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大曆) 41년 삼월 초순.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정청(政廳) 마당에는 아침부터 멍석이 깔렸다.
남쪽의 위가 봉검대(韋家 封劍臺)에는 수련을 마친 검 열두 자루가 삼끈에 묶여 있었다.
짤랑.
무공 때문에 생긴 다툼은 저 돌 위에 올랐고 가노의 다툼은 흙 위에서 끝났다.
위경(韋擎)은 늘 서던 자리에 섰다.
마당의 동쪽 끝, 담과 멍석 사이의 한 뼘 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는 당사자의 등과 장로들의 얼굴, 봉검대 입구까지 동시에 보였다.
열여덟 해 동안 그가 알아낸 것 중 가장 쓸모 있는 것이었다.
오늘 마당에 선 사람은 곳간을 지키는 가노 두칠이었다.
물목에 적힌 것과 곳간에 있는 것이 닷 되만큼 어긋났다고 했다.
증거로 나온 됫박의 테가 안쪽으로 손톱 하나만큼 우그러져 있었다.
두칠은 아침 내내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적힌 대로 넣었습니다."
위경은 됫박의 테를 보았다.
손으로 찌그러뜨린 자국이 아니었다.
나뭇결 다섯 줄이 한꺼번에 눌려 있었다.
눌린 자리만 물기 없이 푸르게 식었다.
위가의 가전 심법 청람경(靑藍勁)이 결을 타고 퍼질 때 남는 흔적이었다.
흔적은 사흘이면 사라졌다.
무맥인(武脈印)과 함께 봉함하지 않으면 사람을 가리키지도 못했다.
위경은 열두 해 방청하며 그것을 배웠다.
배우지 못한 것은 내력을 쓰는 법이었고 받지 못한 것은 봉함을 청할 자격이었다.
닷 되의 곡식을 저 됫박으로 나누면 마지막마다 빈틈이 생겼다.
두칠은 적힌 횟수만큼 떴을 것이다.
들어간 양만 적었을 뿐이었다.
장로 넷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위경은 그들의 손부터 보았다.
남헌(南憲)의 왼손 엄지에는 낡은 옥가락지가 있었다.
그 손은 오늘 아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목을 언제 받았습니까."
"초이레 아침입니다."
"곳간을 언제 열었습니까."
"같은 날 낮입니다. 열고 바로 넣었습니다."
"넣은 것을 누가 보았습니까."
두칠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마당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혼자 넣었습니다."
"본 사람이 없으면 물목과 곳간만 남습니다. 둘이 어긋나면 어긋난 만큼을 지킨 자가 뭅니다. 제22조입니다."
남헌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크지 않은데 마당 끝까지 왔다.
두칠이 무릎을 조금 낮췄다.
"물목이 틀렸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틀렸다면 적은 사람이 뭅니다. 적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기재에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 기재는 다투지 못합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물목만이 아니었다.
됫박을 누른 무맥도 이름이 없었다.
위경은 입을 열지 않았다.
방청인은 판에 관해 물을 수 있으나 증거를 올리지 못했다.
지금 됫박을 가리키면 흔적이 아니라 개입만 기재될 터였다.
위경은 세었다.
닷 되면 두칠의 반년 삯이었다.
그는 그 숫자와 됫박의 세 겹 눌림을 머릿속의 다른 자리에 옮겨 두었다.
오늘 적을 자리가 아니었다.
판이 닫히자 가노 하나가 됫박을 들고 갔다.
아침 볕이 닿은 푸른 자국이 벌써 옅어져 있었다.
위경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알아도 붙잡을 수 없는 증거가 그의 눈앞에서 식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위성(韋晟)이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걸음이 빨랐고 문을 먼저 여는 사람 특유의 각도로 어깨가 앞서 있었다.
그가 위경을 보았다.
"자네 거기 있었나. 뒤에 서면 안 보이지."
위경은 대답하지 않고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리 오게. 자리 있어."
