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법(家法)
4

마지막 권과 봉검령

대력(大曆) 41년 삼월 그믐.

닷새가 지나 있었다.

객사의 숨소리가 달라진 것은 새벽부터였다.

들이쉬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쉬고 나서 다음까지가 더 길어졌다.

위경(韋擎)은 물그릇을 오른쪽에 놓고 그 간격을 셌다.

"어르신."

"…응."

"오늘은 좀 어떠세요."

"물었잖아. 어제도."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여쭤야죠."

조율(曺律)이 눈을 조금 떴다.

흰자에 노란 기가 돌았다.

"…똑같아."

"약 데워 올게요."

"됐어."

"드셔야 해요."

"안 들어가."

위경은 약사발을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감나무요."

"응."

"꽃이 폈어요. 작년보다 이르대요."

조율이 웃으려다 말았다.

웃는 데도 숨이 드는 모양이었다.

"…봤어?"

"아침에 지나면서 봤어요."

"몇 송이."

"세지는 않았는데요. 이따 세어 볼게요."

"세 봐."

"…예."

방이 조용해졌다.

창틀 그림자가 어제보다 짧았다.

"어르신."

"응."

"하나만 여쭐게요."

"…해."

"그 책들요. 제가 어떻게 해야 돼요."

"네가 정해."

"저는 모르겠는데요. 정할 만큼 아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네가 정하는 거야."

위경은 잠시 말을 골랐다.

고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우라고 하신 분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했지."

"누구예요."

조율이 숨을 한 번 쉬었다.

들이쉬는 데 오래 걸렸다.

"거기 적혀 있어."

"어디에 적혀 있어요."

"…끝장."

"지금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말하면 네가 내 말을 듣는 거고. 읽으면 네가 읽은 걸 아는 거야."

"…그게 그렇게 다른 거예요?"

"있지."

조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낮아진 만큼 또렷했다.

"말은 시키는 거고 글은 남기는 거야.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안 시켜."

위경은 그 말을 받아 두었다.

오래 두고 볼 말이었다.

"그럼 하나만 더요."

"…해."

"제가 안 하면 어떻게 돼요."

"아무 일도 안 나."

"아무 일도 안 나는 게 다예요?"

"그게 제일 무서운 거야."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위경은 반년 동안 하지 않은 말을 그 자리에서 꺼냈다.

지금 아니면 물을 자리가 없었다.

"어르신."

"응."

"왜 저예요."

조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경은 두 번 묻지 않기로 한 자기 규칙을 그날은 접었다.

"물 나르는 사람은 저 말고도 있었잖아요. 왜 저한테 서궤를 열어 두셨어요."

숨이 한 번 길게 들어갔다가 나왔다.

"…물그릇."

"예."

"오른쪽에 놨잖아."

"그건 어르신이 그렇게 놓으라고—"

"안 그랬어."

위경의 손이 멎었다.

"말한 적 없어. 한 번도."

조율이 팔을 조금 움직였다.

물그릇 쪽이었다.

손끝이 그릇에 닿았고 그릇이 손가락 하나만큼 왼쪽으로 갔다.

"…처음 온 날 네가 오른쪽에 놨어. 내가 안 고쳤고."

"그게 왜요."

"오른손잡이는 오른쪽에 놔. 왼손 쓰는 사람 앞에서도."

"어르신 왼손잡이세요?"

"아니."

"…그럼 맞게 놓은 거잖아요."

"맞게 놨지. 근데 안 물었잖아."

"…물어야 했어요?"

"아니. 물었으면 안 골랐어."

"…"

"반년 동안 한 번도 안 물었지. 왜 오른쪽이냐고."

"…한 번도 안 물었어요."

"그래서야."

위경은 그 말을 받지 못했다.

받을 말이 없었다.

조율의 시선이 서궤 쪽으로 갔다.

아래 단이었다.

손가락이 그쪽을 가리키다 내려왔다.

"…아래."

"아래 단 말씀이세요?"

"…"

"어르신."

대답이 없었다.

"어르신."

숨의 간격이 한 번 더 벌어졌다.

그다음이 오지 않았다.

위경은 손목을 잡아 보았다.

그다음에 목을 짚어 보았다.

두 번 다 같은 답이었다.

방 안이 아까와 똑같았다.

창틀 그림자도 똑같았고 물그릇도 손가락 하나만큼 왼쪽으로 간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한 사람이 없었다.

위경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서궤를 보았다.

열려 있었다.

스물세 권이 세 단으로 그대로였다.

조율이 살아 있는 동안은 조율의 짐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위경은 그 셈을 하고 나서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옮기면 그 순간부터 은닉이 된다.

은닉은 발각되면 기재되지만 발각되기 전에는 어디에도 없는 죄다.

그는 어디에도 없는 죄를 지을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두었다.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감나무 아래를 지날 때 꽃송이를 세지 않았다.

죽음을 알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노 하나가 안채로 가고 다른 하나가 정청으로 갔다.

위가의 사람이 아니므로 문상은 없었다.

시신은 그날 오후에 옮겨졌다.

객사에는 짐만 남았다.

시신이 문을 나가기 전에 봉검대의 쇳종이 세 번 울렸다.

쨍, 쨍, 쨍.

위성(韋晟)이 무인 둘과 객사로 왔다.

검은 삼끈으로 묶인 채였고 오른손에는 청동 봉검패가 들려 있었다.

"도가에서 맡긴 파손 병기 기록 한 장이 없어졌네. 외부 무맥이 찍힌 문서라 객사와 병기고 물목을 오늘부터 다시 봉하겠어."

위성은 조율의 시신 앞에서 웃지 않았다.

문턱을 넘지도 않았다.

"어르신 물건은 자네가 정리하지?"

"예."

