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panels · Automated checks complete

족자는 걸리기 전에 운다.
서지안은 그 말을 할머니에게 배웠다. 종이의 결이 어긋난 채 말려 있으면, 펼칠 때 우는 소리가 난다고. 늦가을 아침의 프리뷰룸, 흰 벽과 흰 조명 아래에서 《운계 산수도》를 걸개에 올리던 지안의 손끝에 그 소리가 걸렸다.
아주 작게. 항온항습기 바람에 묻힐 만큼.
"뭐 해. 각 나왔어?"
같이 온 반장이 사다리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나왔어요. 와이어만 잡을게요."
지안은 장갑 낀 손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안개 낀 계곡, 물소리가 들릴 듯한 필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그런데 손끝이 자꾸 종이의 안쪽을 물었다. 낡음이 고왔다. 너무 고왔다.
"기사님, 수평 맞으면 물러나 주세요. 개장 전 촬영 있습니다."
담당 스페셜리스트가 태블릿을 안고 서 있었다. 오세라. 도록의 간판을 맡은 사람의 걸음으로 그림 앞을 지나갔다.
"확인했습니다."
"뒷정리는 복도 쪽으로 부탁드려요. 크레이트 이쪽에 두시면 동선 걸립니다."

"옮기겠습니다."
지안은 물러났다. 기사는 걸고, 나가고, 잊는 사람이다. 오 년 동안 그렇게 살았다. 라운지 쪽에서 수첩을 든 남자가 도록을 넘기며 직원에게 무언가 묻고 있었다.
"이 산수도가 이번 시즌 최고가입니까?"
"내정가는 말씀드릴 수 없고요, 도록 순서가 곧 기대 순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첩의 남자는 그림값을 적었다. 그림은 안 보고.
"야, 서 기사."
돌아오는 트럭에서 반장이 운을 뗐다.
"너 인사동 문향재 손녀라며. 명장 할머니."
"…누가 그래요?"
"업계가 좁아. 그 손으로 왜 짐을 나르냐고들 하지."
"짐이 그림인데요."
반장은 웃고 말았다. 지안은 창밖을 보았다. 그 손으로, 라는 말이 오늘따라 손끝에 남은 결 울음 위에 겹쳤다. 걸 때 울던 종이. 낡음이 고운 그림. 확인 못 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 그 원칙이 오늘은 밥그릇의 핑계처럼 들렸다.

퇴근길에 문자가 왔다. 엄마였다.
'공방 정리한다. 다음 달에 실사 온다. 니 도장 필요하다.'
지안은 답장 대신 버스를 갈아탔다. 인사동 뒷골목, 문향재의 문을 여니 삭힌 풀 냄새가 여덟 달의 부재보다 먼저 왔다. 명주는 이층 계단 아래에서 상자를 묶고 있었다.
"왔니. 도장 가져왔어?"
"…그림 하나만 보고요."
"그림은 무슨 그림. 서가는 니 거니까 니가 치워. 나는 저 방은 못 들어간다."
"엄마."
"실사 전까지만 해. 부동산에서 사진 찍으러 온댔으니까."
"…팔면, 이건 다 어디로 가요."
"어디로 가긴. 니가 가져가든가, 버리든가. 느이 할머니처럼 종이랑 살 거면 니가 안고 살아."

명주는 상자 매듭을 당겨 조였다. 필요 이상으로 세게. 그리고 냉장고에 반찬통 두 개를 밀어 넣고 — 아무 말 없이, 늘 그랬듯이 — 현관으로 갔다. 걸음이 반닫이 앞에서 빨라졌다.
"도장. 잊지 마라."
문이 닫히고, 지안은 작업대에 혼자 섰다.
풀 단지들이 크기순으로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여니 십 년 삭힌 밀가루풀의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할머니는 화학풀 쓰는 표구를 반편이 일이라 불렀다. 밀가루풀은 종이에 스미며 가장자리가 번지고, 화학풀은 자로 잰 듯 고르게 앉는다. 그 차이를 지안은 열두 살에 배웠다. 국자로 풀을 저으며, 벌 서듯 서서.
서가에서 일지 한 권을 내렸다. 아래 모서리가 엄지 자리로 검게 닳아 있었다. 항목마다 기법과 재료가 적히고, 테두리에 네모를 두른 글 — 금 메모였다. 이 수리가 어디서 거의 틀렸는지. 무엇을 보고 물러섰는지. 성공이 아니라 위험을 적는 기록.
지안은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가게 문 닫기 전의 무근지업사로 갔다.
"어이구, 문 명장네."
박무근은 놀라지도 않고 믹스커피 두 봉을 탔다. 할머니의 배합이었다. 오 년 만인데, 어제 본 사람처럼.
"아저씨. 뭐 하나만 여쭐게요."
"커피부터 마셔. 급한 질문일수록 커피부터야."
지안은 뜨거운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옛 표구 배접이요. 결 방향."
"엇결이지. 무조건 엇결."
무근이 종이 축 하나를 계산대에 눕혔다.
"이게 왜 그러냐면—"
무근은 종이 끝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종이도 나무야. 결대로 힘을 써. 그림 종이하고 배접지를 결 나란히 붙여 봐라. 당장은 곱지. 그런데 세월 먹으면 한 방향으로 같이 울어. 그래서 어긋나게 붙이는 거야. 서로 당기라고. 그게 엇결이다."
"맞결로 붙이는 표구장도 있어요?"
"옛날 손은 없어. 게으른 손이나, 옛 법을 책으로만 배운 손이나."
"그럼 인주는요. 낙관 인주."
무근이 서랍에서 인주합을 꺼냈다. 뚜껑에 기름때가 곱게 앉은 놋합이었다.
"옛 인주는 주사야. 돌가루 인주. 세월 먹으면 검붉게 갈앉고, 종이 속으로 스며. 요즘 것은 백 년을 둬도 종이 위에 떠 있지."

