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2년 무렵 초여름 첫날 오후, 살아 있는 사내는 유문성이라는 이름부터 밀어냈다.
"유문성은 내가 일곱 해 전까지 쓰던 작업명입니다. 지금 내 이름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군중이 웅성거렸다.
"그럼 시신 이름을 훔친 자가 저놈 아닌가?"
누군가 사내의 삿갓을 쳐 올리려 손을 뻗었다.
사내가 뒤로 물러서자 젖은 짚신이 문턱에 걸렸다.
공방 안에는 봉함한 시신이, 밖에는 그의 얼굴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굴을 보여라. 네가 산 사람인지 어찌 아느냐?"
"호적 이름을 대면 끝날 일 아닌가?"
말은 서로 달랐으나 밀려드는 발은 한 덩어리였다.
주혜는 닥발을 씻을 때 쓰는 긴 발 하나를 가져와 문턱에 가로 세웠다.
젖은 발 사이로 사람들의 얼굴은 비쳤지만 손은 들어오지 못했다.
"발 안쪽은 입회 자리예요. 밖에서는 듣되 손대지 마세요."
장정 하나가 발을 걷어차려 했다.
한세정의 아역이 창대를 눕혀 발 앞을 막았다.
"현령의 입회 중이다. 선을 넘는 자는 이름을 묻기 전에 붙잡겠다."
사내는 삿갓끈을 더 조였다.
주혜는 그에게 빈 나무패 셋을 내밀었다.
물결, 갈대, 빈 원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오늘 심리가 끝날 때까지 쓸 표식이에요. 옛 이름을 안다는 것과 지금 그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니, 하나를 고르세요."
그제야 사내의 어깨가 문에서 떨어졌다.
주혜는 사내의 젖은 손을 보았다.
닥을 뜨던 굳은살은 남았지만 엄지 아래에는 오래된 먹 지운 자국이 있었다.
"지금 불릴 이름은 당신이 정해요. 확인할 것은 옛 이름을 쓴 시기뿐입니다."
사내는 물결 모양 나무패 하나를 골랐다.
"심리 동안에는 이 표식으로 불러 주십시오."
심연이 한세정에게 말했다.
"현재 신원은 별도 봉함하고 유문성 사용 이력만 대조하겠습니다."
한세정은 공방 장부를 모두 관아로 옮기라 명하려 했다.
주혜가 탁자 앞을 막았다.
상급 서리가 한세정보다 먼저 압수표를 펼쳤다.
그 뒤에는 종이를 사러 오던 중개상 둘이 서 있었다.
중개상은 공방 문 위의 거래패를 내리고 있었다.
"살인에 이름 바꿔 치기까지 얽혔소. 장부를 내기 전에는 이 집 종이를 한 장도 받을 수 없다는 게 상류 객점의 뜻이오."
주혜는 내려온 거래패를 보았다.
이번 달 닥껍질 외상값과 작업자 스물셋의 품삯이 그 나무 한 조각에 매달려 있었다.
상급 서리가 말했다.
"원본을 넘기면 관에서 결백을 가려 주겠소. 거부하면 숨기는 것으로 적을 수밖에."
"원본을 싣는 수레가 어느 문을 지나고, 누가 열며, 언제 돌려준다는 칸은 어디 있습니까?"
서리는 압수표를 한 번 훑었다.
그런 칸은 없었다.
"관아 문서에 감히 조건을 붙이나?"
"내 사람들 이름을 싣는 문서라면 붙입니다."
주혜는 거래패를 주워 탁자 아래에 놓았다.
손이 떨렸지만 장부 위에 올리지는 않았다.
"원본은 이 탁자 밖으로 못 나갑니다. 내가 넘길 것은 이름 없는 필적 추출본과 종이 배합표뿐입니다."
"살인 수사보다 공방 장부가 위인가?"
