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흔은 숨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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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종이보다 먼저 왔다

1252년 무렵 초여름 셋째 날, 상급 서리는 시신보다 장부를 먼저 싣겠다고 했다.

서리 뒤에는 빈 수레와 봉함 상자 여섯이 기다렸다.

그는 공방 장부방 문에 상급 관문 봉표를 붙이고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두 시진 뒤에는 원본과 정산을 함께 싣겠소. 그전에 길을 찾든 사람을 찾든 검법관 마음대로 하시오."

작업자들이 장부방 주위로 모였다.

장부가 떠나면 외상 닥값도, 품삯도, 어느 집이 누구에게 종이를 맡겼는지도 함께 떠났다.

주혜가 물었다.

"압수한 동안 장부를 열 사람과 돌려줄 날은 적혀 있습니까?"

"상급 관문이 맡을 일이지, 종이장이 물을 일이 아니오."

모래가 가늘게 흘렀다.

심연은 서리와 다투는 대신 한세정에게 검토란이 빈 공문을 내밀었다.

"작업자 이름과 거래처를 가져가면 사람부터 좁힐 수 있소."

심연은 배수 홈의 물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장부 이름은 시신이 잠긴 문을 통과한 길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검법관이 상급 명령을 거스르겠다는 건가?"

"장부는 공문 부속으로 두고 두 시진만 물길을 먼저 보게 해 주십시오. 책임은 내 검토란에 씁니다."

한세정은 상급 서리의 압수표와 심연의 검토란을 함께 읽었다.

"두 시진을 승인한다. 장부 원본은 봉하고 물길 대조만 공문에 붙인다."

"해가 중천을 넘기기 전까지다. 경로가 나오지 않으면 수레를 막지 않겠다."

한세정은 승인 시각 옆에 자기 수결을 붙였다.

심연은 실패하면 장부가 떠난다는 줄을 읽은 뒤에야 수결했다.

"그때까지 경로를 못 찾으면 제 검토가 먼저 틀렸다고 쓰십시오."

주혜는 장부방 열쇠를 자기 허리에서 풀어 한세정 앞 봉함 그릇에 넣었다.

자신의 공방에서 자기 장부를 열지 못하는 두 시진이 시작됐다.

주혜는 거래 장부를 열지 않았다.

대신 상류에서 받은 닥 찌꺼기와 공방 압착수 표본을 흰 그릇 셋에 나눴다.

"거래처 이름은 봉합니다. 공개할 것은 상류 공동 압착장의 배합과 어제 수문 시각입니다."

첫 그릇에는 지연촌 닥이 짧게 가라앉았다.

둘째에는 대나무 섬유가 떠 있었다.

셋째의 긴 닥 사이로 석회 흰 가루와 남빛 찌꺼기가 함께 내려앉았다.

주혜는 한꺼번에 답을 말하지 않았다.

첫 그릇의 물을 나무숟가락으로 저어 짧은 닥이 손가락 두 마디 안에서 끊어지는 것부터 보였다.

"우리 마을 닥은 짧아요. 건조대에서 빨리 마르지만 물길을 오래 버티지 못해요."

둘째 그릇에서는 대나무 섬유가 물 위에 가볍게 떴다.

"이것은 포장지 배합이에요. 시신 등에 붙은 섬유보다 누렇고 곧아요."

셋째 그릇은 오래 저어도 긴 실이 풀리지 않았다.

바닥의 석회는 흰 테를 만들었고 남빛은 그 안쪽에 가라앉았다.

상급 서리가 재촉했다.

"그 빛을 내는 집이 하나뿐이라는 보증이 있소?"

주혜는 상류에서 받은 납품 목패 세 개를 놓았다.

둘은 석회만, 하나는 석회와 남빛 값을 함께 적고 있었다.

"종이를 판 집 이름은 열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석회와 남빛을 같은 날 산 압착장은 이 목패 하나예요."

문밖에 서 있던 중개상 하나가 거래패를 품에 넣었다.

"상류 객점에서 지연촌 물건을 받지 말라 했소. 살인 물에 닥을 담갔다는 소문이 났으니 우리도 살 길을 찾아야지."

