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도서관장실 3층의 공기는 더 얇아졌다. 서명대가 뿜는 금빛 문장들은 벽을 타고 기어 내려와 바닥의 틈을 메우고 있었다. 백단아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종이 냄새가 아니라 오래된 인주와 먼지, 그리고 누군가의 숨이 얇게 찢기는 냄새가 따라붙었다. 방금 전까지는 출입 금지였던 통로가 이제는 출입 금지라는 말조차 없이 사람을 죄어 왔다. 이름이 찍힌 것만 남고, 이름이 흔들리는 것은 전부 폐기하겠다는 식이었다.
오렐은 계단 끝에서 그의 팔을 붙잡으려다 손을 거뒀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도망치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백단아는 그 떨림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말해.”
오렐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서명대는 확인 장치가 아닙니다. 이름을 분리하는 장치예요. 누가 주인이고 누가 보관자인지 갈라 놓습니다. 관장대리가 그걸 오래 썼습니다. 아르단님은 사라진 게 아니라, 보관명으로 밀려났어요.”
백단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머리 뒤편에서 찢어진 듯한 울림이 났다. 사라진 건 사람이 아니라 권한이었다. 그 사실은 위안이 아니라 더 잔인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죽음보다 보관이 더 오래가고, 지워짐보다 묶임이 더 견고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되돌리는 방법은.”
오렐은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 서명본입니다. 그런데 완전이라는 게 이름의 전부를 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록이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여야 해요. 지금은 백단아님 본명이 이미 대상자로 잡혀 있어서, 일반 서명은 곧 폐기예요. 대체 서명밖에 없습니다.”
백단아는 자신의 왼손 엄지를 내려다봤다. 아직 감각은 희미했다. 지난 교정의 대가가 손끝에 말라붙은 채 남아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금속판을 꺼냈다. 얇은 판 표면에는 아르단의 이름 조각이 얕게 새겨져 있었고, 한때 마지막 획이 닿았던 홈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 옆에는 아직 덜 마른 붉은 잉크가 번져 있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가 쓰면 되겠군.”
오렐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 이름을 빼앗아 갔다면, 그걸 돌려놓을 책임도 누군가가 져야지.” 백단아는 바닥에 흩어진 판결문 한 장을 발로 끌어당겼다. 거기에는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해 뜨기 전까지 아르단의 완전한 서명이나 대체 서명을 제출하지 못하면 백단아의 본명 자체를 폐기한다는 문장.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협박은 늘 단순했다. 살려 주는 척하면서 선택지를 좁혔다.
그때 서명대 아래쪽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백단아가 돌아서자 좁은 비밀문이 스스로 벌어지고, 인장권자의 보조인이든 관장대리든 알 수 없는 검은 외투의 사람이 걸어나왔다. 손에는 붉은 봉인이 들려 있었고, 봉인 위에는 이미 백단아의 본명이 절반쯤 새겨져 있었다.
“거기까지입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폐기 대상입니다. 더 쓰면 더 망가질 뿐이에요.”
백단아는 웃지도 않았다. “아르단을 가둬 놓고 그 말이 나오나.”
“가둔 게 아닙니다. 보관한 겁니다. 원고가 무너지지 않게.”
“그게 더 최악이지.” 백단아는 금속판을 서명대 홈에 밀어 넣었다. “무너져야 할 건 원고가 아니라, 사람을 보관명으로 만드는 규칙이야.”
관장대리가 봉인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오렐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더 이상 도망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제 증언부터 쓰십시오.” 그가 말했다. “저는 강요된 필사생이었습니다. 아르단님 이름을 옮긴 것도, 백단아님 이름에 접근 금지를 건 것도 저 사람이 시켰습니다.”
관장대리가 한순간 굳었다. 그 틈을 백단아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본명을 천천히 입술로 불렀다. 백, 단, 아. 마지막 음절이 목에 걸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서명대가 반응했다. 본명을 읽어 낸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려는 사람이 교정권을 가진다는 뜻처럼, 금빛 문장들이 뒤집혔다.
백단아는 떨리는 왼손 엄지로 붉은 잉크를 찍었다. 그리고 금속판 위에 자기 이름의 남은 획과 오렐의 증언, 아르단의 이름 조각을 한 줄로 겹쳐 적었다. 문장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단단했다.
아르단은 폐기되지 않았다. 아르단은 보관되지 않았다. 아르단은 원래 이름으로 환원한다.
서명대가 크게 울렸다. 관장대리의 봉인이 먼저 갈라졌다. 봉인 위에 새겨진 백단아의 본명 일부가 검은 가루로 부서져 바닥에 흩어졌다. 그 가루는 벽과 장서 사이를 타고 내려가며 다른 문장들을 밀어냈다. 닫혀 있던 문 하나가 열렸고, 그 뒤에 감춰져 있던 작은 기록실이 드러났다. 거기에는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아르단은 생각보다 훨씬 말랐고,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다. 그는 문밖의 빛에 눈을 찡그리며 몇 번이나 자기 손을 확인했다. 손등과 손목에 붉은 문장 자국이 감겨 있었지만, 이름을 붙잡고 있던 굵은 봉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백단아를 보자 바로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대신 너무 오래 참은 사람처럼 숨부터 골랐다.
“늦었네.” 그가 말했다.
백단아는 그제야 숨을 놓았다. “살아 있었군.”
“살아 있었지. 다만 내 이름이 이쪽에 남지 못했을 뿐이야.” 아르단은 천천히 서명대 쪽으로 걸어와, 방금 막 되돌아온 첫 장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오래 비어 있던 자리에 이제 분명하게 그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한때 배신자로 지목되던 문장은 검은 획으로 지워진 뒤 옆으로 밀려났다. 그 자리에 새로 적힌 문장은 짧았다. 믿지 말라는 말은 강요된 것이었다. 그가 지운 것이 아니라, 지우지 않기 위해 남긴 경고였다.
오렐은 그 장면을 보자 무릎이 꺾였다. 백단아가 팔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이제 도망치지 마.”
오렐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도망칠 곳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제는 증언해야 하니까요.”
백단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음절이 끝까지 닿았다. 여전히 목 안쪽이 아팠고, 왼손 엄지는 끝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름은 남았다. 서명대 위의 문장들이 하나둘 접히며 접근 금지 판결을 거뒀다. 도서관장실 전체를 덮던 폐기문이 서서히 걷혔고, 바닥에 남은 것은 붉은 교정 자국뿐이었다.
아르단은 백단아에게 금속판을 돌려주려다 멈췄다. “이건 네가 가져.”
“내 이름도 아닌데?”
“아니. 네가 없었으면 나는 끝내 보관칸에 묶여 있었을 거야. 이제 이건 증거이자 시작이야.”
백단아는 금속판을 받아 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을 타고 식어 갔다. 창문 사이로 해가 완전히 올라오자, 서명대 아래 깊은 보관칸 하나가 아주 잠깐 뜨거워졌다. 누군가의 완전한 서명이 아직 더 아래에 잠들어 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지금은 열 필요가 없었다. 돌아온 이름을 먼저 지키는 편이 맞았다.
백단아는 마지막으로 첫 장을 펼쳐 보았다. 이제 거기에는 사라진 주인공의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아무도 배신자로 적지 못하는 빈 여백이 있었다. 그는 그 여백을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 아주 얇은 종이가 숨을 쉬는 느낌이 전해졌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기록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침은 왔고, 이름은 폐기되지 않았으며, 사람은 사람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