"이름을 다 가져가면 산 사람까지 죽은 명부가 됩니다. 거절한 사람의 이름은 봉하고, 동의한 세 줄만 대조하겠습니다."
심연은 둔한 오른 검지를 소매 안에 두고 잔식청맥법을 다시 쓰지 않았다.
"제지 판단은 주 장인이 하고 필적 위치는 제가 기록하겠습니다. 집행 승인만 나리께 청합니다."
한세정이 탁자 둘과 입회자 넷을 셌다.
"두 시진 제한 대조를 승인한다. 원본 반출은 없다."
주혜는 바닥에 먹줄을 세 겹으로 쳤다.
첫 선 안에는 자신과 물결 표식의 사내만 들어갔다.
둘째 선에는 심연과 한세정, 셋째 선에는 필사 아역이 앉았다.
정산이 물그릇을 들고 다가오자 주혜가 손바닥을 들었다.
"당신은 셋째 선 밖이에요."
"종이 배합은 나도 볼 수 있소."
"당신이 무엇을 아는지는 나중에 물을게요. 오늘은 내가 어느 이름을 보여 줄지 정해요."
정산은 물그릇을 바닥에 놓고 뒤로 갔다.
주혜는 그가 순순히 물러난 일을 고마움으로 적지 않았다.
선 밖에 섰다고만 입회지에 남겼다.
주혜는 호적 초본, 세곡 운송표, 공방 작업자 명부를 서로 다른 천 위에 놓았다.
처음에는 호적 초본만 열었다.
오래 물을 먹은 종이는 귀가 보풀처럼 일었고 유문성의 마지막 획은 번져 앞 글자와 닿아 있었다.
"일곱 해 전에도 이렇게 번졌습니까?"
물결 표식의 사내가 발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은 겨울 수해 뒤 베껴 쓴 것입니다. 내 손은 아닙니다."
주혜는 초본을 닫은 뒤에야 세곡 운송표를 열었다.
표의 닥은 얇고 질겼다.
붓을 급히 세운 곧은 획 아래에는 붉은 봉랍 부스러기가 박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방 명부가 열렸다.
들기름 묻은 손이 수없이 넘긴 귀, 풀 먹은 엄지가 눌러 둔 둥근 획, 닥죽 방울이 말라붙은 자리가 있었다.
이름 하나가 아니라 종이를 다룬 세 삶이 차례로 탁자에 올라왔다.
유문성 세 글자는 모두 달랐다.
호적 초본은 획이 오래 번졌고 세곡표는 관문 서리의 곧은 붓이었다.
공방 명부의 글씨는 손에 풀이 묻은 작업자가 눌러 쓴 둥근 획이었다.
시신 이름표는 넷째 필적이었다.
주혜가 종이 귀를 물에 적셨다.
공방 닥은 짧게 풀렸지만 이름표 섬유는 길게 버텼다.
붉은 세곡 봉랍 가루가 섬유 사이에서 나왔다.
"이 이름표는 우리 배합이 아니에요. 세곡 문서에 쓰는 질긴 외부 닥입니다."
주혜가 다음 표본을 집으려 했을 때 빈 천이 손끝에 닿았다.
이름표에서 잘라 봉함해 둔 종이 귀 한 장이 사라져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세요."
상급 서리가 헛웃음을 냈다.
"보관도 못 한 대조를 믿으라는 거요?"
문밖에서 보던 중개상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표본 하나가 없으면 외부 닥 비교는 주혜의 말로만 남았다.
한세정이 세 겹 먹줄의 출입자를 확인했지만 필사 아역 하나가 물을 길으러 선을 넘은 적이 있었다.
아역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소인이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손부터 뒤지지 마세요."
소하의 목소리가 건조대 아래에서 났다.
아이는 무릎을 꿇고 바닥의 젖은 끈 자국을 보고 있었다.
"봉투를 맨 끈은 물에 젖었어. 훔친 사람이 품에 넣었다면 물이 위로 떨어져야 하는데, 자국은 저쪽으로 끌렸어."
