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법(家法)
2

잘린 숨의 조항

대력(大曆) 41년 삼월 초순.

이튿날 아침이었다.

객사의 창이 밝기 전에 위경(韋擎)은 물을 새로 길어 왔다.

서궤는 밤새 열린 채였다.

조율(曺律)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얼굴빛이 어제보다 나았다.

"물그릇 오른쪽에 뒀어요."

"알아."

조율이 눈을 떴다.

위경은 서궤 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다가, 애쓰는 것이 더 눈에 띈다는 데 생각이 미쳐 그만두었다.

"물어볼 거 생겼구나."

"…이름만요."

"이름만."

조율이 웃었다.

웃음 끝에 기침이 한 번 났다.

"공의판례(公議判例)."

위경은 그 넉 자를 입 안에서 한 번 굴렸다.

"공의회(公議會)의 판례라는 뜻이에요?"

"그렇지. 문파하고 세가 사이에 다툼이 나면 거기서 재단했어. 삼십 년 전까지."

"지금은요."

"지금은 없지. 없으니까 각 집 가법이 최종심이고."

조율이 손가락으로 서궤를 한 번 가리켰다가 내렸다.

"스물세 권. 다 판례야. 조문은 한 줄도 없어."

"판례만 있으면 뭘 알 수 있는데요."

"같은 조문이 누구한테 어떻게 걸렸는지."

"…그게 다예요?"

"그게 다야. 그게 전부고."

조율이 벽에서 등을 조금 뗐다.

"조문은 한 줄이잖아. 근데 그 한 줄이 열 사람한테 열 번 걸리면 열 번이 다 달라. 왜 다른지는 아무도 안 적고."

"위가도 안 적어요."

"어느 집도 안 적어. 적으면 다음 사람이 대 보니까."

"…대 보면요."

"대 보면 틀린 게 보이지."

위경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 벽 앞에서 손끝에 걸리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이름을 얻었다.

"어르신."

"응."

"이건 왜 안 태웠어요."

조율이 천천히 눈을 떴다.

대답이 늦었다.

"…태우라고는 했어."

"누가요."

"물이 식겠다."

위경은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자리가 어디인지는 반년이면 배운다.

"읽어도 돼요?"

"읽어."

"…가져가도 돼요?"

조율이 위경을 보았다.

"여기 있는 동안은 내 짐이야."

말이 짧았다.

위경은 그 짧음의 뜻을 알아들었다.

객사 안에서 읽으면 조율의 소지이고 문지방을 넘기면 위경의 소지가 된다.

제31조는 소지를 묻지 소유를 묻지 않는다.

"…예. 여기서 읽을게요."

"그래."

조율이 다시 눈을 감았다.

"낮에만 읽어. 등불 켜면 밖에서 보여."

"…색인은요."

"없어."

"목차도요?"

"없어. 만들면 훔치기 쉬우니까."

"그럼 뭘 보고 찾아요."

"종이."

조율이 손끝을 까딱했다.

그게 설명의 전부였다.

낮은 짧았다.

위경은 서궤 앞에 앉아 스물세 권을 세 단으로 갈라 놓았다.

색인이 없었다.

목차도 없었다.

권마다 등의 글자 하나만 다르고 안쪽 기재 방식은 같았다.

표국의 문서를 감식하던 눈이 처음으로 쓸모를 얻었다.

먹의 농도가 권마다 달랐다.

같은 사람이 같은 시기에 적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질도 두 종류가 섞여 있었는데, 삭은 정도로 보아 아래 단 일곱 권이 가장 오래되었다.

위경은 아래 단부터 폈다.

기재는 날짜와 지역으로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하람(河藍)은 강 이름이었다.

강을 낀 재판이면 지역 표기에 강 이름이 들어간다.

그는 하람이 적힌 장만 따라갔다.

아래 단 넷째 권에서 그 표기가 세 번 나왔다.

그중 두 번은 물세 다툼이었다.

세 번째가 달랐다.

