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장은 보관 동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바닥은 유리처럼 매끈했지만 발밑으로는 차가운 배관이 숨 쉬고 있었고, 천장에는 카드 슬롯을 본뜬 금속 레일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정미연이 서 있었다. 검은 회수복 위로 얇은 은색 장갑을 끼고, 손끝마다 작은 봉인이 달려 있었다. 사람보다 절차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오전 9시 정각. 늦지 않았군요." 그녀가 말하자 벽면의 패널이 밝아졌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당신은 남은 카드로 하나의 전술을 증명하면 됩니다. 내가 먼저 제압하면 카드 한 장의 소유권이 회수팀으로 넘어갑니다. 당신이 내 회수선을 무너뜨리면, 승리한 카드 한 장은 사라지고 남은 카드 한 장의 권한이 유지됩니다."
태오는 손바닥에 남은 두 장을 눌러 보았다. 균열 방패. 마지막 후퇴. 둘 다 이미 한 번씩 상처를 입은 카드였다. 방패는 가장 믿을 만했지만, 단단한 만큼 무디고, 마지막 후퇴는 약했지만 움직임이 빨랐다. 그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소유권이 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기록이 바뀝니다." 정미연이 담담하게 답했다. "카드가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 다시 적히죠."
그 말 끝에 시험장의 바닥이 낮게 울렸다. 레일 사이에서 얼음빛 선이 올라오고, 빈 슬롯들이 하나씩 잠겼다. 출입 인장이 아직도 태오의 주머니 안에서 차갑게 눌러붙어 있었다. 이 시범전은 단순한 실력 확인이 아니었다. 누가 어떤 손실을 감수할지 보는 자리였다.
정미연이 첫 장을 펼쳤다. 회수 장갑. 검은 금속의 장갑 그림자에서 가느다란 사슬이 피어올랐다. 사슬 끝에는 작은 봉인 못이 달려 있었다. 카드 한 장을 건드리기만 해도 소유를 박아 버리는 형식의 카드였다. 태오는 본능적으로 균열 방패를 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마지막 후퇴를 먼저 내밀었다.
"그걸 먼저?" 정미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약한 카드부터 배웁니다."
마지막 후퇴가 바닥에 닿자 회수 장갑의 사슬이 즉시 감겨 들어왔다. 얇은 카드가 끌려가며 비명을 지르듯 떨었다. 태오는 그 순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뺏기게 둔 것이다. 카드 가장자리부터 회색이 번지며 봉인 못이 박혔다. 마지막 후퇴는 잠깐 버티다가, 사슬의 압력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억했다.
태오는 그 찰나의 떨림을 읽었다. 사슬이 내려오는 각도, 봉인 못이 박히는 깊이, 회수 장갑이 열을 빼앗는 순서. 마지막 후퇴는 패배하면서 상대의 구조를 배웠다. 카드의 표면에 금이 가고, 그 금 사이로 미세한 붉은 기운이 번졌다. 정미연이 아차 싶다는 듯 장갑을 당겼지만 이미 늦었다. 태오는 그 카드를 버린 게 아니었다. 상대의 규칙을 그 안에 새기고 있었다.
"그 카드는 이제 반쯤 죽었군요." 정미연이 말했다.
"아직 쓸 수 있습니다." 태오가 답했다.
그는 마지막 후퇴를 아래로 낮춰 회수 사슬을 일부러 더 깊이 물게 만들었다. 카드가 짓눌리자 시험장 바닥 아래의 배관 열이 올라왔다. 냉각 시스템이 반응한 것이다. 회수 장갑은 원래 차가운 접촉을 전제로 봉인을 완성하지만, 마지막 후퇴가 먼저 온도를 읽어 버린 이상 봉인의 타이밍이 어긋날 수 있었다. 태오는 그 어긋남을 기다렸다.
정미연이 두 번째 사슬을 뻗었다. 이번에는 태오의 손목을 노렸다. 그 순간 태오는 균열 방패를 앞세웠다. 방패는 두꺼운 금빛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고, 상처 입은 자리에 이미 여러 겹의 흔적이 쌓여 있었다. 그는 방패를 사슬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금속이 울고, 카드 표면의 균열이 한 번에 벌어졌다.