"떠 있다는 게—"
"도장밥이 뜬 거지. 이렇게, 살얼음처럼. 도장밥 뜬 그림은 어린 그림이야. 그림이 뭐라고 우기든."
지안은 종이컵을 비웠다. 세 가지가 나란히 섰다. 결, 풀, 인주. 하나하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셋이 같은 방향을 보느냐였다.
"근데 너, 뭐 물어보는 눈이 아니고 확인하는 눈이다?"
지안은 대답 대신 컵을 내려놓았다. 무근은 더 묻지 않고, 창고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안에 느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주문한 배접지가 한 축 있다. 겨울 오기 전에 찾으러 온다더니, 겨울보다 먼저 갔어."
"…보관료 드릴게요."
"보관료 같은 소리. 종이는 임자한테 가는 물건이야. 임자가 준비되면 와."
지안은 목이 메는 것을 커피 탓으로 돌렸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두 봉인 거, 안 잊으셨네요."
"사십 년 배합을 잊게. 가라. 문 닫자."

다음 날 아침, 지안은 세라의 사무실 앞에서 이름을 걸었다.
"운송팀 서지안입니다. 어제 설치한 운계 산수도,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세라의 태블릿 펜이 멎었다.
"…재검토요. 근거가 뭐죠?"
"배접의 결과 풀, 낙관 인주입니다. 지금은 — 손끝의 판단까지입니다. 확인할 십오 분이 필요합니다."
"기사님."
세라는 정확하게 말했다. 화도 조롱도 없이, 규정을 읽듯이.
"느낌은 감정서가 아니에요, 기사님. 그 그림엔 감정서가 붙어 있어요. 업계 표준의 감정서가요. 재검토는 문서로 반증이 설 때 여는 겁니다."
"압니다."
"아시는 분이 왜—"

"그래서 문서로 세울 시간을 청하는 겁니다. 십오 분이면 됩니다. 입회하셔도 됩니다."
세라는 지안을 오래 보았다. 기사복의 이름표를, 장갑 자국이 남은 손을. 그리고 태블릿을 넘겼다.
"어제 촬영본에서 걸개 수평이 이 밀리 틀어졌어요. 보정 작업 지시 나갑니다. 십오 분. 제가 입회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 아니에요. 보정은 보정이고, 십오 분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 기사님 소속사로 정식 공문 나갑니다."
한 시간 뒤 운송사 팀장의 전화가 왔다.
"서 기사. 한율 쪽에서 얘기 나왔다. 기사가 그림에 말이 많다고."
"설치 관련 확인이었습니다."
"확인은 걔네가 하는 거고 우리는 거는 거야. 한 번만 더 나오면 배차에서 뺀다. 알았어?"
"알겠습니다."
값은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지안은 전화를 끊고 장갑을 챙겼다.

보정의 십오 분. 프리뷰룸은 개장 전이라 비어 있었고, 세라는 팔짱을 낀 채 세 걸음 뒤에 섰다. 시계를 보는 대신 지안의 손을 보는 눈이었다.
지안은 수평부터 잡았다. 이 밀리는 진짜였다 — 세라는 없는 핑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와이어를 반 바퀴 감아 각을 세우고, 수평계의 기포가 가운데 서는 것을 둘이 같이 확인했다.
"보정 끝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확인입니다."
"십이 분 남았어요."
지안은 장갑을 고쳐 끼고 랜턴을 사선으로 눕혔다.
빛이 종이를 스치자 결이 일제히 섰다. 그림 종이의 결과, 비쳐 보이는 배접지의 결이 — 나란했다. 맞결이었다.
"보이십니까. 결이 나란합니다. 엇결이어야 합니다. 옛 표구는 무조건요."
"…수리 때 다시 붙였을 수도 있죠. 재배접이면 결도 새로 가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럼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위탁 서류에 수리 이력이요. 그리고 이것도 봐 주십시오."
지안은 배접 경계를 비췄다.
"풀 자국입니다. 자로 잰 듯 고르죠. 화학풀입니다. 옛 밀가루풀은 가장자리가 번집니다. 십 년 삭힌 풀은 종이에 스미는 결이 달라요."
"그것도 재배접이면 설명되고요."

