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2년 무렵 초여름 넷째 날, 정산의 옛 동료는 수차축 아래 세 번째 숨을 넘기지 못했다.
정산은 감시방 문을 나서기 전에 한세정에게 허락부터 구했다.
"신호가 끝난 곳까지만 가겠습니다. 내 발목에 이 끈을 매고 아역 둘이 끝을 잡게 하십시오."
"도주를 막으려는 끈인가?"
"내가 사람보다 길을 먼저 고르지 못하게 하는 끈입니다."
주혜가 삼베끈의 매듭을 직접 확인했다.
정산이 약속한 넷째 날이었지만 약속 시각이 왔다고 해서 그에게 길을 정할 권한까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수차축 아래에는 피가 없었다.
세 번째 신호를 낸 자는 물길 건너 공동 압착장까지 기어간 뒤였다.
젖은 갈대 사이로 피 한 방울씩 이어졌고 둑 위에는 일부러 깊게 찍은 말발굽 자국이 상류로 향했다.
정산은 말발굽을 보자 걸음을 재촉했다.
발목의 끈이 팽팽해졌다.
"저 자국은 장환의 말굽이오. 바깥 쇠징 하나를 비워 두는 버릇이 있소."
한세정의 아역이 물었다.
"따라가면 잡을 수 있습니까?"
"지금이라면."
압착장 안에서 나무판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사람의 짧은 숨이 그 뒤를 이었다.
정산은 상류 말발굽과 닫힌 압착장 문 사이에 섰다.
"끈을 푸시겠습니까?"
아역의 질문에 정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문을 연다."
세 번 신호를 보낸 사람은 정산의 옛 교대 동료였고 손에는 민호 호송표 절반이 있었다.
그는 압착틀 뒤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왼쪽 갈비의 옷은 검게 젖었고 오른손은 반쪽 표를 쥔 채 굳어 있었다.
"구문."
정산이 옛 이름을 부르자 동료가 눈을 떴다.
"그 이름도 아직 기억하나."
"네가 쓰라 한 이름은 무엇이냐?"
"오늘은 구문으로 적어라. 죽은 작업명 말고."
심연은 그 말을 들은 사람 넷을 확인한 뒤 증언지의 호칭 칸에 구문이라고 썼다.
실제 이름인지 옛 역할명인지는 미확정이라 덧붙였다.
정산은 피 묻은 손이 가리킨 상류 길을 보았다.
젖은 갈대가 막 눕고 있어 한 사람이 달아난 방향은 선명했다.
옛 동료가 입술을 움직였다.
"장환이 민호 묶음을 다시 샀다. 상류 관문으로 간다."
둑 위 말 한 필이 길게 울었다.
갈대 뒤로 검은 소매가 한 번 보였다.
정산이 기억하는 장환의 키와 걸음이었다.
구문이 정산의 소매를 붙잡았다.
"표가 나한테 있다는 걸 안다. 네가 오면 저쪽으로 뛸 줄도 알고."
"반쪽은 어디서 났나?"
"내가 마지막 관문에서 빼돌렸다. 나머지는 제지방 압착틀 아래다. 셋째 회수자가 오늘 밤 가져간다."
"누구냐?"
구문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이름은 못 봤다. 오른 엄지에 겹친 원. 칼은 왼쪽에서 넣고 오른쪽으로 거둔다."
갈대가 다시 흔들렸다.
정산은 세 걸음이면 둑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구문의 손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정산이 심연을 불렀다.
"숨을 붙잡아 주십시오. 나는 길을 압니다."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를 놓치면 아이 묶음이 상류 관문을 넘습니다."
"이 사람을 놓치면 표의 보관처와 장환을 본 마지막 숨이 여기서 끝납니다."
심연은 정산의 선택을 대신 말하지 않았다.
한세정은 추격조를 꾸릴 수 있었지만 정산만큼 말굽과 옛 길을 아는 자는 없었다.
주혜는 멀리 압착장 입구에 섰다.
"당신이 가면 우리는 또 왜 갔는지를 나중에 듣겠죠."
소하도 어머니 옆에 있었다.
아이는 구문의 벌어진 손과 둑의 갈대를 번갈아 보았다.
"저 아저씨가 지금 말할 수 있을 때 들어."
정산은 갈대 쪽에서 눈을 돌렸다.
"장환을 쫓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과 표를 먼저 봉하고 내가 한 일을 가족 앞에서 말하겠습니다."
