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흔은 숨을 기억한다
6

세 벌의 집

1252년 무렵 초여름 넷째 날 오후, 주혜는 빈 작업대에 상자 셋을 놓았다.

첫 상자에는 붉은 실을 걸었다.

둘째에는 푸른 실, 셋째에는 옛 동료의 반쪽 호송표에서 풀어 낸 흰 삼베실을 걸었다.

주혜는 세 상자의 이름을 한꺼번에 말하지 않았다.

먼저 붉은 실만 탁자 위로 당겼다.

불빛을 받은 실이 피처럼 진해졌다.

정산이 물었다.

"원본을 셋으로 찢는 거요?"

"장부는 찢지 않아요. 쓸모를 나눠요."

주혜는 붉은 상자에 원본을 넣었다.

"원본은 사실을 지키고, 검토 사본은 대조를 받고, 선택본은 증인이 자기 이름을 들고 나가게 해요."

붉은 상자의 뚜껑을 닫자 주혜는 열쇠를 자기 허리에 차지 않았다.

한세정에게도, 심연에게도 건네지 않았다.

"원본 열쇠는 누구에게 둘 셈이오?"

한세정이 물었다.

"나와 작업자 대표가 반씩 가진 인끈을 맞춰야 열게 할 거예요. 관에서 가져가야 하면 두 사람 앞에서 가져가세요."

"도중에 당신이 잡히면?"

"그래서 한 사람에게 다 주지 않는 겁니다."

주혜는 붉은 실 매듭 아래에 작업자 대표의 수결을 받았다.

사실을 지키는 첫 물건은 그제야 탁자에서 내려갔다.

다음에 그녀는 푸른 실을 잡았다.

원본의 이름 칸을 종이띠로 가린 뒤 물길, 관문 시각, 종이 배합만 얇은 사본에 옮겼다.

"이것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경로를 따질 수 있는 장입니다."

심연이 한 줄을 베껴 보였다.

"검토자는 가린 칸을 들출 수 없습니다. 서로 맞지 않는 시각만 붉게 표시합니다."

정산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자 주혜가 푸른 종이를 뒤집었다.

"당신 수결도 가린 칸에 있어요. 대조할 때 당신은 보지 않아요."

"내 손이 맞는지 내가 말할 수 있소."

"그 말 때문에 다른 이름까지 보게 할 수는 없어요."

정산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심연은 둔한 오른 검지를 소매에 넣은 채 붉은 실과 푸른 실의 매듭 수만 기록했다.

"사본마다 누가 열었는지 수결을 붙이겠습니다. 셋을 다시 합쳐야만 전체 이름이 보입니다."

주혜가 푸른 상자 뚜껑을 닫았다.

"오늘부터 종이는 못 팔아요. 공방 장부가 증거가 됐으니까."

마당 밖에서 작업자 둘이 짐을 꾸렸다.

거래가 멈추자 품삯을 기다릴 수 없어 친족 마을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주혜는 붙잡지 못했다.

"붉은 상자는 공방에 두지 않을게요. 푸른 상자는 관아 마당으로 갑니다. 흰 상자는 증인이 정한 길로 가요. 오늘 밤 우리도 셋으로 흩어집니다."

소하가 물었다.

"엄마는 어디 있어?"

"원본 가까이. 너는 네가 고른 곳. 아버지는 어느 길도 정하지 않고 뒤에서 따라와."

정산은 그 배치에서 자신이 가족과 같은 지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이견을 말하지 않았다.

한세정이 봉함 시각 아래 자기 수결을 남겼다.

"그 비용도 현아 기록에 넣겠다. 첫 호송은 증인이 고른 길과 인원만 쓴다. 현아는 경계만 두고 명단은 갖지 않는다."

소하는 세 상자보다 펼친 수로도를 오래 보았다.

정산의 손가락이 가장 먼 친족집을 짚으려다 멈췄다.