작업자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이 났다.

주혜는 돌아보지 않았다.

셋째 그릇 아래에 거래 중지라는 비용을 적고 다음 시험으로 갔다.

심연은 손을 대지 않았다.

석회와 남빛을 가른 것은 주혜의 물그릇이었다.

주혜가 E001 봉함 옆에 재현 표본만 놓았다.

"이 석회와 남빛 배합은 상류 공동 압착장 한 곳뿐입니다. 시신 등의 섬유도 같은 비율입니다."

상급 서리가 물었다.

"종이 재료가 같다고 시신이 거기서 왔다고 할 수 있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심연은 결론을 보류하고 세곡 수문표를 펼쳤다.

어제 수문은 진시에 한 차례 열렸다.

상류 압착장 물을 실은 세곡 배가 지연촌 수차 아래를 지난 시각이었다.

수문표만으로는 배가 어느 높이까지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한세정은 빈 곡물 자루 셋과 세곡 배에서 쓰는 밑판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주혜는 배수 홈 입구에 자루를 눕혔고 정산은 감시끈 안에서 밑판의 폭만 불렀다.

"한 자 반. 가운데 못은 손바닥 하나 아래요."

아역들이 밑판을 홈에 대려는 순간 둑 쪽에서 팽팽한 소리가 났다.

수문 밧줄이 끊어졌다.

무거운 문이 반쯤 내려앉으며 시험물이 한꺼번에 빠졌다.

자루 하나가 홈에 처박혔고 수차 날개 끝이 돌턱을 때렸다.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에 작업자들이 달려들었다.

상급 서리는 모래시계를 보았다.

"재현은 실패했군."

심연은 끊어진 밧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린 뒤라 발자국은 이미 겹쳤다.

"누가 잘랐는지는 지금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밧줄 안쪽은 마르고 바깥 피복만 젖었습니다. 방금 물이 당겨 끊은 것이 아니라 칼이 먼저 들어갔습니다."

정산이 감시끈을 넘으려 하자 주혜가 막았다.

"당신은 구조를 말로만 해요. 끊어진 자리에 손대면 또 당신 흔적만 남아요."

정산은 멈춰 서서 새 밧줄을 걸 도르래 순서만 불렀다.

작업자들이 그대로 움직이는 동안 소하가 수차 아래로 기어갔다.

"여기 마른 선이 있어요."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날개에는 물때 위로 손가락 두 마디 폭의 마른 띠가 둘러져 있었다.

"어제 물이 여기까지 왔다가 빠진 거야. 오늘 문이 떨어져도 이 선은 안 바뀌었어."

주혜는 소하를 끌어내고 마른 띠 높이를 자로 쟀다.

쇄건실 안쪽의 하얀 역류선과 정확히 두 치 차였다.

끊긴 밧줄 때문에 지금 물은 되살릴 수 없어도, 전날 물이 어디까지 차올랐는지는 나무가 품고 있었다.

정산은 문밖 감시끈 안에서 배 바닥 도면을 그렸다.

"세곡 배 밑칸은 수문이 열릴 때 배수 홈 높이와 맞습니다. 사람 하나를 눕힐 너비도 됩니다."

주혜가 남편을 보았다.

"어떻게 아는지는 넷째 날까지 말하기로 했어요. 오늘은 본 구조만 말해요."

"밑칸을 수리해 본 적이 있소. 호송 이야기는 약속대로 따로 말하겠소."

주혜는 답을 받아 적고 선을 그었다.

"수리해 본 구조까지. 누구를 실었는지는 내일까지."

"그 선을 넘지 않겠소."

상급 서리는 정산의 말을 자복란에 옮기려 했지만 심연이 붓을 눕혔다.

"배 구조를 아는 것과 이 시신을 옮긴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의심할 만하지 않소?"

"의심은 수레를 채우지 못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람이 없어도 같은 길이 나오는 재현입니다."

심연은 쇄건실 배수 홈 안쪽의 하얀 선을 쟀다.

평소 물금보다 두 치 높았고 남빛 얼룩은 밖에서 안으로 길게 번졌다.

