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41년 오월 하순.
보름이 지나 있었다.
빗장을 고치고 나서 곳간의 셈을 다시 맞췄다고 했다.
물어본 것이 아니라 두칠(斗七)이 먼저 말했다.
"또 어긋났어요."
위경은 걸음을 멈췄다.
"얼마나요."
"이번엔 서 되요."
두칠이 새로 단 빗장 조각을 내밀었다.
못 둘 사이가 얕게 갈라졌고 갈라진 결 안쪽만 푸르게 식어 있었다.
"이건 언제 났어요?"
"어젯밤엔 없었어요. 아침에 문 열다가 찾았고요."
"손대신 사람은요."
"저하고 순찰 무인 둘이요. 저는 이런 자국 못 만들어요."
위경은 조각을 뒤집었다.
눌림은 한 점이 아니라 결 다섯 줄에 퍼졌다.
ep-001의 됫박과 같은 청람경 흔적이었다.
이번에는 나무가 아직 차가웠다.
"이걸 판에 가져가세요. 천으로 감고, 맨손으로 만지지 마세요."
"가져가면 달라져요?"
"봉함받으면 달라질 수 있어요."
두칠은 답 대신 앞치마를 벗어 조각을 감쌌다.
"…물목은요."
"똑같아요. 그 손이에요. 글씨 큰 거요."
두칠이 됫박을 내려놓았다.
손을 옷에 문지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럴 여유도 없어 보였다.
"사흘 뒤에 마당에 서래요."
"…두 번째네요."
"예. 두 번째면 다르대요."
"어떻게 다른데요."
"한 번은 실수고 두 번은 버릇이래요."
두칠이 곳간 문을 닫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곳간에서 뺀대요. 삯 말고요."
위경은 그 말의 크기를 셌다.
곳간에서 빠지면 두칠은 스물두 해 해 온 일을 잃는다.
그 자리 말고 그가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서 되는 언제 어긋난 거예요?"
"모르죠. 빗장 고치고 다시 세니까 나온 거예요."
"고치기 전에는 몰랐고요."
"몰랐어요. 빗장이 헐거우면 셈이 안 맞아도 그런가 보다 해요."
"…그럼 헐거운 동안 건 다 어떻게 돼요."
"그것도 제 거예요."
두칠이 됫박을 한 번 털었다.
"헐거운 걸 고쳐 달라고 한 것도 저고, 안 고쳐진 동안 어긋난 것도 저예요."
"작년 가을에 말씀하셨잖아요."
"했죠. 순서가 안 왔을 뿐이고요."
"그건 기재돼 있어요?"
"…모르겠어요. 저는 못 읽으니까요."
위경은 그 말을 받아 두었다.
오늘 쓸 자리가 아니었다.
"물목 적은 사람은요."
"이름 없어요. 저번이랑 똑같아요."
"…그건 다툴 수 있어요."
두칠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가요."
위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못 해요. 저번에도 못 했고요."
"…예."
"그러니까 그냥 두세요."
두칠이 그렇게 말하고 갔다.
원망이 아니었다.
셈이었다.
사흘이 있었다.
위경은 그 사흘 동안 자격을 빌릴 사람을 찾았다.
문서방에는 가지 않았다.
위목(韋穆)은 강등된 뒤로 원부를 볼 수 없다.
자격도 없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자격을 빌릴 수는 없었다.
방계 가운데 셋을 찾아갔다.
첫째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둘째는 열어 주고 듣기만 했다.
"이름을 얹으라는 말인가."
"청구인이 되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자네 이름은 요새 어디에나 있더군."
"…예."
"거기에 내 이름을 나란히 놓으라고."
셋째는 말이 짧았다.
"나는 딸이 없네만, 위연 장로 딸 이야기는 들었네."
문이 닫혔다.
이튿날 하씨(河氏)를 마주친 것은 안채 앞이었다.
피할 자리가 없었다.
"곳간 건 들었죠."
"…예."
"서 되예요. 지난번이랑 합치면 여덟 되고요."
"예."
"둘째 날 마당에서 정리해요. 그날로 닫을 거예요."
하씨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관여할 생각이면 미리 말해 두는데요."
"…"
"그쪽은 그 판의 당사자가 아니에요."
"압니다."
"알면 됐고요."
하씨가 지나갔다.
열쇠 소리가 멀어졌다.
짤랑.
판은 이튿날 진시에 열렸다.
멍석이 깔렸고 두칠이 섰다.
위경은 늘 서던 자리에 섰다.
담과 멍석 사이 한 뼘 되는 자리였다.
물목이 낭독되었다.
초순 것과 이번 것 둘 다였다.
두 장 모두 글씨가 컸고 두 장 모두 적은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두칠은 앞치마에 싼 빗장 조각을 냈으나 봉함인이 없다는 이유로 물목과 다른 자리에 놓였다.
"기재에 이름이 없으면 다투지 못한다는 제22조입니다."
남헌(南憲)이 그렇게 읽었다.
열흘 전에도 읽은 문면이었다.
"두 번째이므로 반복된 손실은 자리에서 뺀다는 제27조가 함께 붙습니다."
두칠이 무릎을 조금 낮췄다.
"할 말이 있습니까."
"저는 적힌 대로 넣었어요."
"그것은 지난번에도 들었습니까."
"…적힌 대로 넣었습니다."
같은 문장이 두 번 나왔다.
위경은 그 소리를 알고 있었다.
막손(莫孫)이 마당에 엎드리기 전에 내던 소리와 같았다.