그건 무모한 충돌처럼 보였지만 태오는 계산하고 있었다. 마지막 후퇴가 읽은 회수 패턴을 방패가 받아서 부서지게 만들면, 방패는 상대의 봉인 에너지를 품은 채 가장 마지막에 터질 수 있었다. 패배한 카드가 정보를 얻고, 승리한 카드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승리해야 할 카드를 가장 뒤에 놓아야 했다.
정미연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스스로 손실을 정하는군요."
"그게 제 덱입니다."
태오가 방패를 더 밀어붙였다. 회수 장갑의 봉인 못이 방패 면에 박히는 순간, 마지막 후퇴가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배운 회수 패턴을 그대로 흉내 내며 사슬의 결속을 비틀었다. 정미연의 절차가 순간적으로 꼬였다. 그 한 박자 어긋난 틈에 태오가 방패를 돌아 올려 쳤다. 균열이 생긴 면이 사슬의 약점을 찢었다. 회수 장갑이 반동을 먹고 뒤틀리며 시험장 한쪽 패널을 강제로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쏟아졌다.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열 배출로가 열렸고, 정미연의 회수 라인이 순간적으로 빨려 들어갔다. 태오는 곧바로 균열 방패를 꾹 눌렀다. 이미 금이 간 카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카드 속 기억이 마지막으로 번쩍였고, 그 광채가 사슬의 잔류 봉인을 태워 버렸다. 정미연의 장갑이 멈췄다.
승패가 갈렸다.
방패는 태오의 손끝에서 얇은 회색 재처럼 풀렸다. 카드 한 장을 잃는 감각은 이미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방패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태오는 이를 악물었다. 손에는 마지막 후퇴만 남았다. 그 카드의 표면에는 방금 읽어낸 회수 패턴이 붉은 선처럼 얽혀 있었다. 약한 카드가 강해진 것이다.
정미연은 자신의 장갑을 천천히 거두었다. "승리 판정. 임시 접근권 발급."
벽면 패널이 켜지며 작은 금속 표식이 내려왔다. 이번에는 전광판형이 아니라 시험장 전용 열람 좌표였다. 태오는 그것을 받자마자 손끝이 저릿해졌다. 좌표는 냉장 보관 동이 아니라 더 아래층의 재분류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안에 수집가 0의 명단이 겹쳐 떠올랐다.
태오는 숨을 삼켰다. 조부의 카드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붉게 깜빡였다. 불을 기억한 패잔병. 상태는 보류가 아니었다. 오늘 18:00 재분류 창으로 이관, 공용 경매실 임시 대기.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출입 기록 부재 시 자동 통합 폐기.
"폐기?" 태오가 낮게 말했다.
정미연은 그 문장을 보지 않고도 무슨 뜻인지 아는 듯했다. "비공개 덱의 카드가 오래 머물면 통합됩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아요. 번호를 잃죠."
"경매실은 어디죠."
"중앙 홀 아래. 하지만 오늘 오후 출입문은 한 번만 열립니다. 18시예요. 그 전에 못 들어가면, 조부의 카드가 다른 목록으로 넘어갑니다. 다시는 추적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태오는 열람 좌표를 쥔 손을 천천히 접었다. 마지막 후퇴의 붉은 균열이 손끝에 닿자, 카드가 아주 작게 떨렸다. 방패를 잃은 대가가 생각보다 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공격과 후퇴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미 상처를 입고 있었다. 오히려 좋았다. 강한 카드보다, 제때 무너질 수 있는 카드가 필요했다.
정미연이 한 발 물러서며 시험장 문을 열었다. "당신이 진짜 찾는 게 카드인지, 카드가 지나온 기록인지 아직 모르겠군요. 다만 하나는 분명합니다. 오늘 18시 전까지 중앙 홀 아래로 내려오세요. 못 오면, 수집가 0이 당신의 이름도 다시 적을 겁니다."
태오는 열람 좌표를 주머니에 넣고 시험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차가운 복도 끝에서 경매실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깜빡였다. 18:00. 그 숫자가 점점 커질수록, 조부의 카드와 수집가 0의 그림자는 더 짙어질 것이다. 그는 남은 카드 하나를 손바닥에 눌렀다. 마지막 후퇴의 균열이 미세하게 빛났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었다. 정각 전에 내려가야 했다. 아니면, 올라온 경매표가 그의 이름부터 바꿔 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