대력 십일 년 시월.

하람 하류.

발성 경맥을 잃은 서자의 대독 청구.

위경의 손이 멎었다.

기재는 짧았다.

청구인은 청람경 역류로 목의 경맥을 다쳐 글은 쓸 수 있으나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름은 적히지 않았고 성만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 조문이 인용되어 있었다.

서자는 고발인이 될 수 없다.

서자가 입은 손해는 손해로 적지 아니하고 사정으로 적는다.

다만 대독인(代讀人)을 세워 그 사정을 판에 읽게 할 수 있으며 읽힌 사정은 손해로 고쳐 적는다.

세 줄이었다.

위가 벽에는 두 줄만 있었다.

위경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이 종이 위에 얹힌 채였다.

마당에서 낭독되던 남헌(南憲)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두 줄까지만 재생되다 끊겼다.

기억이 아니었다.

기재였다.

판결은 청구인이 졌다고 적혀 있었다.

대독인이 읽은 사정이 손해로 고쳐졌으나 액수가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말을 잃었다는 이유로 진 것이 아니었다.

손해의 액수를 입증하지 못해 졌다.

이유 아래에는 무맥인 두 개가 나란히 눌려 있었다.

하나는 청람경을 운용한 사람의 것이고 하나는 판에서 병기를 봉한 형명가의 것이었다.

종이 뒷면에 세 겹의 높이가 남았다.

어제 됫박에서 사라지던 눌림과 같았고 서궤 책등에서 본 오래된 자국과도 같았다.

위경은 손가락을 대지 않고 종이를 빛 쪽으로 기울였다.

조문은 목소리를 대신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무맥인은 힘을 쓴 사람과 그것을 증거로 만든 사람을 갈라 적었다.

위가 벽에서는 셋째 줄이 잘렸고 오늘 마당에서는 두 이름 가운데 하나가 처음부터 없었다.

위경은 그 장을 두 번 더 읽고 덮었다.

베끼지 않았다.

베낀 종이는 문지방을 넘고 넘으면 소지가 된다.

곳간 앞을 지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두칠(斗七)이 빗장을 살피고 있었다.

위경이 다가가자 반걸음 물러섰다가, 상대를 알아보고 앞치마에 손을 문질렀다.

"물목 말인데요."

"예."

"초이레 아침에 받으셨다고 했죠."

"예. 아침에 받았어요. 낮에 넣었고요."

두칠은 어제 마당에서 한 말을 그대로 다시 했다.

위경은 그것이 방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물목, 누가 적은 건지 아세요?"

"…모르는데요."

"필체는 보셨어요?"

두칠이 잠시 생각했다.

"봤는데요. 늘 오던 손이 아니었어요."

"늘 오던 손은 누구예요."

"곳간 물목은 창고지기가 적어요. 그 사람 손은 제가 알죠. 스물두 해 봤으니까요."

"그날 건 달랐고요."

"달랐어요. 글씨가 컸고요."

"그때 쓴 됫박은 어디 있어요?"

"아침 판 끝나고 병기고로 갔어요. 테가 상했다고 부엌 땔감으로 넘긴다던데요."

"누가 가져갔어요?"

"봉검대 아이가요. 얼굴은 봤는데 이름은 몰라요."

푸른 자국은 사흘을 못 갔다.

나무는 오늘 밤을 못 갈 터였다.

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두칠이 그를 보았다.

눈을 오래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그날은 조금 오래 맞췄다.

"…뭐 아시는 게 있어요?"

거기가 갈림길이었다.

대독인 조문이 살아 있다면 두칠의 건은 다툴 수 있었다.

물목의 기재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 제22조로는 두칠에게 불리하게 걸렸지만 같은 사실이 대독인의 입을 거치면 손해로 고쳐 적힌다.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위경에게는 판이 없었다.

조문은 벽에 두 줄로만 새겨져 있었다.

세 줄짜리 문면은 문지방 안쪽 서궤에 있으며 꺼내는 순간 압수된다.