흰 삼베실을 맬 차례가 되자 주혜는 빈 선택본부터 살아 있는 유문성 앞에 놓았다.

"먼저 무엇을 공개할지 고르세요. 옛 작업명, 지나온 관문, 떠날 시각 중 하나도 쓰지 않을 수 있어요."

물결패의 사내는 붓을 들지 않고 길부터 물었다.

"육로로 가면?"

한세정이 답했다.

"관문 둘을 거치고 군졸 넷이 붙소. 빠르지만 명단이 두 번 남소."

"수로는?"

주혜가 수로도의 물문을 짚었다.

"밤에 한 번만 확인패를 보여요. 대신 배가 막히면 물 위에서 숨을 곳이 적어요."

사내는 정산을 보았다.

"백식방이 쫓는다면 어느 쪽이 낫소?"

정산은 지도 위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육로는 길이 드러나고 수로는 몸이 드러납니다. 어느 쪽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소. 내가 아는 건 백식방이 큰 길보다 교대 시각을 먼저 산다는 것뿐이오."

"그럼 수로를 고르겠소. 시각은 배가 떠난 뒤 적으시오."

주혜는 그 선택을 되묻고 사내의 수결을 받았다.

주혜가 소하에게 말했다.

"친족집은 멀지만 길이 하나야. 관아는 군졸이 많지만 누가 드나드는지 다 보여. 수차 정비소는 시끄럽고 젖어 있지만 물문 둘과 뒤 길이 있어. 아무 데도 완전히 안전하지 않아."

소하가 정산을 보았다.

"아버지는 어디가 좋아?"

"내가 고르면 또 네가 모르는 값을 숨기게 된다. 네가 물으면 아는 것만 답하마."

"수차 정비소로 갈래요. 물문 둘과 뒤쪽 좁은 길을 내가 알아요."

정산은 친족집 위에서 손을 거두었다.

"길은 당신들과 증인이 정하시오. 나는 보이는 뒤만 맡겠소."

주혜는 그 말을 용서로 적지 않았다.

후위 한 사람, 길 선택 없음이라고 조건표에 썼다.

검토 사본을 넘기던 심연이 종이 한 귀를 들어 보였다.

푸른 사본에는 없던 먹빛이 흰 선택본에서 번졌다.

빠진 아이 칸에만 겹친 원 둘과 끊긴 셋째 획이 배어 나왔다.

정산의 옛 동료가 쥐었던 호송표의 검수 표식과 같았다.

"왜 원본이 아니라 이 사본에만 있죠?"

심연이 종이 결을 빛에 비췄다.

"원본 위에 얇은 종이를 놓고 눌러 쓴 자국입니다. 누군가 아이 이름이 옮겨질 때 드러나게 했습니다."

주혜는 장환이 집을 덮치지 않은 까닭을 알아차렸다.

"우리를 살려 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어느 이름을 누구에게 들려 보내는지 기다린 거예요."

소하는 흰 상자의 바닥을 햇빛 쪽으로 기울였다.

삼베실 아래에 가루 같은 푸른 점이 일렬로 붙어 있었다.

"이건 먹이 아니야. 손에 묻으면 반짝여."

주혜가 종이 조각으로 가루를 받아 물에 띄웠다.

남빛은 가라앉았지만 이것은 기름처럼 떠서 흰 종이마다 작은 별을 만들었다.

정산이 냄새를 맡지 않고 멀리서 보았다.

"등잔 기름에 조개가루를 탄 추적 표식이오. 밤에 불을 비추면 물 위에서도 보입니다."

한세정이 선창 경비를 불렀다.

"누가 상자에 손댔나?"

"봉함 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혜가 삼베실 매듭을 풀지 않은 채 상자를 돌렸다.

가루는 매듭 위가 아니라 바닥 못 주위에서 번져 있었다.

"상자를 만들 때 이미 발랐어요. 우리가 흰 상자를 고를 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어느 상자가 선택본이 되든 나중에 표시할 수 있게 못마다 발라 둔 거예요."

