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빈 활자
첫 문장에는 원래 사람 이름이 하나 있어야 했다.
`아르단 벨은 눈 내리는 왕립 도서관에서 첫 시체를 발견했다.`
백단아는 그 문장을 백 번 넘게 고쳤다. 발견했다, 마주했다, 내려다보았다. 작가는 마지막까지 첫 동사를 결정하지 못했고 편집자였던 단아가 `발견했다`로 확정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활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은 눈 내리는 왕립 도서관에서 첫 시체를 발견했다.`
아르단 벨이 들어갈 자리는 납 활자 다섯 개만큼 비어 있었다.
"백 편집관, 뭘 그렇게 보십니까?"
인쇄공 오렐이 단아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잉크 묻은 앞치마, 왼쪽 눈썹의 화상 자국, 늘 문장 끝을 삼키는 버릇. 원고에서 두 줄 등장하고 17장에서 죽는 조연이었다.
단아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서울의 편집실에서 최종 교정쇄를 읽고 있었다. 엎어진 커피, 모니터의 푸른 빛, 새벽 세 시 반. 눈을 감았다 뜨니 자신이 편집한 소설의 왕립 인쇄원이었다.
거울에서 본 얼굴은 원고에 이름만 있던 편집관 백단아와 같았다.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장난처럼 넣은 인물. 독자는 기억하지 못할 배경 인물.
"이름 활자가 빠졌습니다."
"어느 이름요?"
"아르단 벨."
오렐이 눈을 찌푸렸다.
"그런 사람은 왕립 명부에 없습니다."
단아는 활자함을 뒤졌다. `아`, `르`, `단`, `벨`에 해당하는 글자 조각은 있었지만 붙여 놓으면 금속 표면이 서리처럼 녹았다. 원고가 이름을 거부했다.
벽시계가 오후 다섯 시를 쳤다.
원작에서 도서관장 에런 모아는 밤 여덟 시 십 분에 죽는다. 독침이 든 반납 도장을 손에 찍고, 아르단이 여덟 시 이십 분에 시체를 발견한다. 범인은 재무관 카일 드렌. 동기는 금서 대출 기록 삭제.
아르단이 없어도 살인은 일어날 수 있었다.
단아는 초판 원고 뭉치를 들었다.
"도서관으로 갑니다. 이 판은 찍지 마세요."
"오늘 밤 왕실 납품입니다."
"첫 문장이 비었는데 무엇을 찍습니까?"
오렐은 이상한 사람을 보듯 단아를 쳐다봤다.
"원래 빈 문장입니다. 백 편집관이 어제 승인했잖아요."
### 2. 오지 않은 범인
왕립 도서관은 원고 묘사와 정확히 같았다. 검은 호두나무 계단, 별 모양 유리창, 겨울이면 잉크가 얼어붙는 북쪽 대출대.
정확히 같아서 더 불안했다.
단아는 반납 도장을 먼저 찾았다. 대출대 오른쪽 서랍, 붉은 손잡이, 밑면의 독침. 원작대로였다.
그는 손수건으로 도장을 감싸 꺼냈다.
밑면은 평평했다. 독침이 없었다.
"백 편집관? 폐관 뒤에 무슨 일입니까?"
도서관장 에런이 등잔을 들고 다가왔다. 살아 있는 얼굴을 보니 단아의 기억 속 시체 묘사가 잔인하게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오른손 검지의 검은 점, 책상 아래로 넘어진 의자, 입가에 묻은 은색 침.
"오늘 반납 도장을 쓰지 마십시오."
"왜요?"
"독이 묻었을 수 있습니다."
에런이 도장을 받아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범인이 아직 넣지 않았을 겁니다. 재무관 카일 드렌이 오면 들이지 마세요."
"카일 재무관은 사흘 전 남부로 떠났습니다. 왕명서도 제가 보관 중입니다."
단아의 확신이 처음으로 갈라졌다.
원작에서는 카일이 오후 일곱 시 오십 분에 비밀 통로로 들어왔다. 지금 남부에 있다면 알리바이를 만들었거나, 원작 범인이 아니거나, 이미 미래가 바뀐 것이다.
아르단이 사라진 것이 원인일까. 아니면 원작 자체가 거짓이었을까.
단아는 대출대의 출입 기록을 펼쳤다. 오늘 방문자 이름 사이에 한 줄이 비어 있었다. 활판 첫 문장처럼 사람 하나 분량의 빈칸이었다.
빈 줄 아래 종이가 눌려 있었다. 위에 이름을 썼다가 지운 압흔.
그는 연필 옆면을 눕혀 문질렀다.
`필사생 루엔, 16시 42분, 북쪽 금서고.`
루엔은 원고에 없는 이름이었다.
"필사생 루엔을 아십니까?"
"물론이죠. 세 달째 일합니다. 저기 있잖아요."
에런이 북쪽 서가를 가리켰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사다리 위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단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웃었다.