알리면 두칠은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게 해 놓고 판을 못 세우면, 두칠은 닷 되를 잃은 뒤에 기다림까지 잃는다.

"아직 없어요."

두칠이 고개를 숙였다.

"예."

"빗장은 언제부터 헐거웠어요?"

"작년 가을부터요. 말은 했는데 순서가 안 왔어요."

"순서요?"

"고칠 순서가 있어요. 곳간은 뒤에 있고요."

"뒤에 있으면 언제 와요."

"…안 와요. 지금까지는 안 왔어요."

"그건 어디다 말하셨어요?"

"…종부님께요."

"종부님이 뭐라셨어요."

"적어 두겠다고 하셨어요."

"적힌 건 보셨고요?"

두칠이 앞치마에 손을 문질렀다.

"…못 봤어요."

위경은 그 이름을 안쪽 장부의 다른 자리에 옮겨 적었다.

오늘 쓸 자리가 아니었다.

정청(政廳)에는 이튿날 낮에 갔다.

재판이 없는 날의 마당은 넓었다.

남헌은 서쪽 벽 아래 서서 문서함을 열어 놓고 무언가를 대조하고 있었다.

위경은 세 걸음 밖에서 멈춰 섰다.

"장로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남헌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청인의 자격으로 묻습니다. 어제 판의 기재에 관한 것입니다."

그제야 남헌이 문서함을 덮었다.

"물으십시오."

"곳간 물목 건입니다. 기재에 이름이 없어 다투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제22조입니다."

"그 판에서 진 쪽이 뒤에 다시 다툴 방법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같은 사실로는 한 번입니다."

"다른 자격으로도 없습니까."

남헌이 처음으로 위경을 보았다.

보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눈이었다.

"자격이 다르면 사실도 달라져야 합니다. 사실이 같으면 자격을 바꿔도 판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자격을 정한 것도 조문입니까."

"제7조입니다."

위경은 다음 물음을 반 박자 늦게 놓았다.

늦은 것은 셈 때문이었다.

"제7조는 두 줄입니까."

남헌이 문서함 위에 손을 얹었다.

"벽에 새겨진 대로입니다."

"벽에 새겨진 것이 조문의 전부입니까."

한 박자가 비었다.

마당의 흙이 마르는 소리가 들릴 만큼이었다.

"벽에 있는 것은 위가에서 정리한 문면입니다."

남헌은 그 말을 사견으로 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듯 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사실이었다.

"정리하기 전의 문면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제가 답할 자리가 아닙니다."

"모르신다는 뜻입니까."

"제 소임 밖이라는 뜻입니다."

남헌이 문서함을 다시 열었다.

물음이 닫혔다는 신호였다.

위경은 한 걸음 물러섰다.

"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방청인의 물음이었습니까."

위경이 멈췄다.

"예."

"방청인은 판에 관해 묻습니다. 조문의 내력을 묻지 않습니다."

남헌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지 않았다.

지적도 아니었다.

그는 방금 일어난 일을 문면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었다.

"…예. 유념하겠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위경은 왼손 엄지를 생각했다.

남헌의 옥가락지는 오늘 두 번 돌았다.

객사로 돌아왔을 때 해가 반쯤 남아 있었다.

서궤는 열려 있었다.

조율은 자고 있었고 숨이 고르지 않았다.

위경은 아래 단 넷째 권을 다시 폈다.

세 줄이 그대로 있었다.

종이 위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담 밖에서는 두 줄만이 법이었다.

세 줄을 판에 세우려면 이 책을 마당에 가져가야 했다.

마당에 가져가면 제31조가 그것을 거두어 간다.

거두어 가면 두 줄만 남는다.

위경은 책을 덮고 무릎에 얹었다.

탁.

쥔 것이 있었다.

세 줄의 문면, 두 겹의 이름, 사라진 됫박이었다.

쥔 것을 쓸 자리가 없었다.

'자리가 없다면, 먼저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