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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서가 온 뒤로 여드레가 지나 있었다. 조운선의 물때가 그날이어서였다. 그 여드레 동안 거안은 성내 잔짐 셋을 날랐다. 잔짐의 품삯은 잔돈이었으나, 상회 장부에 기입 세 줄이 늘었다. 여관영은 그 세 줄을 보증 1의 지체 한 줄 옆에 쌓는 심정으로 셌다.
철평진에서는 기별이 왔다. 하일평의 다리가 지팡이를 허락할 만큼 붙었다. 총회 전에는 돌아와 서겠다는 글이었다. 운담은 답장을 부쳤다. 형님 밥 잘 챙기시라는 말 끝에, 이번 건을 한 줄 적었다. 공납 비단, 나루 길, 벼릿길로 간다고. 물으실 것을 미리 답하는 후배의 성의였다.
성의가 어디로 가는지, 적는 손은 몰랐다.
출발 아침, 상회 창고 앞에서 조건이 명시되었다.
"비단 서른 필. 구월 열흘 오시 물때 전, 나루의 조운선에 선적. 노선은 벼릿길 — 상회 지정이오. 공납이니 값은 없고, 이 한 건이 보증의 나머지 반쪽인 건 아실 테고."
상회 서리의 말은 사무적이었다. 가을 강바람이 창고 깃발을 흔들었다.
"벼릿길 말고 큰길로 돌면 안 됩니까."
"큰길은 두 물때 길이오. 오시에 대려면 벼릿길뿐이지. 상회 지정이니 — 길 탓은 상회가 지겠소."
서리는 제 말이 농이 되는 줄도 모르고 갔다. 비단 서른 필은 부피만 컸지 무게는 순했다. 수레 하나, 말 하나, 사람 둘. 오시까지는 넉넉한 반나절이었다.

넉넉한 셈은 벼릿길 초입에서 끝났다.
길을 막은 것은 낙석이었고, 낙석 뒤에 사람이 있었다. 돌무더기가 강안 절벽길의 허리를 정확히 끊고 있었다. 어젯밤 비도 바람도 없었다. 그리고 능선 위 — 나무 사이에 사람의 결이 있었다. 내려오지 않는 사람들. 덤비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들.
"치우려면 한나절. 물때는 오시. 셈이 안 서네."
유마향의 목소리에서 너스레가 빠져 있었다. 운담은 능선을 올려다보았다. 덤비지 않는 매복은 세 번째였다. 소금 때도, 그들의 목적은 짐이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실패의 기입이었다.
"능선 샛길은."
"흑수채 마당이야. 허락 없이 들면 통행세가 아니라 목값을 부를지도 몰라."
"다른 길은요."
"강을 헤엄치든가. 비단 서른 필 이고."
"농담이지요."
"반쯤은."
"산 사람들 셈은 — 만나 봐야 알지요."
"…담아."
"능선으로 갑니다. 수레는 객잔에 맡기고."

갈림목 객잔에 말과 수레를 맡기고, 비단 서른 필을 둘이 나눠 졌다. 운담이 스물, 유마향이 열. 비단은 가벼웠고, 가벼운 짐의 걸음은 여전히 낯설었다. 운담은 보폭을 줄이고 없는 무게를 상상해 발에 실었다.
능선 중턱에서 산이 길을 막았다.
도끼자루를 쥔 사내들이 예닐곱, 반원으로 섰다. 그 가운데서 걸걸한 목소리가 나왔다.
"성안 짐이 산길로 다니네. 벼릿길 놔두고."
마흔 줄의 사내였다. 도끼자루를 쥐었으되 날을 세우지 않았고, 눈은 짐부터 쟀다. 운담의 등을, 유마향의 등을, 그리고 운담의 등을 다시.
"벼릿길이 막혔습니다. 낙석입니다."
"낙석이라. 비도 없었는데 부지런한 돌들이군."

사내는 그 말을 하며 웃지 않았다. 낙석의 뜻을 아는 웃음기 없음이었다.
"거안표국입니다. 나루 물때가 오시라 — 산길을 빌리러 왔습니다. 통행세는 셈해 주십시오. 지금은 짐이 상회 공납이라 손댈 수 없고, 값은 뒤에 치르겠습니다."
"거안. …여씨네 표국. 할증표 안 산다는 그 짐꾼이 너냐."
"소문이 산까지 옵니까."
"산이라서 오지. 골짜기는 소리가 잘 울려."
소문은 산에도 오르는 모양이었다. 운담은 대답 대신 등짐을 고쳐 멨다. 사내의 눈이 그 동작을 오래 보았다. 등짐으로 사람을 재는 눈이었다.
"지나가라. 통행세는 소금 반 가마 — 외상이다."
"외상 값은 어디로 가져옵니까."