그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지 않았고 감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기가 무언가를 했다고 여겼다.
여기가 갈림길이었다.
말하면 판이 흔들린다.
흔들린 판은 흔들리게 만든 쪽을 벌한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열여덟 해 동안 그 마당에서 배운 것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그리고 말하지 않으면 두칠이 곳간에서 빠진다.
위경은 한 걸음 나섰다.
"물목을 적은 사람의 이름을 물어 주십시오."
마당이 조용해졌다.
남헌이 고개를 들었다.
"발언한 사람의 자격을 확인합니다."
"방청인입니다."
"방청인은 판에 관해 물을 뿐 개입하지 않습니다."
"물었을 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물음의 형식을 취했으나 내용은 청구이며, 청구는 자격 있는 자만 합니다."
남헌이 문서함을 열었다.
"방청인이 판에 개입한 것으로 제19조를 기재합니다."
붓이 움직였다.
위경은 그 붓을 보았다.
그의 말은 근거가 되지 못했고 물음으로도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개입이라는 두 글자였다.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없었다.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없습니다."
다른 장로가 상석에서 몸을 앞으로 냈다.
"방청인이 저 가노 편을 드는 것이오?"
"…"
"둘이 말을 맞춘 것 아니오."
"아닙니다."
"아닌 것을 무엇으로 아나."
위경은 답할 수 없었다.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기재가 없었다.
"그러면 아닌 것으로 세지 못하오."
남헌이 문면을 짚었다.
"공모의 유무는 정하지 않으며 정하지 않은 것은 기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입은 기재되었으므로 그에 따른 처분은 붙습니다."
"저 가노 처분은 어찌 되오."
"제27조에 개입이 얹히면 자리 박탈에 매가 더해지지요."
위경은 그 말을 들었다.
그가 한 걸음 나서기 전에 두칠의 처분은 곳간 박탈이었다.
한 걸음 나선 뒤에 매가 더해졌다.
"…장로님."
"방청인은 더 발언하지 않습니다."
"제 발언 때문이면 제 쪽으로만—"
"방청인은 더 발언하지 않습니다."
같은 문장이 두 번 나왔다.
남헌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화가 기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위경은 입을 다물었다.
다물어야 두칠의 처분이 더 무거워지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던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자리에서 말했고 이제 다시 다물었다.
처분이 읽혔다.
두칠, 곳간 박탈과 매 스무 대.
방청인 위경, 제19조 위반으로 매 스무 대.
두칠이 먼저 엎드렸다.
세는 소리가 마당에 났다.
위경은 눈을 감지 않았다.
열네째에서 두칠이 소리를 냈다.
스물까지 갔다.
일어서지 못해 가노 둘이 부축해 나갔다.
그다음이 위경이었다.
옷을 벗고 엎드렸을 때 흙이 차가웠다.
열여덟 해 동안 이 마당을 보아 왔고 마당의 흙을 이렇게 가까이 본 적은 없었다.
첫 대는 소리가 먼저 왔다.
그다음에 아팠다.
여섯째쯤에서 셈이 흐트러졌다.
그는 세려고 했다.
세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었고 세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열둘까지 세고 나서 숫자가 흩어졌다.
스물까지 갔다.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가노 하나가 팔을 잡았다.
뿌리치지 않았다.
숙사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다.
사흘을 걷지 못했다.
엎드려 있는 동안 그는 여러 번 셈을 다시 했다.
말하지 않았으면 두칠은 곳간에서 빠지고 매는 없었다.
말했으므로 두칠은 곳간에서 빠지고 매를 맞았다.
그가 한 일의 결과는 매 스무 대였다.
두칠의 것과 자기 것을 합해 마흔 대.
그것이 전부였다.
판이 없었으므로 그것이 전부였다.
나흘째에 붓을 잡았다.
엎드린 채로 적어야 해서 획이 흔들렸다.
두칠(斗七).
대력 41년 오월 스무여드레.
곳간 박탈과 매 스무 대.
그중 스무 대는 내 말 때문이다.
적고 나서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위경(韋擎).
같은 날.
매 스무 대.
판 없이 말했다.
두 줄을 나란히 두고 보았다.
명부의 다른 이름들은 그가 이겼을 때 생긴 것들이었다.
이번 것은 졌을 때 생겼다.
졌을 때가 더 비쌌다.
그는 그 문장을 적지 않았다.
적지 않아도 다음에 잊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문이 한 번 열렸다.
위성(韋晟)이 혼자 들어왔다.
검은 문밖에 두었고 오른손에는 흰 천 꾸러미가 있었다.
"몸은 어떤가."
"걷지는 못합니다."
"그렇군."
위성이 꾸러미를 방바닥에 놓았다.
두칠의 빗장 조각이었다.
천 매듭 위에 그의 무맥인과 남헌의 먹 인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판이 닫힌 뒤 봉함했네. 오늘 처분은 못 돌려. 닫힌 판을 내 검으로 열면 자네가 한 일하고 다르지 않으니까."
위경은 꾸러미를 보았다.
"왜 봉함하셨습니까."
"자네가 맞으면서까지 가리킨 게 무엇인지는 남아야 하잖아."
위성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변명도 사과도 아니었다.
"봉검고에 둘 걸세. 자네 소지가 되면 안 되니까."
위성은 일어섰다.
문을 나가기 전에 잠시 멈췄으나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처분은 그대로였고 물증은 남았다.
이번 실패는 전부 잃지는 않았다.
그 차이가 다음 판을 만들 수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모른다고 저 조각까지 버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