"됩니다. 그래서 셋째가 필요합니다."
지안은 확대경을 낙관 위에 놓았다.
"인주입니다. 떠 있습니다. 갈앉지도, 스미지도 않았어요. 백오십 년 전 도장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인주는 — 재배접으로도 설명이 안 됩니다. 도장은 그림에 찍는 거니까요."
세라가 확대경을 받아 들었다. 오래 보았다.
"하나는 결, 둘은 풀, 셋은 인주입니다."
지안은 손가락을 꼽았다.
"하나씩은 다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셋이 한꺼번에 새것인 경우는 하나뿐입니다. 종이가 새것인 경우요. 그림째로요."
"…잠깐만요."
세라는 태블릿에서 위탁 서류를 열었다.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이 점점 느려졌다.
"수리 이력, 공란이에요. 재배접 기록 없음."
"그럼 남는 답은 하나입니다."
세라는 말없이 장갑을 꼈다. 사선광을 제 손으로 다시 눕히고, 배접 경계를 제 눈으로 훑고, 낙관 앞에 오래 멈췄다. 그리고 몸을 세웠다.

"제 눈으로 다시 봤어요. 리포트, 다시 씁니다."
결재 서식처럼 짧아진 문장이었다.
"내부 재검토 상정입니다. 보류가 아니라 재검토예요. 위원들 앞에서는 오늘 이 순서 그대로 다시 보여 주셔야 할 거고요. 그리고 기사님 — 이 경위는 전부 기록으로 남아요. 기사님 이름으로요."
"그러라고 이름을 걸었습니다."
세라는 뭐라 하려다 말고, 태블릿에 적었다. 지안은 그녀가 적는 첫 줄을 보았다. '설치 기사 서지안의 제기로—'. 기사 앞에 '설치'가 붙어 있었다. 아직은.
"하나만 물을게요."
세라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이런 걸 어디서 배웠어요? 운송 교육에는 없는 내용인데."
"…공방에서요. 오래전에."
"공방."
세라는 더 캐지 않았다. 대신 그림을 한 번 더 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술을 읽는 눈으로.
"아름답네요, 여전히. 그게 제일 이상한 점이에요."
지안도 같은 생각을 했다. 가짜라서 못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잘 그린 손이 가짜를 골랐다. 그 선택이 어떤 종류의 허기인지, 지안은 아직 몰랐다.

그날 밤 공방에서, 지안은 낮에 짚었던 항목들을 일지의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항목은 제자리로. 그것이 규율이라는 걸, 방법이라는 말을 배우기 전에 손이 먼저 배웠다.
마지막 권이 손에 걸렸다.
마지막 항목. 《운계 8폭 병풍》. 삼십 년 전의 날짜. 기법란은 채워져 있었고 — 배접을 전부 새로 떴다는 큰 수리였다 — 소견은 반쯤에서 끊겨 있었다. 먹이 마르다 만 것처럼. 사십 년을 하루도 안 거른 기록이, 하필 거기서.
지안은 끊긴 문장을 손끝으로 짚었다. 할머니는 문장을 끊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은 아꼈어도 글은 끝맺었다. 끝맺지 못한 것이 아니라 끝맺지 않은 것이라면 — 무엇을 기다렸다는 뜻이 된다.
다섯 해 전의 밤이 잠깐 지나갔다. 이 작업대 앞에서, 지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소리를 높였던 밤. 그때는 침묵이 비겁으로 보였다. 오늘 밤 이 끊긴 문장 앞에서는 —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기다림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지안은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 앞 권을 덮으려는데, 네모 테두리의 금 메모 하나가 눈을 물었다.
'낡음이 고른 그림을 조심해라. 낡음을 하나만 남기는 손이 있다.'
지안은 낮의 그림을 떠올렸다. 완벽한 표면. 고운 세월. 그리고 왼쪽 아래 모서리 — 좀 자국 하나만 진짜로 낡아 있었다.
서른한 살의 손이 열두 살의 손처럼 떨렸다.
할머니는 이 손을 알고 있었다. 알고, 문장으로만 남겼다. 그리고 그 문장이 꽂힌 일지를 읽는 법을 아는 사람은 — 지안은 서가의 마흔 권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 이제 세상에 저 하나뿐이어야 했다.
하나뿐인가.
풀 냄새 깊은 공방의 밤, 그 질문만이 마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