"산이 받으러 가지. 급하면 갈현이를 찾아라 — 그게 나다."
채주였다. 흑수채의. 유마향의 숨이 반 박자 멎는 것을 운담은 들었다. 회양협의 이름과 함께 십일 년을 산 이름이었다.
지나치려는 등 뒤에서 갈현이 말했다.
"짐꾼. 회양협 소리 나올 때마다 우리 채가 턴 걸로 되더군. 우리는 그 골짜기서 십일 년간 짐 한 짝 안 건드렸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운담이 받았다. 쇠였다. 편자 하나.
"참사 이듬해에 가짜 녹림 하나를 잡았다. 우리 흉내를 내고 다니더군. 놈은 놓쳤고 — 놈의 말이 그걸 흘리고 갔다. 산에서 십 년 묵혔다. 성안 놈들 물건이지. 쓸 데가 있거든 써라."
"왜 우리한테 주십니까. 십 년 묵힌 것을."

"십 년을 줄 놈이 없었다. 성안 놈들은 산 말을 안 믿고, 관은 산 말이면 거꾸로 믿지. 할증표 안 사는 놈이면 — 셈이 다를까 해서."
"셈은 다릅니다."
"그럼 값 해라. 그 쇠붙이는 외상 아니다. 그건 그냥 주는 거다."
산길이 열렸다. 내려오는 길에 유마향이 편자를 뒤집어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안쪽 오목한 자리에서 멎었다.
편자 안쪽에 동문 마방의 각인이 찍혀 있었다. 마방집 딸이 열 살부터 보고 자란 낙인이었다. 잘못 볼 수가 없는.
"동문 마방이야. 담아. 이거 — 동문 거야."
두 사람은 한참 말이 없었다. 절름 말을 내주던 마방. 하필 그 밤에 문을 걸던 마방. 편자 하나가 골목의 결들을 한 줄에 꿰었다.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 유마향은 편자를 두 번 더 뒤집어 보았고, 뒤집을 때마다 같은 각인이 나왔다.
이것은 도적질이 아니다 — 소금의 밤에 운담이 뒤집어 보던 문장이 있었다. 산이 십 년 묵힌 편자 하나가 그 문장의 증인이 되었다. 가짜 녹림의 말은 성안 마방에서 편자를 갈았다. 절름 말을 내주고, 하필 그 밤에 문을 닫던 마방에서.

나루가 보였을 때 조운선은 이미 밧줄을 풀고 있었다.
나루는 물때의 끝물로 어수선했다. 짐꾼들이 마지막 궤짝들을 나르고, 닻줄 감는 소리가 물소리를 눌렀다. 운담은 나루 관리에게 표서를 던지듯 보이고 거룻배를 빌렸다. 서른 필이 거룻배로, 거룻배가 물살로, 물살이 조운선의 옆구리로. 선원들이 줄을 내렸고, 비단은 한 필도 젖지 않고 배에 앉았다. 선장의 수결이 표서에 앉았다.
오시를 한 식경 넘긴 선적이었다.
나루 관리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기입도 정직했다. 인도 완료 — 지체 한 식경. 짐은 닿았고, 시각은 늦었다. 절반의 완수라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운담은 그 기입을 보며 배웠다.
보고는 해 질 녘의 마당에서 했다. 조건, 방해, 절반의 완수.
"지체 한 식경. 상회 기입에 그리 남았습니다."
"낙석은."
"비 없이 내린 돌입니다. 능선에 사람이 있었고 — 덤비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기다리는 습격이라. …편자는 이리 다오."
여관영은 편자를 등잔 밑에서 오래 뒤집어 보았다. 동문 마방의 각인 위로 국주의 엄지가 한 번 지나갔다.
"조각이 늘어 간다. 반쪽짜리들이."
"수고했다는 말은 안 하십니까."
"수고했다. 절반이라도 — 짐은 닿았으니."
"닿는 게 일이라서요."

보고가 끝날 무렵, 마당에 지팡이 소리가 났다.
하일평이 와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살이 빠진 채, 웃으며. 총회 전에 서겠다더니 열흘이나 일찍이었다. 운담의 가슴이 반가움으로 먼저 뛰었고 — 그다음에 눈이 보았다. 골목 어귀의 그림자. 갓을 눌러쓴 사내가 마당 쪽을 보다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융흥전장의 서리였다. 급전 심부름으로 두어 번 본 얼굴.
지팡이를 짚고 온 사람과, 그를 기다리다 사라진 그림자.
물었고, 답했고, 그 답이 길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노선을 물은 서신들. 노선을 적은 답장들. 벼랑 물목을 짚어 주던 병상의 조언. 총회 날짜의 선지식. 접어 두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펴졌다. 갑이 쏟아지듯.
"형님. 언제부텁니까."
목소리는 낮았다. 커지지 않았다. 하일평의 웃음이 천천히 걷혔다. 그는 되묻지 않았다. 무엇이 언제부터냐고 묻지 않는 것이 — 대답이었다.
"…소금 전부터일세."
마당이 조용해졌다. 유마향이 우물가에서 굳었고, 안채의 문이 열렸다. 여관영이 나왔다. 국주는 두 사람의 얼굴만 보고 다 읽었다.