옛 동료는 호송표를 놓은 뒤 숨을 멈췄다.
심연은 사망 시각과 손의 위치를 기록했고 한세정은 추격조를 자기 이름으로 보냈다.
정산은 구문을 업고 공동 압착장 바깥으로 나왔다.
안에서 죽으면 장환 쪽이 발견 장소를 바꿨다고 우길 수 있었다.
한세정의 아역 둘, 압착장 일꾼 셋, 주혜와 소하가 보는 자리에 젖은 돗자리를 폈다.
구문은 마지막까지 반쪽 표를 놓지 않았다.
"내 손을 펴지 마라."
"네가 놓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 버릇을 일곱 해 전에 가졌어야지."
정산은 대답하지 못했다.
구문이 스스로 손가락을 한 마디씩 편 뒤에야 반쪽 표가 돗자리 위에 떨어졌다.
정산은 동료의 손을 펴지 않았다.
오작이 입회한 뒤에야 반쪽 표를 천 위에 옮겼다.
표에는 아이 수 아홉, 죽은 작업명 아홉, 관문 셋이 적혀 있었다.
검수 칸에는 겹친 원 둘과 끊긴 세 번째 획이 있었다.
오작이 표를 들려는 순간 압착장 지붕에서 닥 뭉치 하나가 떨어졌다.
젖은 닥 속에 숨긴 낚싯바늘이 반쪽 표의 실을 걸었다.
표가 돗자리 끝으로 끌려갔다.
정산은 둑을 향해 뛰지 않았다.
발로 돗자리 모서리를 밟아 표를 멈춘 뒤, 구문의 몸 앞에 무릎을 세웠다.
지붕에서 검은 복면 하나가 내려오며 칼등으로 그의 목을 노렸다.
"장환이 네 죄를 다 안다. 표를 내놓으면 네 가족 이름은 남겨 주마."
정산의 손이 봉함된 검으로 갔다가 멈췄다.
그는 구문의 등에 받쳐 두었던 압착목을 걷어 올렸다.
칼등이 나무에 박혔고 한세정의 아역들이 복면자의 다리를 창대로 걸었다.
퍽.
복면자는 몸을 비틀어 오른쪽으로 칼을 회수했다.
정산의 굳은 왼어깨로는 따라갈 수 없는 셋째 동작이었다.
심연이 소리쳤다.
"잡는 것보다 표에서 떼어 놓으십시오."
주혜가 물그릇을 낚싯줄 위에 엎었다.
젖은 줄이 처지자 오작이 집게로 반쪽 표를 새 천 안에 밀어 넣었다.
복면자는 지붕 너머로 달아났지만 표와 구문의 몸은 남았다.
정산은 쫓지 않았다.
두 번이나 등을 보인 자를 놓친 얼굴에는 안도도 승리도 없었다.
정산은 그 표식을 알고 있었다.
가족 탁자에는 주혜와 소하가 함께 앉았다.
주혜는 정산에게 집 안쪽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탁자는 집 문밖에 놓였다.
한쪽에는 구문의 사망 기록, 다른 쪽에는 반쪽 호송표가 봉함된 채 있었다.
정산 앞에는 빈 종이만 놓였다.
"상관 이름보다 당신이 한 동사부터 말해요."
정산의 왼어깨는 감시방 밤 뒤에도 세 번째 회수 방향에서 굳었다.
"나는 아이들의 실제 이름을 죽은 작업명과 바꿔 관문 셋을 통과시켰소. 보호라 불렀지만 아이들은 고를 수 없었소."
주혜는 붓을 들지 않았다.
"바꿨다는 말 사이에 빠진 손이 있어요. 누구 손으로 원래 이름을 지웠어요?"
"내 손으로 명부의 먹을 긁었소."
"누구 손으로 새 이름을 썼어요?"
"처음 두 번은 내가 썼고, 마지막에는 구문이 썼소. 내가 옆에서 관문 순서를 불렀소."
"아이들은 어디에 있었어요?"
"곡물 자루 밑칸에 누워 있었소."
소하의 손이 탁자 아래에서 꽉 쥐어졌다.
"숨이 막힌다고 하면?"
"입을 막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리 내면 죽는다고 겁을 줬다."
"그럼 고르게 한 게 아니잖아."
"그래. 내가 살린다는 말을 앞세워 겁을 고르게 했을 뿐이다."
소하가 물었다.
"아이들을 살린 거야, 판 거야?"