선택을 보호하려 만든 상자가 선택을 알리는 표지가 돼 있었다.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내가 고른 수로를 버려야 합니까?"

정산이 대답하려 했으나 주혜가 먼저 물었다.

"가루를 지우고 같은 길로 갈 수도 있고, 길을 다시 고를 수도 있어요. 지금 안 떠나도 됩니다."

사내는 물결패를 쥐었다.

"상자는 바꾸고 수로는 그대로 가겠소. 저들이 내가 겁먹어 육로로 갈 거라 생각하게 빈 상자를 먼저 보내시오."

한세정은 그 선택을 승인했다.

새 흰 상자는 작업자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까지 씻은 곡물 궤로 바뀌었다.

추적 가루가 남은 빈 상자는 선택본보다 반 시진 먼저 다른 나룻배에 실렸다.

주혜는 물건 하나가 달라졌다는 이유로 사내의 첫 수결을 그대로 쓰지 않았다.

새 상자, 빈 배 미끼, 실제 배의 물문 은신을 다시 읽고 두 번째 수결을 받았다.

첫 증인은 살아 있는 유문성이었다.

그는 현재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자기 옛 작업명과 관문 시각만 흰 선택본에 남겼다.

"내가 고른 칸만 배에 싣겠소. 다른 아이 이름은 보지 않겠소."

그가 적은 것은 옛 작업명 한 줄과 지나온 관문 시각 둘뿐이었다.

현재 이름 칸에는 물결 표식을 그렸다.

주혜는 빈칸을 메우지 않고 그 주위에 봉함선을 둘렀다.

주혜가 물었다.

"추적당할 수 있어요. 그래도 지금 떠날래요?"

"남으면 내 선택까지 또 누가 대신 적을 거요. 떠나겠소."

주혜는 흰 삼베실을 그가 보는 앞에서 묶었다.

"증인이 고른 이름만 싣고, 심 검법관이 확인패를 적고, 한 현령이 길을 승인해요. 정산은 뒤만 봐요."

심연은 확인패에 목적지를 쓰지 않고 첫 물문까지만 적었다.

한세정은 경계 군졸에게 증인의 표식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배를 지키되 탄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마라. 첫 물문 뒤의 길은 증인과 주 방주가 정한다."

군졸 하나가 난색을 보였다.

"목적지도 모르고 어떻게 호위합니까?"

"모르는 범위까지가 오늘 너희 임무다."

나룻배가 물살을 받았다.

물꾼 넷은 두 번씩 숨을 내쉬며 노를 바꿨다.

첫 증인과 흰 상자는 선창 경계를 벗어났다.

한세정의 군졸은 약속한 표지석에서 멈췄다.

정산도 앞길을 고르지 않고 물가 후위에 남았다.

반 시진 먼저 떠난 빈 배 쪽에서 횃불 둘이 움직였다.

누군가 추적 가루를 보고 둑길을 달리는 것이 분명했다.

미끼는 먹혔으나 모두가 속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 배가 첫 물문 그림자에 들 때 다리 아래에서 기침이 한 번 났다.

정산은 배 안 사람 수를 다시 세었다.

물꾼 넷, 증인 하나.

그런데 물 위에 겹친 숨은 여섯이었다.

정산의 왼어깨는 아직 후위에서 걷는 일만 허락했다.

첫째 숨, 둘째 숨.

노 두 쌍이 번갈아 물을 갈랐다.

찰박, 찰박.

일곱 번째까지 맞던 박자가 여덟 번째에서 비었다.

수차 굉음 아래 다른 숨 하나가 그 빈자리를 대신 채웠다.

정산은 그 숨을 누구의 것이라 단정하지 않았다.

다만 후위에 선 손을 들어 배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보호를 위해서라며 앞길을 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매복을 알아본 순간에도 바뀌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약속을 내가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