당사자석이었다.
멍석의 남쪽, 장로들과 마주 보는 자리.
위성은 그것이 어떤 자리인지 말하지 않았다.
아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이 이미 마당에 나갔다.
사양하면 두 번째 소리가 남았다.
위경은 한 걸음 나섰다.
남헌이 문서함을 한 번 여닫았다.
"권하신 자리는 당사자석입니다."
위성이 돌아보았다.
웃는 얼굴이었다.
"내 아우요."
"서자는 당사자가 되지 않습니다. 제7조입니다."
위성의 웃음이 조금 얕아졌다.
"장로님. 오늘 판은 이미 끝났습니다. 자리 하나 앉는 걸 조문까지 드실 일입니까."
"판이 끝난 자리에 앉는 것도 앉는 것입니다."
"내가 권했습니다. 책임은 내가 지지요."
"권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조문은 없습니다. 앉은 사람에게 묻는 조문만 있습니다. 제7조 둘째 항입니다."
위성이 한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만 손이었다.
"…그 둘째 항은 나도 모르는데."
"벽에 있습니다."
상석에서 다른 장로가 헛기침을 했다.
"남 장로, 문면을 읽으시오. 말이 길어질 일이 아니오."
남헌은 사람을 보지 않았다.
문서함을 한 번 여닫은 뒤 문면을 보고 읽었다.
"서자는 고발인이 될 수 없다. 서자가 입은 손해는 손해로 적지 아니하고 사정으로 적는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흩어지던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멈췄다.
두칠도 무릎을 편 채로 서 있었다.
가노들까지 그 문면을 들었다.
위경은 나섰던 한 걸음을 도로 물렸다.
물리는 데는 걸음이 필요하지 않았다.
발이 아직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잘못 알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문법이 흠 없었다.
흠 없는 문법은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갑옷이었다.
갑옷을 입는 데는 값이 들지 않았다.
위성이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잠시 뒤 그가 위경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가 언짢을 일은 아니야. 규정이 그렇다는 거지."
"예."
"다음엔 내가 먼저 물어보고 부르지."
"예."
"자네도 참,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 내가 뭐 무섭나."
"…아닙니다."
"거봐. 그러니까 뒤에 서지 말고."
위성은 웃었고 웃음에 계산이 없었다.
위경은 그것을 보았다.
악의였다면 셈이 쉬웠을 것이다.
그는 오른손 검지로 허벅지에 획을 하나 그었다.
대력 41년 삼월 초순.
정청 마당.
남헌이 제7조를 낭독함.
방청 가노 열아홉.
위성이 부름.
머릿속 장부는 압수되지 않았다.
그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중 열여덟 해가 그 장부였다.
물 당번 시각이 이미 지나 있었다.
객사(客舍)는 담의 북쪽 끝, 감나무 뒤에 있었다.
위경이 물통을 내려놓았을 때 안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두 번 나고 멎었다.
"늦었어요."
문을 열자 조율(曺律)이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늘 같은 자리였다.
벽에 등 자국이 남아 있었다.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됐고. 저 감나무 말이야."
조율이 창 쪽으로 턱을 조금 움직였다.
"작년엔 하나도 안 열렸어. 올해는 열릴 것 같아?"
"모르겠어요. 가지는 작년보다 굵던데요."
"굵다고 열리면 나도 열렸지."
위경은 물그릇을 오른쪽에 놓았다.
조율이 그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치가 맞았다는 뜻이었다.
"왜 늦었는데."
"재판이 길었어요."
"뭐로 길어."
"곳간 물목이요. 닷 되."
조율이 눈을 조금 떴다.
"이십이조."
"…예. 어떻게 아세요."
"곳간이면 이십이조지. 다른 게 있나."
조율은 물그릇을 들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만 굵은 손이 무릎 위에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두칠이 물게 됐고?"
"이름도 아세요?"
"물 떠 오는 애가 이름을 말한 적 있으니까 알지."
위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자기가 두칠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던가.
