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장의 첫 문장은, 백단아가 읽기도 전에 이미 반쯤 현실이 되어 있었다.
`배신자 백단아는 동쪽 봉인실의 문을 열 것이다.`
단아는 종이를 내려다본 채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종이 위의 활자는 정갈했는데, 정갈해서 더 사악했다. 누가 썼는지 모를 정도로 정확한 문장은 늘 원고의 가장 잔인한 얼굴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붉은 펜을 들었다. 배신자를 증인으로, 열 것이다를 열지 않는다로 고치면 이 장면이 사라질 거라 믿었다. 첫 장에서는 그렇게 작동했다. 적어도 그때는, 문장보다 장면이 먼저 무너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순간 검붉은 잉크가 번지는 대신, 활자 사이에 얇은 금속선이 드러났다. 단아는 숨을 삼켰다. 문장이 표면이 아니었다. 표면 아래에 다른 판이 있었다. 그 판에는 글자가 아니라 압흔이 남아 있었고, 문장의 뜻은 그 압흔이 먼저 정하고 있었다.
`배신자 백단아는 동쪽 봉인실의 문을 열 것이다.`
붉게 덧칠해도 문장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 단지 다른 곳으로 숨었다. 마치 살아남기 위해 종이의 뒤편으로 미끄러진 것처럼.
"이런 방식까지 배운 적은 없는데."
단아는 낮게 중얼거리고 원고를 탁자에 눕혔다. 그의 손끝이 페이지 가장자리를 더듬자, 여백의 아르단 필체가 마치 미세한 양각처럼 손톱에 걸렸다.
`읽고도 믿지 말아라.`
그 아래에는 이전보다 더 짧고 날카로운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필사생을 찾아라.`
단아는 바로 떠올렸다. 첫 장에서 체포된 오렐. 손이 빠르고 눈이 좋았지만, 자기 손으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던 젊은 필사생. 독침을 숨겼던 건 그였지만, 그것이 곧 그가 범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첫 장의 사건은 미수로 끝났고, 그 미수는 누군가의 발 빠른 개입과 원고의 개정 덕분이었다. 만약 원고가 새 장을 자가 생성했다면, 오렐은 그 자가 생성의 첫 증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단아는 원고를 접어 품에 넣고 지하 회랑으로 내려갔다. 왕립 도서관의 취조실은 서가보다 낮은 곳에 있었고, 그보다 더 낮은 곳에서는 늘 종이가 숨을 쉬었다. 철문 앞에서 지키던 감시관이 그를 보자 한 발 물러섰다.
"편집관님, 아직 못 들어갑니다."
"누가 막았지?"
"명령이..." 감시관은 말끝을 흐리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쪽지를 보여 주었다. 종이에는 방금 막 적힌 듯한 잉크가 반짝였다. `백단아를 들여보내지 마라. 그가 들어오면 두 번째 장이 완성된다.`
단아는 쪽지를 빼앗아 벽에 대어 보았다. 잉크는 벽의 석회와 닿자 아주 작은 비명을 내고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뒤집혔다. 종이 뒷면에 다시 떠올랐다.
`그를 혼자 두지 마라.`
"누가 이걸 줬나?"
"저도 모릅니다. 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왔습니다."
단아는 더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누가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는 감시관을 지나 취조실 문을 열었다.
오렐은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들었다. 며칠 전보다 얼굴이 더 마르고, 눈 밑에는 잿빛이 눌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단아를 보자마자 공포보다 먼저 안도부터 스쳤다. 그 미묘한 표정이 오히려 단아를 찔렀다. 죄가 있는 사람의 안도는, 죄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때만 나온다.
"살아 있었군."
"저는 언제부터 죽어 있어야 했습니까?"
오렐의 목소리는 쉰 듯 가늘었다.
"대답은 네가 해야지. 왜 새 장이 생겼지?"
오렐은 웃으려다 실패했다.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제 손은 그 문장에 닿지도 않았어요. 누가 불러 줬습니다. 정확히는, 종이가 불렀습니다."
단아는 의자를 끌어 오렐 앞에 앉았다.
"누가?"
"검은 장갑을 낀 사람입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손만 봤습니다. 활자를 잡는 손이 아니라, 활자를 꺾는 손이었어요.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 장은 이미 한 번 실패했다. 편집관이 다시 쓰게 될 것이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던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 목소리까지 흉내 냈습니다. 아니, 당신 목소리보다 더... 비슷했습니다."
단아의 손이 잠깐 굳었다. 아르단의 여백 문장이 떠올랐다. 그를 믿지 말라. 내가 아니면 믿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면 내가 너를 믿지 않는다는 뜻일까. 두 해석 모두 끔찍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번 들었습니다. '동쪽 봉인실'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원고가 뜨거워졌어요. 제가 들고 있던 초안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독침을 숨겼습니다. 누군가의 지시가 아니었으면, 저는 왜 그런 짓을 했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단아는 오렐의 손목을 본다. 결박 자국 사이에 잉크가 배어 있었다. 필사 중에 남은 얼룩이 아니라, 활자에 눌린 흔적이었다. 그제야 단아는 알았다. 오렐은 자발적으로 공모한 게 아니었다. 원고는 그를 필사생으로 만든 뒤, 동시에 증거로 썼다.
