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실에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멎지 않았다. 프린터는 멈춘 듯 보이다가도 한 박자 뒤에 다시 윙 하고 떨렸고, 방금 뽑힌 종이의 가장자리가 뜨겁게 구겨져 있었다. 세경은 그 종이를 쥔 채 한 번 더 읽었다. 보호자 동반 시, 문은 두 배로 열린다. 문은 어디였고, 보호자는 누구였는지, 그 짧은 문장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나." 문 옆에 선 동생이 낮게 불렀다. "내 이름 말고, 나한테 하나 더 알려줘."
세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 겁을 먹은 척하다가도 문장 끝을 삼키지 못하는 습관, 불안할수록 손가락으로 바지선을 문지르는 버릇, 사람을 부를 때 유독 끝을 올리는 억양. 그 조각들이 임도윤이라는 이름을 눌러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얼굴을 잃었다고 해서 모든 단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은 단서가 너무 적어서, 사람이 아니라 증거처럼 다뤄야 할 뿐이었다.
우석이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어깨를 맞은 쪽이 이미 붓고 있었지만 그는 억지로 몸을 세웠다. "플랫폼 0까지 뛰면 자동 해제 창이 열릴 겁니다. 그런데 신호실에서 그 문장을 누가 계속 찍는지부터 잡아야 해요."
"잡을 시간 없어." 세경이 말했다. "열리는 쪽으로 들어가."
"세경 씨, 그건 자살에 가깝습니다."
"아니." 그녀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문이 두 배로 열리면, 두 배로 막을 수 있겠지."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세경은 동생을 힐끗 보았다. "너는 내 뒤로 붙어. 누가 네 이름 부르면 대답하지 마. 먼저 발소리 봐."
동생이 입술을 깨물었다. "난 누나가 누군지 알아."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세경은 자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보다, 그가 여전히 자신을 믿는다는 사실이 더 무거웠다.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플랫폼 쪽으로 뛰었다. 우석이 뒤를 받쳤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역은 이미 자정 이후의 열기와 냉기를 뒤섞고 있었다. 먼 곳에서 열차 안내음이 흘러나왔고, 그 위로 전광판의 숫자가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0시 16분. 0시 17분 직전이었다.
플랫폼 0의 문은 반쯤 닫혀 있었다. 자동 해제는 이미 일부 풀려 있었고, 문틈마다 바람이 칼처럼 새어 나왔다. 세경은 비상문 옆 제어 패널을 봤다. 잠금 상태가 정상처럼 보였지만, 표시등 하나가 끊긴 듯 어둡게 죽어 있었다. 누군가 수동으로 손을 댄 흔적이었다. 회색 코트 남자가 말한 대로였다. 시스템은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누가 어디를 미리 흔들어 두었는지에 따라 움직였다.
"뒤로." 세경이 동생을 옆 기둥 뒤로 밀었다. "내가 말할 때만 나와."
그 순간 승강장 끝에서 전기충격기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가 튀었다. 세경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검은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난간 너머로 뛰어내렸다. 그는 정비 인원과 같은 부류였지만, 얼굴은 더 말라 있었고 눈빛은 이상할 만큼 비어 있었다. 그는 세경이 아니라 동생 쪽을 먼저 봤다. 목표가 바뀌어 있었다.
"임도윤, 맞지?" 남자가 물었다.
세경은 대답 대신 방송선을 잡아당겼다. 천장에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승강장 안내음이 끊겼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드러났다. 누구를 노리는지 숨길 수 없게 된 것이다. 남자가 순간적으로 시선을 잃은 틈에 우석이 계단 아래에서 몸을 던졌다. 그는 부상한 어깨로 상대의 허리를 밀어 벽에 처박았다. 둘의 몸이 충돌하며 쇳소리가 울렸고, 전기충격기가 바닥으로 굴렀다.
세경은 그 사이 제어 패널로 달려가 수동 해제 레버를 끝까지 당겼다. 잠금이 한 번에 풀리지 않고 절반만 밀려 올라왔다. 보호자 인증을 요구하는 붉은 불빛이 깜빡였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 사번을 입력했다. 경고음이 울리며 화면에 한 줄이 떠올랐다. 등록 대상: 임세경. 보호자: 임도윤.
"누나, 그거 하면 네 이름이 남아." 동생이 외쳤다.
"남겨." 세경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가 살아야지."
그 말과 함께 비상문이 두 배로 벌어졌다. 문틈이 넓어지자 안쪽 숨은 공간에서 종이 더미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누군가 신호실 뒤쪽에 작은 인쇄선을 따로 물려 두고 있었다. 바닥으로 흩어진 종이에는 같은 문장이 반복되어 있었다. 0시 5분, 플랫폼 0, 대상: 임도윤. 그 아래에는 새로 찍힌 한 줄이 더 있었다. 대상 변경 가능. 보호자 우선.
세경은 그것을 보자마자 뒤가 서늘해졌다. 공격은 동생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향해 옮겨가고 있었다. 정비 인원을 누른 채 버티던 우석이 급히 외쳤다. "세경 씨! 뒤!"
늦었다. 플랫폼 끝 어둠에서 누군가가 한 발 먼저 움직였다. 회색 코트의 소매가 잠깐 스쳤고, 그 손에는 열차표 펀치기가 아니라 오래된 직원용 호루라기가 들려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목소리는 너무 선명했다. 마치 예전에 한 번, 아니 네 번쯤 들은 것처럼 익숙했다.
"네가 문을 열 거라고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는 낮게 말했다. "네가 기억을 잃을수록, 역은 더 정직해지지."
세경은 그 말에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찍었지."
"찍은 건 내가 아니야." 회색 코트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네가 다음에 누구를 잊을지 계산할 뿐이야."
그가 몸을 돌려 어둠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세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그의 코트 자락을 스쳤지만 붙잡히지 않았다. 대신 거기서 낡은 역무원 명찰 하나가 떨어졌다. 금이 간 투명 플라스틱 안쪽에 적힌 이름은 빛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우석이 그것을 집어 들려다 멈췄다. 이름 대신 번호만 선명했다. 1205-3.
전광판이 그때 마침 0시 17분을 넘겼다. 초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플랫폼 전체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제부터는 반복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세경은 그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다만 현실이 되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방금 전까지 붙들고 있던 한 장면이 미끄러져 나갔다. 동생이 문 옆에 서 있던 얼굴의 윤곽. 눈매. 코끝. 입술의 모양. 아주 짧은 시간에 그것들이 흐려졌다.
"누나!" 동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세경은 그제야 그가 아주 가까이 와 있다는 것만 알았다.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데도 몸이 반응했다. 그녀는 무너지듯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름은 알았다. 목소리도 알았다. 그런데 손에 닿은 체온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세경은 자신이 또 하나를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는 이름이 아니라 얼굴이었다.
그때 프린터가 플랫폼 쪽 스피커실 안에서 다시 울렸다. 방금 전 신호실과는 다른, 더 깊고 낮은 진동이었다. 세경이 고개를 돌리자, 회색 코트 남자가 남기고 간 출력지가 반쯤 접힌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펼치자 마지막 줄이 붉은 잉크로 찍혀 있었다.
0시 5분, 대상: 임세경.
그 아래, 한 번도 보지 못한 문구가 덧붙어 있었다.
보호자 없음.
세경은 종이를 쥔 채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누가 보호자인지 묻는 시스템은 이제 끝났다. 이번엔 그녀 자신이 표적이었다. 그리고 전광판 아래, 아직 잡히지 않은 회색 코트 남자의 그림자가 다음 역무실 쪽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