있었을 것이다.
반년이면 그럴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요?"
조율이 되물었다.
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가 있으니까 늦었지. 물목 재판은 반나절이면 끝나."
객사의 창은 서쪽으로 나 있었다.
해가 낮아지면서 방바닥에 창틀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위경은 그 그림자를 보았다.
"제7조를 읽었어요."
"누가."
"남 장로님이요."
조율이 기침을 했다.
이번엔 세 번 났다.
기침 끝에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칠조. 서자는 고발인이 될 수 없다."
"…문면까지 아시네요."
"내가 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
조율이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근데 그거 알아? 그 조문, 원래는 뒤에 한 줄이 더 붙어 있었어."
위경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줄이요."
"다만 대독인(代讀人)을 세울 수 있다."
방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감나무 가지가 한 번 흔들렸다.
"…위가 벽에는 그 줄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어디 있는 줄인데요."
조율이 물그릇 쪽으로 손을 조금 움직였다가 말았다.
"대독인이 뭔지는 알아?"
"…대신 읽는 사람이요."
"그래.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당사자의 말을 대신 읽는 거야. 읽기만 해. 고발은 못 하고."
조율이 위경의 소매 끝을 보았다.
마당 흙과 푸른 나무 가루가 묻어 있었다.
"됫박도 봤지."
"…보셨어요?"
"네 소매를 봤어. 청람경 눌림은 나무 가루가 푸르잖아."
"제가 말했으면 달라졌을까요."
"네가 말한 건 사정이 됐겠지. 봉함한 사람이 없으니까."
"누가 봉함할 수 있는데요."
"힘을 쓴 사람과 판을 읽는 사람. 다른 이름 둘로 찍어야 해."
"지금은 같은 집이 둘 다 하지?"
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침 판의 문서함과 봉검대의 검들이 한 마당에 있었다.
"사흘 뒤에는요."
"누군지 몰라도 운용자 미상이라고 남길 수 있었어. 됫박도 사흘은 못 태웠겠지."
증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찾을 사흘을 누구도 얻지 못한 것이었다.
"읽는 게 무슨 소용인데요."
"소용 없지. 판에 서지 못하면."
조율이 위경을 보았다.
반년 만에 처음으로 정면이었다.
"판에 서면 소용이 생기고."
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이 손보다 먼저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 줄이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아세요."
"읽었으니까 알지."
"어디서요."
조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을 보았다.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삼십 년 전에 하람(河藍) 아래쪽에서 같은 조문으로 재판이 하나 있었어. 서자가 섰지. 지고 싶어서 선 게 아니라 설 수 있어서 선 거야. 그때는 그 줄이 있었으니까."
"이겼어요?"
"졌어. 그래도 적혔지. 진 것도 적히면 다음 사람이 읽어. 네 오늘 일은 어디 적혔니?"
"…어디에도요."
"그래."
"사정으로는 적힐 수 있대요."
"사정은 사람이 안 읽어. 손해는 무는 사람이 있으니까 적히고."
"저는 무는 사람이 없고요."
"없지. 그래서 안 적히는 거야."
"그럼 왜 지금은—"
"물이 식겠다."
조율이 그제야 물그릇을 들었다.
손이 흔들렸다.
물이 조금 넘쳤다.
위경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법을 반년 동안 배웠다.
밤에 그는 정청으로 갔다.
가법(家法)은 정청의 서쪽 벽에 새겨져 있었다.
맞은편에는 봉검대의 빈 공의석(公議席)이 있었다.
누구나 벽을 읽을 수 있었고 적통 무인만 검을 봉할 수 있었다.
읽을 수 있다는 것과 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말이었지만 위가는 그 둘을 같은 말인 것처럼 한 마당에 두었다.
등불을 들지 않았다.
등불을 들면 누가 무엇을 읽었는지가 남는다.
달이 반쯤 있었다.
그 정도면 획을 만질 수는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제7조를 짚어 내려갔다.