"처음에는 죽을 명부에서 빼냈다. 마지막 호송에서는 누가 그 이름을 샀는지 묻지 않고 넘겼다. 그래서 둘 다 내 책임이다."
"왜 그만뒀어요?"
주혜의 질문은 낮았다.
"마지막 관문 뒤에서 아이 하나가 자기 이름을 돌려 달라 했소. 나는 돌아가면 모두 잡힌다고 했고, 장환은 새 이름이면 다시 팔 수 있다고 했소. 그제야 우리가 다른 명부를 만들었다는 걸 알았소."
"그 뒤 일곱 해 동안 우리에게는 왜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들과 소하가 표적이 될까 두려웠소."
"두려움을 혼자 쥐고 우리 길까지 정했군요."
"그렇소."
정산은 보호였다는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주혜는 그 한마디가 나오지 않은 뒤에야 붓을 들어 그의 문장을 적었다.
"장환은?"
"우리 훈련관이었고 호송표 검수자였소. 내가 떠난 뒤 이름을 대가와 묶었다."
주혜는 울지 않았다.
반쪽 표와 정산 진술을 다른 칸에 적었다.
"현재 살인 혐의와 일곱 해 전 호송은 다른 칸에 적어요.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지우지 못해요."
심연은 옛 동료의 상처 도면을 가져왔다.
"이번에는 호흡 판정을 쓰지 않습니다. 몸 방향과 종이 보관 사슬만 기록합니다."
상처는 왼쪽 갈비에서 들어와 오른 어깨 뒤로 빠졌다.
세 번째 회수 자국은 오른쪽으로 길었다.
정산은 자기 몸을 보였다.
"나는 셋째를 오른쪽으로 되받지 못합니다. 이 상처는 왼쪽에서 들어와 오른쪽으로 빠졌습니다."
E003 통로 도면의 두 접촉은 왼어깨가 멈춘 자리에서 끝났다.
옛 동료 상처에는 그 뒤 오른쪽 회수까지 있었다.
정산 계통을 아는 사람이 낸 상처였지만 정산의 현재 몸이 낸 순서는 아니었다.
한세정이 말했다.
"현재 살인 감시는 좁히되 옛 호송 자복은 별건으로 봉한다."
정산은 무죄라고 말하지 않았다.
반쪽 호송표 아래 자기 이름을 썼다.
주혜가 종이 셋을 꺼냈다.
"이제 우리 조건이에요."
첫째에는 이동길, 둘째에는 접촉 가능한 사람, 셋째에는 소하에게 설명할 위험을 적었다.
주혜는 첫째 종이를 자기 앞으로 당겼다.
"우리가 옮길 때 목적지는 나와 소하가 함께 고릅니다. 당신은 길의 위험을 설명할 수 있지만 먼저 출발시키지 못해요."
소하는 둘째 종이에 구문의 이름을 썼다가 줄을 그었다.
"옛 동료가 찾아와도 나한테 숨기지 마. 만날지는 엄마와 내가 정할게."
셋째 종이는 한동안 비어 있었다.
소하가 붓끝을 깨물다 물었다.
"설명하다가 내가 무섭다고 하면 멈출 거야?"
"멈추고, 언제 다시 들을지 네가 정하게 하마."
"아예 안 듣겠다고 하면?"
정산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선택도 따르겠다. 다만 위험이 바로 닥쳤다면 위험하다는 한 문장은 먼저 말하겠다."
소하는 그 답을 셋째 종이에 적게 했다.
"주혜는 이동길, 나는 만날 사람, 소하는 설명받을 때를 정해요. 당신은 셋을 대신 고르지 마요."
소하가 셋째 종이를 잡았다.
"다음에는 위험한 이름을 숨기지 말고 먼저 설명해 줘. 내가 어디로 갈지 알고 고를래."
정산은 세 조건 아래 차례로 수결했다.
"용서를 청하지 않겠소. 조건을 지키겠소."
주혜는 집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공방·집·장부를 한곳에 두지 않기 위해 빈 상자 셋을 마당에 놓았다.
정산이 빈 상자를 들려 하자 주혜가 막았다.
"오늘은 손대지 마요. 무엇을 어디에 둘지도 우리가 먼저 정할 거예요."
정산은 손을 거두고 문밖 감시방으로 돌아갔다.
현재 살인의 칼길은 그의 몸과 맞지 않았지만 가족이 닫은 문은 그의 옛 손과 정확히 맞았다.
'누명과 죄는 같은 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