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 너머에서 긁히던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문 바깥의 손이 더는 문지방을 훑지 않고, 마치 종이를 한 겹씩 떼어 내듯 느린 박자로 움직였다. 백단아는 한 발 물러서서 숨을 고르고 봉인실 바닥 장부를 내려다봤다. 새벽 전에 아르단의 완전한 서명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잉크로 눌려 있었다. 그런데 그 문장 아래, 아주 옅게 다른 줄이 떠올랐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장부가 아니라 얇은 전단지처럼 홀로 솟아오른 종이였다.
`도서관장실 3층 서명대에 아르단의 완전한 서명과 백단아의 본명 확인서를 제출하라.`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불응 시 백단아의 본명은 폐기된다.`
백단아는 이를 악물었다. 폐기라는 단어는 기록에서 지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제까지의 서사에서 그는 그것이 더 잔인한 형식으로 쓰인다는 걸 이미 배웠다. 지워진 이름은 빈칸으로 남지만, 폐기된 이름은 다른 이름을 먹고 자랐다. 그는 손목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통증을 눌러 참으며 봉인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은 잠겼고, 안에는 오렐과 작업대, 그리고 이름 없는 기록 장치가 남아 있었다.
오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입술이 떨렸지만 말은 또렷했다.
“저 문장, 방금 스스로 찍힌 겁니까.”
“네가 보기에도 그쪽이 더 비정상이겠지.”
백단아는 바닥에 떨어진 이름띠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아르단의 글자는 절반만 살아 있었지만, 그 절반은 확실히 사람의 손으로 쓴 글씨였다. 그는 조각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종이 섬유 사이에 잉크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잔향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가 문장을 끝까지 밀어 넣다가 끊긴 흔적이었다.
“완전한 서명.” 백단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이름만으로는 안 끝나는군.”
오렐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했다. “아르단은 늘 세 번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이름, 둘째는 획, 셋째는 봉인. 셋이 겹치지 않으면 장부가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분은 늘 마지막에 왼손을 한 번 더 눌렀습니다.”
백단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봉인실 한쪽 벽에 박힌 검은 원판이 눈에 들어왔다. 원판 중앙에는 손가락 굵기의 홈이 세 개 있었다. 이름과 획과 봉인. 정확히 세 번. 그는 원판 앞에 서서 손바닥으로 표면을 쓸었다. 차갑고 매끈했다. 서명판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척만 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 자체가 장부의 입이었다.
“아르단이 살아 있다면 이걸 직접 열었겠지.”
“지금은 안 살아 있잖아.” 오렐이 빠르게 말했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사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백단아는 웃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붉은 펜을 꺼냈다. 그것은 이제 문장을 고치는 도구가 아니라 틈을 여는 송곳에 가까웠다. 그는 이름띠 조각을 서명판 중앙에 올려놓고, 그 위에 자기 손바닥을 얹었다. 왼손 엄지의 인장 자국이 아직 뜨겁게 남아 있었다. 고통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렐, 너는 문 옆에 서 있어. 내가 열 때 소리 내지 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네가 본 대로야. 서명을 속이겠다.”
백단아는 펜 끝을 자신의 검지 끝에 살짝 찔렀다. 피가 한 방울 맺혔다. 그는 그 피를 첫 번째 홈에 먼저 눌러 넣고, 붉은 펜으로 이름띠 조각 위에 아르단의 초성처럼 보이는 짧은 획을 그렸다. 그 다음은 왼손 엄지였다. 감각이 무뎌진 살점이었지만, 인장 자국은 여전히 장부가 좋아하는 형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손목을 비틀어, 봉인판의 세 번째 홈에 엄지를 강하게 눌렀다.
치직.
숨이 아니라 종이가 타는 냄새가 났다. 서명판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들리더니, 내부에서 금속이 아니라 종이관 같은 구조물이 미세하게 돌아갔다. 봉인실 벽 전체가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켰다. 백단아는 무릎이 꺾일 뻔했지만 버텼다. 원판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원판 아래쪽 서고 벽면의 얇은 서랍 하나가 스르륵 밀려 나왔다. 그 서랍 안에는 접힌 진술서 한 장과, 검은 먹이 아직 남아 있는 납작한 서명판이 있었다.
백단아는 서명판을 집어 들었다. 표면에는 마지막 획이 비어 있었다. 이름은 시작되었고, 획은 이어졌고, 끝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빈자리를 보자마자 직감했다. 이건 완전한 서명을 위해 남겨 둔 마지막 틈이다. 누군가가 이 끝을 찍어야만 문장이 닫힌다.
진술서를 펼치자 오렐의 필체가 드러났다. 손이 떨린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용은 짧았다. 감시 아래 필사를 강요받았고, 지시되지 않은 문장은 모두 지웠으며, 백단아가 도착하기 전 이미 다른 이름이 장부에서 사라졌다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엔 아르단의 필체로 덧쓴 문장이 하나 있었다.
`그가 묻는다면, 내 이름이 아니라 내 자리를 찾으라고 해라.`
백단아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르단은 처음부터 이름이 아니라 서명권을 빼앗긴 상태였던 것이다. 이름이 남아 있었으면 사람이었겠지만, 서명권이 사라지면 장부에서 호출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사라진 첫 장의 공백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야기의 입구를 독점해 버린 뒤였다.
“오렐.” 백단아가 진술서를 접으며 말했다. “이걸로 네 목은 조금은 가벼워졌겠지.”
오렐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더 일찍 말했어야 했습니다.”
“지금 말한 것도 늦지 않았어. 대신 앞으로는 내 질문에 바로 답해.”
백단아는 진술서와 서명판을 옷 안쪽에 숨겼다. 바로 그때, 바닥 장부가 다시 움찔했다. 이번에는 글자가 올라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마치 이미 결론을 정해 둔 심판문처럼 문장 전체가 한 번에 인쇄되었다.
`백단아의 본명은 아르단의 보관명 아래로 재접수된다.`
문장이 찍히자마자 왼손 엄지의 감각이 푹 꺼졌다. 차가운 물에 잠긴 것처럼 손끝이 멀어졌다. 동시에 입 안에서 자기 이름의 첫 음절이 잠깐 미끄러졌다. 말하려고 했지만 발음이 늦었다. 백단아는 이를 악물고 장부 위를 내려다봤다. 방금 찍힌 줄 아래, 또 다른 줄이 붙었다.
`해가 뜨기 전, 도서관장실 3층 서명대에 반드시 출석할 것.`
그 문장은 명령이 아니라 소환장에 가까웠다. 봉인실 바깥에서 문지방을 긁던 소리도 멈췄다. 대신 청동문 전체가 아주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니었다. 문 자체가 앞으로 닥칠 일을 알고 떨고 있었다.
백단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르단의 마지막 획이 적힌 서명판, 강요된 진술서, 그리고 자기 이름을 잠식한 등록 문장. 손에 쥔 것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비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오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도서관장실로 가면, 네가 본 대로 말해. 누가 강요했고, 누가 먼저 지웠는지.”
오렐은 눈을 크게 떴다. “혼자 올라가시겠습니까.”
“아니. 내 이름을 지키러 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르단이 왜 첫 장에서 사라졌는지 확인하겠지.”
그는 문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순간 봉인실이 마지막으로 한 번 숨을 토해 냈고, 청동문 틈새로 새 하얀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백단아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종이에는 방금 전까지 없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붉은 원 안에 검은 글씨가 또렷했다.
`배신자 백단아, 서명대 앞에 서라.`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대기 서명자는 네가 아니다. 네 이름을 먼저 가져갈 자가 준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