"수차가 멎을 때 하류 판이 닫혔습니다. 수문 물이 역류하면 배수 홈이 건조대 아래까지 찹니다."

한세정이 물었다.

"문이 안에서 잠겼는데?"

"시신은 문을 쓰지 않았습니다. 밑칸에서 배수 홈으로 밀려 들어왔고 물이 빠진 뒤 건조대 아래 남았습니다. 누군가 안쪽 걸쇠를 긴 대나무 갈고리로 내렸습니다."

주혜가 갈고리 길이를 재었다.

배수 홈에서 걸쇠까지 닿았고 문 바닥에는 젖은 대나무 끝 자국이 하나 있었다.

첫 시험에서는 빈 자루가 홈 모서리에 걸렸다.

시신 무게와 모양을 흉내 내려고 마른 닥 뭉치를 채웠기 때문이다.

주혜가 자루를 다시 열었다.

"시신 등에 젖은 섬유가 눌려 있었어요. 마른 것이 아니라 닥죽과 함께 왔어요."

그녀는 자루 속을 젖은 닥 찌꺼기로 바꾸고 밑판 위에 눕혔다.

아역 둘이 수문 대신 물통을 차례로 부었다.

자루는 홈 입구에서 한 번 돌고 건조대 아래까지 미끄러졌다.

정산은 긴 대나무 갈고리를 자루 뒤에 걸었다.

감시끈 밖에서 직접 손을 대지 않고 끝만 밀자 안쪽 걸쇠가 내려갔다.

한세정이 마당 쪽 문을 당겼다.

걸쇠는 잠긴 채였고 자루는 방 안에 있었다.

구경하던 작업자들 사이에서 숨이 한꺼번에 빠졌다.

잠긴 문은 비로소 범인의 기이한 재주가 아니라 물과 설비가 만든 속임수로 낮아졌다.

심연이 기록했다.

"잠긴 문은 살인 시각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신이 들어온 뒤 발견될 조건만 만들었습니다."

시신은 상류 공동 압착장에서 죽어 젖은 닥과 함께 세곡 배 밑칸에 실렸다.

진시 수문이 열리자 지연촌 배수 홈으로 밀려 들어왔고 수차가 멎은 동안 걸쇠가 내려졌다.

E001의 젖은 섬유, 바닥 혈흔 부재, 바깥에서 안으로 난 역류선이 같은 길을 말했다.

상급 서리는 장부 압수를 접지 않았지만 이동 경로 공문 뒤로 순서를 미뤘다.

그는 수레꾼에게 빈 상자 둘만 싣게 했다.

물길 공문의 부본과 잘린 밧줄이 들어갔다.

장부방 봉표는 남았지만 모래시계가 다 비운 뒤에도 원본은 움직이지 않았다.

"경로는 인정하오. 살인자 이름은 여전히 장부 안에 있을 거요."

심연이 답했다.

"그 이름을 열 때도 오늘처럼 길과 반증을 먼저 붙이겠습니다."

주혜는 부러진 수차 날개를 보았다.

수레를 막은 대가로 내일 닥을 뜰 물도 멎어 있었다.

주혜는 세곡 배 밑칸 목록을 대조하다 빈 줄을 찾았다.

"민호라는 작업명 묶음 하나가 여기서 내려졌어요. 아이 수만 있고 실제 이름은 없습니다."

빈 줄 옆에는 작은 구매 표식이 찍혀 있었다.

겹친 원 둘과 끊긴 세 번째 획이었다.

정산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 수차 축이 멎은 채 세 번 울렸다.

탁. 탁. 탁.

첫 두 번은 나무망치로 친 듯 깊었고 마지막은 힘이 빠져 반쯤 울렸다.

정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저 소리를 아는 얼굴이다.'

정산이 감시방 문을 붙잡았다.

"백식방에서 쓰던 접촉 신호요. 내 옛 동료가 밖에 있소."

"살아 있다는 신호예요?"

주혜가 묻자 정산은 마지막의 짧은 울림을 들었다.

"도움을 청한다는 뜻이오. 셋째를 끝내지 못하면, 쫓기는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