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종이 세 번 울리기 전, 백단아는 동쪽 복도에 홀로 섰다. 복도는 아직 어두웠지만 문패 아래의 장부만큼은 벌써 눈을 떴다. 열쇠는 주머니 속이 아니라 손바닥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왼손 엄지에 남은 원고 인장은 마치 살아 있는 살점처럼 묵직했다. 그가 문 앞에 서자, 봉인실의 청동 문이 스스로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백단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문이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장부를 읽고 있었다.
그는 붉은 펜을 꺼내 문패의 끝에 붙은 오자를 먼저 지웠다. 대수롭지 않은 손질처럼 보였지만, 문은 그 작은 수정에 반응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의 서사는 큰 금이 아니라 작은 틈으로 무너졌다. 백단아는 왼손 엄지의 인장 자국을 열쇠 홈에 눌러 넣었다. 치직, 하고 열기가 손목까지 타올랐다. 쇠가 아니라 종이가 타는 냄새가 섞여 올라왔고, 안쪽 어둠에서 낮고 긴 울음 같은 마찰음이 들렸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사람의 숨보다 잉크 냄새가 더 진했다. 중앙 작업대 옆에는 오렐이 묶여 있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백단아는 잠깐 안심했다. 하지만 오렐은 살아 있는 쪽이 오히려 겁먹은 얼굴이었다. 백단아가 다가가자 오렐은 목에 걸린 가래를 삼키며 말했다.
"나를 열람생으로 적지 마십시오. 저는 쓴 적이 없습니다."
"누가 적었지."
"문장이요. 봉인실이요. 아니, 더 위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는 이름이 사람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백단아는 대답 대신 결박의 매듭을 살폈다. 끈은 단단했지만 매듭 끝이 비교적 새로웠다. 강압적으로 묶은 자의 손끝이 떠올랐다. 그는 칼을 꺼내 오렐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오렐이 한쪽 무릎을 꺾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백단아는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세워 안쪽 기록실까지 데려갔다.
기록실 한가운데에는 반투명한 장부 틀이 서 있었다. 틀은 비어 있었지만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백단아는 바로 그 점을 알아보았다. 비어 있는 자리는 기록이 없는 자리가 아니라, 기록이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된 자리였다. 그 아래 얇은 은판이 있고, 은판 위에는 한 줄짜리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르단 벨의 이름은 동쪽 봉인실에 보관한다.`
그는 숨을 삼켰다. 사라진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이름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사람이 통째로 지워진 게 아니라, 사람을 이름 조각으로 쪼개 보관하는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백단아는 문장을 노려보며 붉은 펜을 들어 올렸다. 오렐이 낮게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안 됩니다. 그 문장은 건드리면 다른 줄이 열립니다."
"열리게 두지 않을 거야."
백단아는 첫 줄의 동사를 긋고, 그 옆에 보관한다를 써 넣었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 아래 줄이 꿈틀거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눌렀다. 보관한다를 넘기지 않는다로 바꾸는 순간, 은판의 가장자리가 들썩였다. 철판 아래에서 숨겨 두었던 무엇인가가 미세한 비명과 함께 밀려 올라왔다. 오렐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은판 아래에는 얇고 투명한 이름띠가 있었다. 종이보다 얇고, 유리보다 흐릿한 띠 한 장. 그 위에는 붉은 글씨로 아르단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 글자 절반이 이미 지워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단아는 그걸 보는 순간 깨달았다. 아르단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기입 대기 상태에 있었다. 누군가가 다음 명의를 넣기 위해 그의 이름을 미리 접어 둔 것이다. 기록은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기록은 그를 비워 두었다.
그때였다. 백단아의 왼손 엄지가 갑자기 타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인장 자국이 다시 뜨거워졌고, 피부 아래로 무언가가 틀어박히는 느낌이 났다. 그는 짧게 신음을 삼켰다. 은판 위로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피가 닿자 장부 틀이 한 번 맑게 울렸고, 비어 있던 줄 맨 앞에 새로운 글자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백단아의 본명은`
오렐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말했다. "안 됩니다. 그 장치는 대체 명의가 하나 들어오면 바로 덮어 씁니다."
백단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늦었다. 그러나 늦었다고 해서 손을 떼면, 아르단의 이름은 물론 자기 이름도 빼앗긴다. 그는 고통으로 떨리는 왼손을 억지로 들어 은판 위에 다시 눌렀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붉은 펜으로 짧게 적었다.
`넘긴다`
그 한 단어를, `넘기지 않는다`로 밀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치직!
문장 사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봉인실 전체가 잠깐 흔들리더니, 장부 틀 아래에서 숨겨져 있던 작은 서랍 하나가 툭 하고 열렸다. 안에는 이름띠의 나머지 절반과 함께 얇은 증서가 들어 있었다. 증서에는 오렐의 이름과 날짜, 그리고 강제로 필사에 동원되었다는 기입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백단아는 그것을 먼저 오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네 증언이야. 숨기지 마."
오렐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왜 저를 풀어 줍니까."
"강요된 공모자였으면, 강요된 증언도 있었겠지. 죄를 혼자 다 뒤집어쓰게 둘 이유가 없어."
그 말이 끝나자 오렐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대신 눈을 내리깔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침묵 사이, 백단아는 이름띠의 나머지 절반을 옷 안쪽에 숨겼다. 그 순간 작업실 끝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봉인실의 바닥 장부가 스스로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눈앞에서, 아예 새 문장이 태어났다.
`백단아의 본명은 아르단의 보관명으로 접수되었다.`
백단아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접수되었다는 말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이미 받아 적었고, 받아 적힌 이상 실재로 취급된다는 뜻이었다. 그의 왼손 엄지는 더 이상 자기 손 같지 않았다. 감각이 반쯤 떨어져 나간 자리에 차가운 남의 이름이 붙는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봉인실의 안쪽 문이 닫히고 있었다. 철문이 맞물리며 내는 소리가 마치 마지막 확인 도장처럼 뚜렷했다.
문틈 너머로 종소리가 한 번 울렸다. 새벽이었다. 그리고 장부 틀 아래,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잉크가 마지막 한 줄을 밀어 올렸다.
`해제는 아르단의 완전한 서명이 있어야 한다.`
백단아는 그 문장을 읽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르단은 아직 이름띠 조각으로만 살아 있었다. 완전한 서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봉인실은 해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옷 안의 이름띠를 누르며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먼저 서명할 자리를 찾아야겠군."
대답은 없었다. 대신 닫힌 철문 바깥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문지방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