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구 3의 문은 사람을 기다리는 문이 아니라 이름이 비는 시간을 기다리는 문 같았다. 얇은 철판 사이로 새어 나오는 냉기가 발목을 감싸자, 라온은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이 창고인지 관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생각부터 했다. 문 옆 심사 단말은 오래된 인쇄기처럼 낮게 떨고 있었고, 화면에는 한 줄만 떠 있었다. 회수 서명 대기. 관계 확인 실패 시 영구 봉인.
뒤쪽에서 유진이 숨을 죽였다. 도겸은 활을 든 채 말이 없었다. 아까부터 그들의 시선은 라온의 손끝을 향해 있었다. 그 손이 기록관의 인장을 가진 손인지, 조작자의 손인지, 이제는 둘 다 아닌 손인지 확인하려는 눈이었다.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왼손 엄지를 만졌다. 피부 아래에서 인장이 뜨겁게 식어 가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서명만 하면 돼요?"
단말의 금속 음성이 대답했다. "서명자는 보관 대상과의 관계를 문장으로 명시할 것. 거짓된 관계는 허용되나, 책임은 서명자가 부담한다."
도겸이 낮게 말했다. "책임을 네가 다 뒤집어쓸 셈이야?"
"원래 기록은 그런 식으로 굴러갑니다."
라온은 화면 아래의 공란을 보았다. 가족. 지인. 동행자. 타인. 문장이 아니라 칸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방식은 익숙했지만, 이번만큼은 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민서린의 이름이 보관표에 적혀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한 차례 무너졌고, 그 이름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면 남는 것은 빈 종이뿐이었다. 빈 종이는 탑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었다.
유진이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다른 거 못 써요? 조작 기록 같은 거. 당신이 숨긴 거, 그걸 바치면 안 돼요?"
라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미 바쳤다. 조작한 사망 대장의 원본도, 민서린과의 관계를 증명하던 기억의 절반도, 탑은 다 받아먹고 있었다. 지금 남은 것은 끝까지 숨겨 온 한 문장이었다. 숨겨 왔기 때문에 더 위험한 문장. 입 밖에 내는 순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 써 버릴 문장.
그는 천천히 말했다. "민서린은 내 누이가 아닙니다."
말이 떨어지자 단말의 화면이 하얗게 번쩍였다. 도겸이 욕을 삼켰고, 유진은 얼굴을 굳혔다. 라온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었다. 민서린은 내 누이가 아닙니다. 그 문장은 거짓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싼 진실이었다. 그가 이 문장을 말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찢어졌다. 어린 시절의 복도, 푸른 머리끈을 묶어 주던 손, 비 오는 날 먼저 우산을 들어 주던 작은 어깨, 그런 장면들이 차례로 색을 잃었다. 이름은 남았는데, 이름을 붙들던 온기가 빠져나갔다.
손끝에 금빛 잉크가 묻었다. 라온은 그 잉크로 공란에 서명했다. 기록관 민라온. 글자를 다 쓰는 순간, 인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손목까지 불이 번졌다. 피부 아래에서 뭔가가 타는 냄새가 났다. 그는 이를 악물었지만, 타들어 가는 감각은 멈추지 않았다. 서명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이름의 끝자락을 눌러 찍는 동안, 민서린을 누이라 부를 수 있던 마지막 확신이 서류 위로 스며나갔다.
딸깍.
심사 단말의 잠금이 풀리자 문 아래로 얇은 칩이 미끄러져 나왔다. 라온이 그것을 집어 들기도 전에 거대한 철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냉기보다 먼저 젖은 종이 냄새가 밀려왔다. 오래 보관한 서류가 숨을 쉬는 냄새, 사람보다 기록이 먼저 늙는 냄새였다.
안쪽은 예상보다 좁았다. 방 한가운데 투명한 보관관이 서 있었고, 그 안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얇은 장치가 맥박과 호흡을 조용히 맞추고 있었다. 갈색이던 머리카락은 희게 바래 있었고, 손목에는 14층 인계 태그가 감겨 있었다. 라온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잃어버린 줄 알았던 한 조각이 가슴 한복판을 후벼 팠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였다.
민서린이 눈을 떴다. 마른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늦었네."
라온은 숨을 들이켰다가 실패했다. 목이 잠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민서린은 그 반응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한 얼굴이었다. 마치 그가 여기에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기록실이 나를 지켜 준 게 아니야." 그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내 이름을 먼저 적어 놨어. 나를 살리려고 적은 건지, 숨기려고 적은 건지 아직 몰라. 그런데 네 이름이 그 아래에 있었어."
라온은 보관관 옆 패널을 눌렀다. 화면이 바뀌며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보관 대상 확인 완료. 이관 준비 개시. 15층 심사열 대기. 이관 재개까지 12분 00초. 서명자 재확인 필요. 그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더 잔인한 건, 살아 있는 순간조차 누군가의 이동표로 관리된다는 점이었다.
"당장 빼내야 해요." 유진이 뒤에서 말했다. "여기서 오래 있으면 더 위로 넘어가요."
도겸은 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무 늦기 전에 다른 서명이 필요하다는 뜻이군."
라온은 패널을 더 눌렀다. 보관관 안의 잠금은 풀리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칸이 떠올랐다. 재인증 위치: 14층 기록실. 담당자: 기록관 민라온. 조건: 서명 원본 제출. 화면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현재 서명은 임시 허가만 부여함.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동료들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이 이제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라온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제야 제대로 느꼈다. 민서린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왜 그녀를 지켜야 하는지 설명할 마지막 기억은 이미 타 버린 뒤였다. 그래도 발은 움직였다. 그는 보관관 옆의 해제 버튼을 쥐듯 쥐고 말했다.
"열어 둬요. 내가 위로 올라가서 다시 서명하겠습니다."
민서린이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 약해서 금방 끊겼지만, 라온은 그 소리 하나로도 자신이 아직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입술만 움직여 덧붙였다. "이번엔 네가 나를 이름으로 찾지 못할 수도 있어."
그 말이 끝나자 보관관 바깥 스피커에서 차가운 경고음이 울렸다. 이관 예정 시간 변경. 11분 20초. 서명자 재확인 미이행 시, 대상 즉시 15층으로 이송.
라온은 보관관을 붙잡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위로 올라가야 했다. 기록실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누구의 서명을 다시 받아야 하는지, 혹은 또 어떤 거짓을 바쳐야 하는지 정해야 했다. 보관관의 유리 안쪽에서 민서린이 아주 작게 그의 손바닥을 두드렸다. 살아 있다는 신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밖에서는 시계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