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사람들은 여전히 무너진 동부교 쪽을 돌아보지 못했다. 다리가 끊긴 자리는 벌써 먼지와 나무 부스러기로 덮였고, 사람들은 그 위에 덮인 것만 보며 살아남는 법을 배워 가고 있었다. 하지만 도연우는 물건에 남은 흔적이 사람보다 오래 버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 봉인해 둔 자루를 다시 열었다. 붉은 먼지는 아직 손가락에 옅게 묻어 나왔다. 연우는 그걸 종이에 털어 놓고, 빛에 비춰 결을 살폈다. 먼지 속에는 폐광의 쇳가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주 미세한 곡물 껍질과 기름, 그리고 물에 젖었다가 말라붙은 진흙이 섞여 있었다. 물길이 있어야 했다. 오래 막힌 물길이 아니라, 사람 손이 들락거리는 좁은 물길.
"배로 실린 게 아니네."
옆에서 한무석이 낮게 말했다.
"배는 겉길입니다." 연우는 손끝으로 자루 바닥을 두드렸다. "이건 안쪽 길에서 나왔어요. 시장 아래를 지나오는 길."
최연실이 얼굴을 굳혔다. "그런 길은 지도에 없어요."
"지도에 없는 길이니까 값이 생기죠." 연우는 봉인된 황동 표찰을 다시 펼쳤다. `백운상단 지하 4번 창고.` 그런데 표찰의 모서리에 찍힌 봉랍 자국이 이상했다. 상단의 정식 봉인보다 한 겹 더 깊게 눌린, 시장 공용 인장이 아니었다. 백중호가 사적으로 쓰는 문양이었다.
최연실이 숨을 삼켰다. "곡물 독점상 쪽이란 뜻입니까?"
"아직은 하청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청이든 직계든, 길은 하나예요." 연우는 종이를 접으며 말했다. "오늘 안에 끊어야 합니다."
"법원부터 가야죠." 감정인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영장도 없이 창고를 뒤지면 우리가 불법이 됩니다."
연우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이미 아침 배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동부교가 무너진 뒤 시장은 사흘치 식량으로 버티는 중이었지만, 사흘은 길지 않았다. 누가 먼저 공포를 팔면 값은 다시 뛰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연우뿐이 아니었다.
"법원은 내일도 열립니다." 연우가 말했다. "하지만 창고는 오늘 밤 열릴 수 있어요."
한무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신하십니까?"
"확신이 아니라 계산입니다. 붉은 먼지는 젖은 상태에서 말랐고, 자루 안쪽 기름은 한 번 이상 물살에 닿았습니다. 지금 곡물이 멀리서 오고 있으면 이미 새 흔적이 있어야 해요. 없다는 건 도시 안에서 한 번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허리춤의 얇은 신용장을 꺼냈다. 간신히 남아 있던 계약 한 장이었다. 연우는 그것을 접어 공동 창고의 열쇠 꾸러미 옆에 놓았다.
"이 열쇠를 담보로 잡겠습니다."
최연실이 놀라 손을 뻗었다. "그건 오늘 배급의 책임 열쇠예요."
"그래서입니다." 연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틀리면 제 신용이 아니라 제 책임으로 끝나야죠. 대신 제가 맞으면, 오늘 흘러들어오는 곡물은 모두 공동 장부로 묶입니다. 숨기는 쪽이 더 비싸지게 만들죠."
침묵이 길어졌다. 결국 한무석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갱 안은 제가 앞서갑니다."
그들은 시장 외곽의 오래된 배수문으로 갔다. 문은 반쯤 막혀 있었고, 축축한 돌 틈 사이로 썩은 물 냄새가 올라왔다. 연우는 자루 바닥을 비춰 보며 가장 검은 자국이 가리키는 방향을 짚었다. 오른쪽 벽이었다. 한무석이 돌을 밀자, 묵직한 소리가 나며 얇은 판 하나가 비뚤게 열렸다.
안쪽은 어둡고 낮았다. 사람 허리만한 갱도였지만 바닥에는 최근의 수레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상한 건 그 자국이 바깥으로 뻗지 않고, 도리어 시장 쪽으로 되돌아오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 들어온 물건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다시 풀린다. 빼돌려 놓은 곡물이 시장에서 두 번 팔리는 구조였다.
"개판이군요." 한무석이 이를 악물었다.
"개판이 아니라 정밀합니다." 연우가 말하며 벽을 살폈다. 돌 틈 사이에 찍힌 봉랍 문양이 보였다. 백운상단 표식이 아니었다. 백중호가 직접 쓰는 도장. 곡물 포대 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남겨 두는 듯한 얕은 인장. 도시 아래를 자기 창고처럼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연우는 한순간 욕을 삼켰다. 분노보다 먼저 들이닥친 건 계산이었다. 이 길을 바로 막으면 적은 숨겠지만, 오늘의 배급도 같이 멈춘다. 그대로 두면 백중호는 계속 빼돌린다. 연우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고 결심했다.
"막지 않습니다."
최연실이 놀라 물었다. "왜요?"
"지금 막으면 오늘 저녁이 비어요." 연우는 갱 안쪽을 가리켰다. "대신 우리가 먼저 흘려보냅니다."
그는 배수문 바깥에 기다리던 하청 운송상에게 사람을 붙였다. 상대는 백중호 쪽 옷감을 달고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연우는 협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산서를 내밀었다.
"오늘 들어온 보리는 공동 창고로 갑니다. 당신은 물량을 뺀 흔적과 계약서를 모두 공개하세요. 오늘 밤까지요. 그러면 내일 법원에서 당신 이름은 하청으로만 남습니다. 장부를 숨기면, 당신이 가장 먼저 끊깁니다."
하청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고개가 떨어졌다. 돈보다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신이 더 이상 안전한 편이 아니라는 자각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공동 창고 앞은 다시 사람들로 찼다. 그러나 이번엔 아침과 달랐다. 어제보다 더 많은 보리자루와 조미 곡물 꾸러미가 도착했고, 배급표의 줄이 눈에 띄게 줄었다. 아이들은 울지 않았고, 상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덜 보았다. 누군가 가격을 올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잠깐 멈췄다. 그 짧은 멈춤이 도시를 버티게 했다.
연우는 창고 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지나며 고개를 한 번씩 숙였다. 폭리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누가 길을 먼저 찾아내는지, 누가 물건을 끊기 전에 붙드는지 이제 모두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마지막 자루 하나가 발치에 굴러왔다. 연우가 몸을 숙여 바닥판을 풀자, 자루 안쪽에서 낡은 점토 조각이 나왔다. 얇게 굳은 판에는 창고 배치도가 눌려 있었다. 이상한 건 그 도면의 아래쪽 끝이었다. 분명 비어 있어야 할 하부 저장실 번호가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연우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저장실은 바로 그가 아까 담보로 건 열쇠가 여는 창고 아래였다.
"누가 이걸 깔아 놨지?" 최연실의 목소리가 떨렸다.
연우는 점토 조각을 뒤집어 붉은 먼지 한 줄을 봤다. 오늘 본 것보다 더 진한 색이었다. 방금 지나간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해 둔 흔적이었다.
"오늘 밤입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누군가 저 아래를 열 겁니다. 그리고 먼저 손을 대는 쪽이, 시장의 숨통을 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