서자는 고발인이 될 수 없다.
서자가 입은 손해는 손해로 적지 아니하고 사정으로 적는다.
거기서 끝이었다.
그다음 획은 제8조의 첫 글자였다.
사이에 빈자리가 없었다.
지운 자리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새긴 벽이었다.
위경은 손을 뗐다.
벽은 결과만 새겼고 이유는 남기지 않았다.
이유가 없으면 대조할 수 없었다.
남헌이 문서함을 몇 번 여닫았는지 기억해도, 마당에 서는 것은 기재된 것뿐이었다.
순찰 발소리가 나자 위경은 어둠으로 물러섰다.
들켰대도 서자가 벽 앞에 섰다는 일은 기재되지 않았다.
적힐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처음으로 편리하게 느껴졌다.
새벽에 그는 객사로 돌아갔다.
문 앞에서 소리를 들었다.
기침이 아니었다.
기침은 마르고 짧은데 이 소리는 길고 젖어 있었다.
들어가니 조율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소매에 붉은 것이 묻어 있었다.
"어르신."
"…물."
위경은 물그릇을 들어 입에 대 주었다.
조율이 두 모금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약이요. 약 어디 있어요."
"서궤 옆에."
위경은 일어섰다.
서궤 옆의 나무함에서 약봉지를 꺼내 부엌으로 가 물을 데웠다.
돌아왔을 때 조율은 앉아 있었다.
아까보다 반듯했다.
그리고 서궤가 열려 있었다.
위경은 문턱에서 한 박자 멈췄다.
서궤 안에는 책이 있었다.
낱권으로 스물세 권이었다.
그는 세지 않고도 알았다 — 묶음이 세 단으로 되어 있었고 위의 두 단이 여덟 권씩, 아래가 일곱 권이었다.
지질은 위가 종이가 아니었다.
굵은 결이 고르지 않게 삭아 여러 번 옮겨진 종이였다.
등마다 글자가 하나씩 있었다.
위경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그중 셋만 읽혔다.
공(公).
의(公議).
판(判).
그는 마지막 권으로 눈을 옮겼다.
끝장이 조금 들려 있었다.
손가락 하나면 펼 수 있었다.
"약 데웠어요."
위경은 그렇게 말하고 약사발을 내려놓았다.
조율은 서궤 쪽을 보지 않았다.
위경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닫을까요."
"…놔둬."
조율이 약사발을 들었다.
손이 아까보다 덜 떨렸다.
"어젯밤에 벽에 갔었지."
위경의 손이 잠시 멎었다.
"…어떻게 아세요."
"소매에 이끼가 묻었어. 정청 서쪽 벽에만 나는 거야. 북쪽은 볕이 없어서 안 나고."
"…예."
"등불은 안 들었고?"
"안 들었어요."
"잘했어."
조율이 약을 한 모금 마셨다.
"뭘 확인했는데."
"없더라고요. 그 줄."
"그렇겠지."
"지운 자리도 없었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새긴 벽이던데요."
조율이 사발을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그게 중요한 거야."
"…왜요."
"지웠으면 실수지. 처음부터 안 새겼으면 그건 고른 거고."
위경은 그 말을 두 번 들은 것처럼 천천히 받았다.
"뭐 더 물어볼 거 없고?"
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가지가 작년보다 굵어요. 올해는 열릴 것 같은데요."
조율이 짧게 웃었다.
웃음 끝에 또 기침이 났다.
"그래. 그러자."
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위경은 물통을 챙겨 일어섰다.
서궤는 열린 채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책등 하나에 희미하게 눌린 세 손가락 자국이 있다는 것은 보았다.
아침 됫박과 같은 층이었고 훨씬 오래된 흔적이었다.
소지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았다.
가법 제31조는 가문 밖 문서의 사사로운 소지를 금하고 금한 것을 압수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 조문에는 서자에 관한 단서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 조문만은 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같이 적용된다면, 같은 글에서 틈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