패가 붙은 원본이 나왔다.
원본 목패의 찢긴 홈은 옛 동료가 남긴 반쪽과 정확히 맞았다.
심연이 젖은 천을 들고 입구까지 들어왔다.
"천 위에 놓으십시오. 손으로 펴지 마십시오."
정산이 붙은 종이를 억지로 떼지 않고 목패째 작은 천에 놓았다.
심연은 인계 문답을 세 줄로 줄였다.
"구조된 사람?"
"아이 셋과 소하, 모두 생존."
"원본?"
"목패 붙은 한 벌, 펼치지 않음."
"장환?"
"외곽 봉쇄 안, 아직 미확보."
심연은 세 답만 적고 불 속에서 더 묻지 않았다.
호송표에는 민호 작업명 아래 실제 이름 아홉이 적혀 있었다.
정산의 호송 수결, 장환의 겹친 원 검수, 뒷면의 산 모양 세 획이 서로 다른 칸에 남았다.
"실제 이름은 지금 읽지 않습니다. 아이와 증인이 고른 자리에서 반쪽·장부와 함께 대조하겠습니다."
정산은 자기 수결에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한 줄도 같이 여시오."
"당신 줄은 당신이 열 수 있습니다. 아이들 줄은 아이들이 정합니다."
"그렇게 하시오."
지붕이 무너지는 소리에 모두 물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제지방의 압착틀과 건조대가 불 속에 주저앉았다.
골목에서 칼 하나가 날아왔다.
장환은 달아난 것이 아니라 원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칼은 정산이 아니라 작은 천을 든 심연의 손을 향했다.
정산이 젖은 대나무 판을 세워 칼끝을 받았다.
장환은 곧장 두 번째 칼을 뽑지 않고 왼손의 젖은 천 꾸러미를 품에 넣었다.
주혜는 그 동작을 보았다.
"저 천도 봉하세요. 불을 끈 천이 아니에요."
장환의 웃음이 처음으로 멎었다.
"셋째를 못 받는 몸으로 나를 살려 둘 셈이냐?"
정산은 셋째 회수를 만들지 않았다.
젖은 대나무 틀의 고임목 하나만 발로 찼다.
불 먹은 틀이 접히며 장환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장환이 칼을 되받으려는 순간 주혜가 물통을 엎어 발밑 재를 진흙으로 만들었다.
장환은 정산의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셋째 회수가 비는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산은 맞받지 않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 대나무 틀 사이로 장환을 끌어들였다.
"또 물러나는군."
"당신 뒤를 쫓지 않는 법을 배웠소."
장환의 발이 진흙에서 미끄러졌다.
칼끝이 정산의 옷을 갈랐지만 살에는 닿지 않았다.
주혜가 쓰러진 틀의 줄을 당기자 대나무 살이 장환의 팔꿈치를 감쌌다.
한세정이 체포를 명했고 군졸 둘이 갈고리와 포승으로 장환의 팔을 묶었다.
"검은 천 꾸러미도 따로 받는다."
한세정의 명에 아역이 집게로 장환 품의 천을 꺼냈다.
안에는 사람 셋이 입김을 불어 넣은 듯 서로 다른 습흔이 남은 작은 명주 조각들이 있었다.
심연은 냄새도, 호흡도 읽지 않았다.
"용도 미상. 장환 소지. 별도 봉함."
장환은 다시 웃었지만 시선은 봉함된 천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환이 정산에게 웃었다.
"집도 잃고 네 이름도 열었구나. 무엇을 지켰지?"
정산은 구조된 아이들과 젖은 천 위 원본을 보았다.
"당신을 죽이지 않았소. 내 죄까지 말할 자리를 지켰소."
밤이 되자 제지방에는 벽 한쪽만 남았다.
주혜는 소하의 화상을 감고 정산 앞에 이동 조건표를 펼쳤다.
한세정이 구조·증거·피의자 인계를 확인하러 왔다.
심연은 아까와 같은 세 줄만 읽었다.
"아이 셋과 소하 생존. 원본 한 벌 봉함. 장환 생존 체포."
"손상은?"
"소하 오른 종아리 얕은 화상, 정산 오른손 열상과 왼어깨 악화, 제지방 전소. 자세한 검안은 치료 뒤 별지로 넘깁니다."
한세정은 더 묻지 않았다.
구조 절정 뒤의 마당을 문답으로 다시 불태우지 않았다.
"함께 떠나는 건 오늘 정해요. 당신을 용서하는 건 내일도 아니고, 당신이 모두 증언한 뒤에 다시 정해요."
"그 순서를 따르겠소."
"공개 검시에서 장환보다 먼저 당신이 한 일을 말해요. 아이 이름은 아이들이 고른 만큼만 열고요."
소하가 조건표 아래에 한 줄을 보탰다.
"나는 검시 마당에 있을 거야. 내 이름 칸을 열지 말지는 내가 거기서 말할게."
정산이 딸을 보았다.
"화상을 입었으니 쉬어도 된다."
"쉬는 것도 내가 고를게. 지금은 갈 거야."
정산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다."
주혜는 함께 떠난다는 칸에 수결했지만 용서라는 칸은 만들지 않았다.
없는 칸을 정산이 채우려 하지 않는지까지 공개 검시 뒤에 다시 볼 생각이었다.
관아 마당에는 세 탁자와 빈 증언 자리가 준비됐다.
원본·반쪽 호송표와 포승 묶인 장환이 같은 새벽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