자국은 상급 서리 뒤에 선 중개상의 긴 소매까지 이어졌다.
중개상이 팔을 빼자 젖은 종이 귀가 소매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가 내 소매에 넣었소!"
주혜는 직접 줍지 않았다.
한세정의 아역이 새 집게로 표본을 들어 별도 천에 올렸다.
소매와 닿았다는 사실, 바닥을 끌렸다는 사실, 봉함끈이 풀린 시각을 각각 적었다.
심연이 말했다.
"이 표본은 오염됐으니 배합 결론에 쓰지 않겠습니다. 다만 남은 원봉함과 이름표 전체가 있습니다."
주혜는 이름표의 반대 귀를 잘라 새 물에 담갔다.
긴 섬유와 붉은 가루가 다시 떠올랐다.
훔친 한 장이 없어도 결과는 남았지만 누군가 비교를 깨뜨리려 했다는 흔적도 함께 남았다.
중개상은 마당 끝에 분리됐다.
그는 돈을 받은 적이 없다며 울먹였으나, 누가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물결 표식의 사내가 명부 한 줄을 짚었다.
"이 둥근 글씨는 내가 떠나기 전 직접 쓴 것입니다. 호적 초본은 내 옛 이름이고 세곡표는 운송 때 빌려 쓴 이름입니다."
"시신 이름표는요?"
"처음 봅니다."
주혜는 표 뒤의 풀을 손톱으로 밀었다.
비를 맞은 시신과 달리 풀 안쪽은 아직 미지근하고 마르지 않았다.
"시신이 젖은 뒤에 붙였습니다. 이름이 시신보다 늦어요."
심연은 세 문서의 진위 전체를 판정하지 않았다.
"가짜라고 확정할 것은 시신에 붙은 이 표 하나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현재 이름과 시신의 실제 이름은 아직 모릅니다."
한세정은 유문성 시신이라는 기록에 붉은 선 하나를 긋고 신원 미상으로 고쳤다.
물결 표식의 현재 이름은 봉함 안에 남았다.
정산은 멀찍이서 세곡표 종이를 보았다.
"이 종이는 관문 인계표에도 씁니다. 이름을 바꾼 자는 수로와 관문을 함께 알 겁니다."
주혜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정산은 대답하려다 왼어깨를 눌렀다.
"옛날에 본 적이 있소. 아직은 그 말만 하겠소."
주혜는 남편을 대신 변명하지 않았다.
장부 접근 조건 옆에 정산의 답변 유보도 적었다.
해가 기울 무렵 관차 셋이 공방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앞선 자가 체포령을 펼쳤다.
그들은 현아의 인사도, 봉쇄된 현장의 문턱도 묻지 않았다.
둘은 정산 쪽으로, 하나는 장부 탁자로 곧장 갈라졌다.
칼을 뽑기 전부터 데려갈 사람과 가져갈 물건을 따로 정해 둔 움직임이었다.
"백식방 잔당 유정산을 즉시 압송한다."
봉랍은 아직 손가락에 묻었고 종이는 시신 이름표와 같은 외부 닥이었다.
정산이 맨손을 들었다.
"내가 아는 관문 종이는 이보다 얇습니다. 이 영장은 먼저 종이부터 보십시오."
관차의 손이 칼자루로 갔다.
주혜는 이름이 봉함된 물결패를 사내에게 돌려주고 장부 위 뚜껑을 닫았다.
탁.
오늘 지운 것은 가짜 이름표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를 지운 자리를 메우려고 같은 종이로 만든 권한이 칼을 들고 들어와 있었다.
거래패는 탁자 아래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주혜는 그것을 다시 걸지 않았다.
공방의 하루 벌이를 잃더라도, 살아 있는 사내의 이름을 그 값으로 내놓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벌이를 잃어도, 저 이름까지 팔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