"내일 진시 전에 물목을 내게. 무맥이 찍힌 종이와 병기는 따로 두고. 다른 건 손대지 않겠네."

"무맥이 찍힌 종이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흔적이 있으면 전부. 읽지는 않고 봉함만 하지."

말은 정확했다.

판례집을 노린 명령이 아니었다.

그래서 피할 구멍도 없었다.

위성이 청동패를 문설주에 대고 청람경을 흘렸다.

낮은 쇳소리가 났다.

패 아래 나무가 푸르게 식었다.

"이걸 떼면 흔적이 남네. 유품 정리는 자네 혼자 하되, 반출은 안 돼."

내일 진시까지였다.

유품 정리는 위경에게 맡겨졌다.

반년 동안 물을 나른 사람이 그였다.

달리 맡을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낮에 다시 객사로 갔다.

옷은 두 벌이었다.

회색 도포와 솜을 덧댄 조끼.

수정 조각 하나.

붓 두 자루.

그리고 서궤.

위경은 아래 단부터 꺼냈다.

일곱 권이었다.

조율의 손가락이 가리킨 자리였다.

일곱 권 가운데 맨 아래 것이 스물세 권째였다.

등의 글자를 확인하고 마지막 장을 폈다.

끝장의 먹이 본문과 달랐다.

더 검고 덜 삭았다.

본문보다 나중에 적은 글씨였다.

획이 떨렸다.

위경은 읽었다.

이 스물세 권은 공의회(公議會) 대력 십일 년부터 삼십오 년까지의 판례이며 대력 삼십오 년 시월 공의회 전원 의결로 소각이 정해졌다.

의결의 사유는 판례를 대조한 결과 공의회가 같은 조문을 서로 다르게 적용해 온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소각을 집행할 자로 형명가 조율이 지명되었다.

집행하지 아니하였다.

물려받는 자는 공의회를 다시 세운다.

세우지 못하면 태운다.

어느 쪽도 하지 아니할 경우 이 기록은 다시 서른 해를 숨어 지낸다.

공의석 한 칸에 읽는 자와 봉하는 자를 다른 이름으로 세우면 시작으로 친다.

같은 손에 둘을 맡기지 않는다.

위경은 그 장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태우라고 한 것은 누구도 아니었다.

기구 자신이었다.

판례가 기구의 일관성 없음을 증명했기 때문에, 기구는 증명을 없애기로 의결했다.

위가가 제7조에서 한 일과 같았다.

규모만 달랐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그제야 정확히 알았다.

힘이 아니었다.

무기도 아니었다.

한 기구가 스스로를 지우려 한 기록이었고 그것을 지우지 않은 한 사람의 불복이었다.

그리고 그 불복이 서른 해 만에 물그릇 위치 하나로 넘어왔다.

위경은 마지막 장을 덮었다.

덮고 나서도 한참 손을 얹고 있었다.

정청에는 저녁에 갔다.

남헌(南憲)이 문서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문서방 쪽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으나 위경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장로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물으십시오."

"오늘 객사에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형명가 조율입니다."

"들었습니다."

"기재는 어느 대장에 오릅니까."

남헌이 문서함에서 손을 뗐다.

"오르지 않습니다."

"…어느 항목에도 오르지 않습니까."

"객사의 손님은 위가 사람이 아닙니다. 가내 기재의 대상이 아닙니다."

"관아에는 갑니까."

"연고가 있으면 갑니다. 연고가 없으면 매장 기록만 남습니다. 그것은 위가의 기재가 아닙니다."

위경은 다음 물음을 반 박자 늦게 놓았다.

"그러면 이 집에는 그 사람이 왔다는 것도 죽었다는 것도 남지 않습니까."

"들어온 날의 객사 배정은 남습니다. 나간 날은 남지 않습니다."

"…나간 날은 남지 않습니다."

위경이 그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남헌은 되풀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제가 청하면 오릅니까."

"청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연고가 아니십니다."

"반년 동안 시중을 들었습니다."

"시중은 연고가 아닙니다."

"연고는 무엇으로 정합니까."

"혈속이거나 문중이거나 계약입니다."

"셋 다 아니면 아무도 청할 수 없습니까."

"청할 사람이 없으면 청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의 항목도 아닙니다."

남헌이 문서함을 덮었다.

덮는 손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그렇습니다."

위경은 물러섰다.

오늘도 반걸음이었다.

"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 그는 안쪽 장부에 새 줄을 적었다.

조율(曺律).

대력 41년 삼월 그믐.

객사에서 죽음.

위가 기재 없음.

나간 날은 남지 않음.

적고 나서 그 아래를 한 칸 비웠다.

비운 자리에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생모도 이 집에서 죽었다.

그때 네 살이었다.

죽음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열여덟 해 동안은 어머니 한 사람의 일로만 알았다.

같은 조문이었다.

어머니가 서자의 어미여서가 아니었다.

위가 사람이 아니어서였다.

그리고 조율도 위가 사람이 아니었다.

이 집은 안 적는 것이 아니었다.

적을 자리를 만들지 않은 것이었다.

위경은 비워 둔 칸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아직 적을 말을 찾지 못했다.

객사로 돌아왔을 때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서궤는 그대로였다.

스물세 권도 그대로였다.

문설주의 봉검패는 밤공기보다 차가웠다.

이제 그것을 옮기는 사람도, 두는 사람도 하나뿐이었고 시각은 진시 하나뿐이었다.

위경은 문지방 안쪽에 앉았다.

문지방 바깥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넘기지 않았다.

감나무 꽃은 열한 송이였다.

나오면서 세었다.

공의석은 하나면 시작이었다.

그 한 칸은 봉검대에서 삼십 년째 비어 있었다.

'빈칸 하나면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