"네가 본 장갑은 어느 손이었지."
오렐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왼손 엄지에 인장 자국이 있었습니다. 납작한 원형. 편집 도장 같았습니다."
단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 하나로 방향이 정해졌다. 편집 도장은 오로지 제본실에서만 찍을 수 있었다. 종이의 출처, 활자의 순서, 누가 먼저 읽었는지까지 남는 곳. 만약 새 장을 만든 자가 정말 도장 자국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서사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서사를 승인하는 사람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아무에게도 오늘 본 걸 말하지 마."
"말해 봤자 믿을 사람도 없습니다."
오렐이 고개를 숙였다. "단 한 가지. 아르단이라는 이름이 들릴 때마다,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처럼 종이가 반응했습니다. 제가 들은 그 목소리도... 죽은 사람 목소리 같지는 않았습니다."
단아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제본실은 금지 구역 아래, 오래된 분류실을 통과해야 나왔다. 여기서는 종이가 책이 되기 전의 냄새를 풍겼다. 풀과 가죽, 먼지와 쇠, 그리고 오래 머문 문장들의 숨. 중앙 작업대 위에는 커다란 압판이 있었고, 그 옆에는 이름이 지워진 납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판의 가장자리는 긁혀 있었는데, 긁힌 자국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한 글자만 도려낸 모양이었다.
아르단.
정확히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할 이름을 생각하는 순간, 단아의 머리 뒤가 저릿했다. 그는 판을 들었다. 금속은 차갑지 않았다. 종이처럼 미지근했고, 표면을 따라 아주 희미한 맥박이 있었다. 살아 있는 활자였다. 단아는 숨을 골랐다. 이 판을 건드리면 원고가 다시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는 이번 장의 첫 판단을 내렸다. 문장을 막는 대신, 문장을 만드는 자리를 찔러 보기로.
그는 편집 도장을 꺼냈다. 도장은 왕립 도서관 편집관에게만 허가된 붉은 인장으로, 원고에 결재를 남길 때 쓰는 물건이었다. 단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납판의 빈 자리에 도장을 눌렀다.
치직.
열기가 손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단아는 이를 악물었다. 살갗과 금속이 붙는 소리보다 더 분명한 건, 어딘가에서 종이 한 장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납판의 안쪽에서 얇은 슬롯 하나가 열렸다. 숨겨져 있던 장부 조각이 미끄러져 나왔다. 장부는 한 페이지가 아니라 반쪽짜리 목록이었다. 인명, 열람실, 봉인실, 그리고 맨 아래에 짧은 문장이 있었다.
`아르단 벨의 이름은 동쪽 봉인실에 보관한다.`
단아는 그 문장을 읽고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사라진 것은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보관하는 방식이었다. 누군가가 아르단을 사람에서 기록으로 바꾸었다. 기록은 지울 수 있고, 지우면 사라진다. 사람은 죽으면 남고, 기록은 남으면 죽는다. 원고가 아르단을 지웠다는 생각은 틀렸다. 누군가가 아르단을 원고 밖으로 밀어내어 보관해 버린 것이다.
그 순간, 제본실 뒤편에서 종이가 자동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단아가 고개를 들자, 작업대 옆 빈 원고지가 한 장씩 스스로 채워지고 있었다. 검은 글씨가 아니라 붉은 문장이었다.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서, 그의 문체와 비슷한 문장이 속도감 있게 찍혀 내려갔다.
`백단아는 내일 새벽, 동쪽 봉인실에서 아르단의 이름을 넘긴다.`
단아는 급히 장부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열기가 남은 손바닥을 움켜쥐자 통증이 다시 살아났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방금 찍힌 문장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계속 따뜻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원고가 그를 단순히 지목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역할을 배정하고 있었다. 넘긴다. 누군가에게 건넨다. 의지와 무관하게, 다음 동작까지 적어 두었다.
그는 뒤돌아 나가려다 멈췄다. 작업대 아래, 방금까지 없던 금속음이 들렸다. 손을 더듬자 작은 열쇠 하나가 있었다. 차갑고 무거운 동쪽 봉인실 열쇠였다. 주머니 속이 아니라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불길했다. 원고가 열쇠를 만든 건지, 누군가 넣어 둔 건지, 구별할 수 없었다.
단아는 열쇠를 쥔 채,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아주 낮게 말했다.
"좋아. 네가 먼저 적어도, 나는 다시 고친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봉인실 쪽 복도에서 낮은 종소리가 한 번 울렸다. 문이 열릴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이미 안쪽에서 문지방을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