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17분이 지나자 역은 다시 보통의 밤처럼 보였다. 열차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늦은 승객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세경에게는 아무것도 보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반복은 멈췄는데도 귀 안쪽에서는 아직 12시 05분의 비명이 맴돌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플랫폼 쪽을 훑다가, 개찰구 옆에서 서성이는 남자를 보고 숨을 삼켰다. 검은 머리, 젖은 재킷, 왼손에 든 편의점 비닐봉지. 분명 낯선 얼굴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세경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가 멈췄다. 얼굴은 미끄러지듯 지나가 버리고, 대신 입술 움직임과 손끝만 보였다. 남자가 낮게 말했다.
"누나."
그 한 마디가 세경의 귓속에서 오래된 문을 열었다. 어릴 때 눈이 오면 그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세경은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떠오른 것은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던 겨울의 공기뿐이었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나 알아보겠어?"
세경은 대답 대신 옆을 돌아봤다. 회색 코트 남자 우석이 난간에 기대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장면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했다.
"네 번째까지 본 사람이라면, 얼굴로는 못 알아볼 거예요."
세경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왜 또 여기 있어요?"
"네가 놓치면 다음은 더 시끄러워질 테니까."
우석은 동생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은 네 동생 맞아요. 네가 지금 믿어야 하는 건 얼굴이 아니라 버릇이죠. 왼쪽 어깨를 먼저 들고, 말을 걸기 전에 숨을 한 번 삼키는 습관까지."
세경은 동생을 다시 봤다. 정말로 그의 왼쪽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어릴 때 계단을 오를 때면 항상 그렇게 했던가. 기억은 안 나는데, 몸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잃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동생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대신, 대신 알고 있던 수많은 표정이 한 장씩 지워지고 있었다.
"왜 왔어?"
동생은 숨을 고르고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안에는 낡은 비상등 배터리와 접힌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이 번호로 연락이 왔어. '12시 17분 이후에 역에 들어오라'고. 그러면 엄마가 남긴 물건을 돌려준다고 했어. 그런데 플랫폼에서 이상한 여자도 봤고, 누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어."
세경은 봉지 속 종이를 받아 펼쳤다. 오래된 사물함 번호와, 지금은 폐쇄된 지하 신호실의 도면 일부가 적혀 있었다. 맨 아래에는 붉은 볼펜으로 작게 적힌 숫자 0-5가 있었다.
우석이 말했다. "그게 단서예요. 붉은 우산 여자는 끝이 아니었어. 그녀는 열차 안에서 독침을 썼고, 누군가는 역 아래에서 시간을 맞추고 있죠."
"무슨 소리예요?"
"플랫폼 0 아래에 죽은 신호실이 하나 있어요. 옛 정비 동선으로만 내려갈 수 있죠. 거기서 역 시계의 기준이 한 번씩 흔들립니다. 12시 05분에 사람이 떨어진다고 보이게 만드는 장치도, 다른 시간으로 밀어 넣는 장치도 거기 붙어 있어요."
세경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당장 우석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네 번의 반복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동생이 왼손으로 봉지를 잡는 습관까지 정확히 짚은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동생을 개찰구 안쪽으로 더 밀어 넣고 말했다.
"둘 다 따라와요. CCTV부터 확인하죠."
제어실 불빛은 싸늘했다. 세경은 출입 기록과 화면을 동시에 띄웠다. 12시 02분, 붉은 우산 여성이 플랫폼 끝으로 향한다. 12시 04분, 회색 코트가 피해자 옆에 선다. 12시 05분, 밀침처럼 보였던 동작 뒤에 실제로는 어떤 손이 어깨를 받치는 순간이 찍혀 있었다. 그 사이, 화면 한쪽 끝으로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지나갔다. 얼굴은 모자에 가려졌지만 발걸음이 묘하게 급했다. 그는 지하로 내려가는 경사로 쪽을 한 번 돌아봤고, 그 순간 손목에 붙은 반사테이프가 화면에 번쩍였다.
세경은 화면을 멈췄다. "저 사람이에요. 붉은 우산이 아니라 공범이 따로 있었어요."
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한 네 번째 반복은 여기까지예요. 네가 뭘 놓치는지, 누가 시간을 쓰는지 보는 거."
"그럼 지금 내려가야겠네요."
세경은 망설이지 않았다. 규정은 이미 첫 번째 반복에서 부서졌고, 그녀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절차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동생에게 비상 열쇠를 쥐여 주고 말했다.
"내가 신호실 확인할 동안 넌 여기 있어. 우석 씨는 뒤를 봐요."
동생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누나, 혼자 가지 마."
그 말에 세경은 잠깐 멈췄다. 그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조차 이제는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고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오래된 계단은 습기를 먹어 미끄러웠고, 벽에는 끊긴 전선이 죽은 뱀처럼 매달려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작업복 남자가 튀어나왔을 때, 세경은 이미 그가 어디서 나타날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벽면 비상벨을 눌러 철문을 내리고, 휴대용 방송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정비 구역 비상 점검입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남자는 놀라 뒤로 물러섰고, 그 틈을 동생이 놓치지 않았다. 위에서 따라내려온 그는 세경이 준 열쇠로 잠금 레버를 당겨 남자의 퇴로를 막았다. 세 사람이 좁은 통로에 엉키는 순간, 남자의 품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세경이 먼저 주워 들었다. 화면에는 예약 발송 목록이 떠 있었다.
0시 5분, 플랫폼 0, 대상: 임세경.
그 아래에는 다른 문장도 있었다. '신호실 문은 자정 직전 자동 해제. 대상이 두 명이면 기억이 더 많이 지워진다.'
세경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우석을 찾았다. 그는 계단 위에서 그 메시지를 이미 읽은 얼굴이었다. 입가엔 설명하기 어려운 그림자가 걸렸다.
"당신이 이걸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다기보다, 네가 결국 보게 될 거라고 확신했죠."
동생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그럼 누나가 다음 표적이야?"
세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휴대폰 화면을 다시 내려다봤다. 예약 발송은 멈출 수 없는 시간처럼 초 단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23시 58분. 신호실 잠금 해제까지 2분 13초. 그녀는 지금 당장 위로 올라가 동생을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플랫폼 0 아래에 있는 누군가가 남는다. 아니면 지금 문을 열고, 0시 5분의 진짜 목적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
세경은 휴대폰을 쥔 채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동생의 얼굴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목소리만 또렷했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누나, 이번엔 네가 정해야 해."
그리고 바로 그때, 지하 신호실 문 안쪽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