원고에 없던 사람이, 원작 살인 시각까지 세 시간 남은 자리에서.
### 3. 여백의 발자국
단아는 루엔을 바로 잡지 않았다. 현재 증거는 지운 출입 기록뿐이었다. 원고를 안다는 이유로 카일을 범인으로 단정했다가 이미 틀렸다.
그는 에런에게 폐관 점검 순서를 바꾸자고 했다.
"오늘은 남쪽부터 보시죠. 북쪽은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백 편집관이 서가 점검을요?"
"인쇄 오류 때문에 원본 대조가 필요합니다."
루엔이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대출대 장부를 마저 정리하세요."
단아가 말하자 루엔의 미소가 아주 잠깐 멈췄다.
북쪽 금서고 바닥에는 눈이 들어올 창문이 없는데 젖은 발자국이 있었다. 발자국은 벽에서 시작해 대출대 방향으로 이어졌다. 단아는 원고 첫 장 여백을 펼쳤다. 종이 가장자리에도 작은 물자국이 찍혀 있었다.
원고의 여백과 세계의 벽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붉은 교정 연필로 여백에 선을 그었다. 금서고 벽에 같은 붉은 선이 나타났다. 선을 따라 손을 대자 얇은 문이 열렸다.
안에는 카일의 외투와 인장, 그리고 독침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카일로 보이기 위한 소품을 준비했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루엔이 독침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서 있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알았습니까?"
"카일 드렌 말입니까?"
"아니요. 아르단 벨."
단아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당신은 그를 압니까?"
"모두가 잊었는데 편집관님만 기억하네요. 그럼 편집관님도 책 밖에서 왔습니까?"
루엔이 손을 튕겼다. 독침이 날아왔다.
단아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원고 첫 장의 문장을 붉은 연필로 그었다.
`에런 모아는 밤 여덟 시 십 분, 대출대에서 쓰러졌다.`
정확히 그런 문장은 원고에 없었다. 하지만 첫 장 전체가 그 결과를 향해 짜여 있었다. 단아는 사건을 고치는 편집자처럼 첫 장 위에 크게 썼다.
`동선 불일치. 관장 남쪽 서가 체류.`
원고가 뜨겁게 타올랐다.
독침은 단아의 뺨을 스치고 뒤 벽에 박혔다. 같은 순간 대출대 쪽에서 종이 울렸다. 원래라면 에런이 도장을 찍을 시각이었다. 그러나 동선을 바꾼 그는 남쪽 서가에 있었다.
첫 장의 글자들이 붉게 번지며 사라졌다.
단아의 머릿속에서도 문장 몇 개가 지워졌다. 카일이 왜 금서 기록을 지우려 했는지, 아르단이 시체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교정은 원고뿐 아니라 편집자의 기억도 잘라 냈다.
루엔이 두 번째 침을 들기 전에 단아는 비밀문 옆 활자 상자를 걷어찼다. 납 활자가 바닥에 쏟아졌다. 루엔이 미끄러졌고, 단아는 그의 손목을 눌렀다.
"아르단은 어디 있습니까?"
루엔은 피 묻은 입으로 웃었다.
"첫 장 밖으로 나갔죠. 당신보다 먼저."
### 4. 두 번째 장
에런은 살아 있었다.
경비대는 루엔과 독침, 카일의 위조 인장을 인계받았다. 원작 첫 살인은 미수로 끝났다. 단아가 아는 첫 장의 보상은 거기까지였다.
"내가 죽을 뻔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에런이 말했다.
"저도 제가 막았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루엔은 왜 나를 죽이려 했을까요?"
단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에서 지워진 문장 안에 동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인쇄원으로 돌아오자 오렐이 창백한 얼굴로 새 교정쇄를 내밀었다.
"백 편집관. 우리가 찍지 않은 판이 인쇄기에서 나왔습니다."
첫 장은 붉은 줄로 거의 읽을 수 없었다. 그 뒤에는 원래 없던 두 번째 장이 붙어 있었다.
`제2장. 편집자의 배신.`
첫 문장은 방금 생긴 사건을 기록했다.
`백단아는 예정된 죽음을 훔쳐 세계의 순서를 망가뜨렸다.`
두 번째 문장은 미래형이었다.
`그는 사라진 주인공을 찾는 척하며 왕립 기록고를 불태울 것이다.`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오렐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편집관님 이름이 있습니다."
단아는 종이를 등불 가까이 가져갔다. 본문 바깥 여백에 연필 자국이 있었다. 작가도 자신도 쓰지 않던 각진 필체였다.
`이 문장을 읽는 사람에게.`
`편집자 백단아를 믿지 마라.`
그 아래 서명은 없었다. 대신 납 활자 다섯 개가 눌린 자국이 있었다.
아르단 벨.
단아가 여백에 손을 대자 종이 반대편에서 누군가 같은 자리를 두드렸다.
한 번, 쉬고, 두 번.
원고 밖에서 보내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