"어무이 약값이 융흥전장에 잡혀 있네. 삼 년 전부터. 이자가 원금을 넘고 — 작년부터는 이자 대신 길 소식을 받겠다더군. 처음엔 날씨 얘긴 줄 알았네.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알았을 때는."
"발을 뺄 수 없었네. 저울질을 했어. 어무이하고 표국을 한 저울에 놓고 — 매번 어머니 쪽이 무거웠어. 그게 다일세."
변명이 아니었다. 셈의 보고였다. 그래서 더 아팠다. 운담은 소금의 밤을 생각했다. 저를 뒤로 밀어내던 손. 세 합에 꺾이던 검. 그 부상도 제가 흘린 목록이 부른 것이었다. 저울의 양쪽이 다 진심이라, 미워하는 셈이 서지 않았다.
"하 표사."
여관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반 박자 뒤에, 육 년의 반말이 물러났다.
"아니 — 하일평 씨."
그 존대가 마당에서 제일 아픈 소리였다.
"아저씨……."

유마향이 무어라 하려다 말을 삼켰다. 삼킨 말이 무엇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노모는 어쩌실 셈이오."
"제 몫입니다. 이제부터는 — 제대로 제 몫입니다."
하일평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허리의 검을 끌렀다.
"자격은 두고 가겠습니다. 총회에 —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유출의 경로는 제 입으로 말하겠습니다. 그게 남은 반쪽 값이니."
그는 검을 들고 골목으로 나갔다. 운담은 따라 나갔다. 말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지 보아야 했다. 접어 두는 버릇은 끝났다.
하일평이 들어간 곳은 뒷골목 전당포였다. 등잔 하나가 켜진 좁은 가게. 늙은 주인이 주판을 놓고 있었다. 하일평은 검을 풀어 전당포 궤대에 올렸다.
"값은 아무래도 좋소. 약값 두 달 치면 되오."
늙은이는 검을 오래 보지 않았다. 값을 부르고, 돈을 세고, 표를 썼다. 하일평은 운담을 지나치며 멈추지 않았다. 다만 반걸음 곁에서 한마디를 놓고 갔다.

"운담이. …벼랑 물목 조언은, 진심이었네."
그것도 진심이고 유출도 사실이었다. 두 개가 한 사람 안에 있었다. 운담은 그 등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거기 짐꾼."
전당포 안에서 늙은이가 불렀다. 주판알 소리가 멎어 있었다. 늙은이의 눈은 운담의 어깨 — 멜대에 가 있었다.
"멜대 좀 보세."
운담은 들어가 멜대를 궤대에 눕혔다. 늙은이의 마른 손가락이 자루의 잔눈금을 짚어 내려갔다. 하나, 둘, 셋. 세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눈금. 원행 물건이군."
"…원행을 아십니까."
"이십 년 셈해 줬네. 원행표국. 나는 주노정이라 하고 — 자네, 성이 석가지. 얼굴에 국주 어른이 있어."

"…장부가 남았습니까. 원행 장부가."
"원본은 '정리'됐지. 참사 두 달 뒤에 웬 서생들이 와서 싹 걷어 갔네. 한데 회계라는 건 말일세, 버릇이 나빠. 사본을 떠 놓거든."
운담은 대답하지 못했다. 늙은이는 등잔을 돋우고, 운담을 오래 보고,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팔월 열이레였네. 십일 년 전. 참사 열흘 전이지. 장부에 기입이 하나 섰어 — 짐 목록이 팔렸네. 서른 냥에. 수취인 난에 금정상행이라 적혔지. 내 손으로 적었네. 그때는 그게 무슨 기입인지 몰랐어."
주판알 하나가 늙은 손가락 밑에서 달칵, 넘어갔다.
"기입은 더 있네. 보고 싶으면 — 국주와 같이 오게."
밤 골목을 걸어 돌아오는 운담의 표서 갑 안에는 이제 조각이 넷이었다. 고르지 않은 기입, 할증표 사본, 동문 마방의 편자, 그리고 옛 장부의 문. 하나같이 반쪽이었다. 반쪽 넷이 온쪽 하나가 되는 셈법을, 누군가는 알아야 했다.
마당의 등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셋이 된 표국의 불이었다. 여관영은 툇마루에 앉아 편자와 할증표 사본을 나란히 놓고 있었고, 유마향은 그 곁에서 말없이 여물을 썰었다. 운담은 전당포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기입은 더 있다는 것. 국주와 같이 오라는 것. 여관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데는 반 박자도 걸리지 않았다.
"내일 간다.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