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말 끝, 무거워진 흙과 젖은 마스크 냄새 속에서 재하는 타이탄스가 번트를 포기했다는 걸 먼저 알아챘다. 번트는 기습이 아니라 습관처럼 꺼내는 카드였고, 습관은 이미 한 번 꺾였다. 상대가 카드를 접는 순간은 늘 비슷했다. 눈이 먼저 흔들리고, 어깨가 늦고, 코치의 손이 더 크게 움직인다. 지금 타이탄스 더그아웃에서 보이는 건 그 셋이 동시에였다. 좌타 대타는 배트를 짧게 쥐고 있었지만 눈은 공보다 3루 코치에게 더 자주 갔다. 스퀴즈를 치는 타자의 눈이 아니라, 실패하면 자기 목이 먼저 날아갈 사람의 눈이었다. 재하는 그 공포를 읽는 데 익숙했다. 공포는 몸보다 먼저 발끝을 망설이게 한다. 발끝이 망설이면 타이밍이 죽고, 타이밍이 죽으면 작전이 부서진다.
민석은 마운드에서 턱을 한번 만졌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재하는 그 떨림을 보고 낮은 코스를 바로 고르지 않았다. 오히려 몸쪽 위를 한 번 열어 보이게 했다. 높은 공을 던질 것처럼 시선과 글러브를 들고, 마지막에 바깥으로 죽는 공을 요구했다. 타자는 공보다 손가락을 먼저 본다. 손가락이 두려우면 배트는 빨리 안 나온다. 재하는 그 사실을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팀에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늘 투수였고, 그 다음은 포수였으니까.
민석이 던진 공은 홈 플레이트 앞에서 한 번 죽었다. 타자는 늦게 번트를 댔다. 배트 끝이 공을 눌렀고 타구는 부드럽게 흘러내릴 듯 보였다. 그런데 재하는 이미 미트에서 공이 사라지는 순간 몸을 앞쪽으로 던지고 있었다. 왼손으로 잡지 않았다. 잡을 수 없는 손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공을 옮기자마자 왼쪽 무릎을 먼저 내렸다. 몸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홈을 닫는 것이 먼저였다. 3루 주자는 그보다 반 박자 빨랐지만, 재하는 그 반 박자를 빼앗기지 않으려 어깨를 홈에 박았다.
충돌은 짧고 거칠었다. 흙이 튀고 헬멧이 미끄러졌다. 3루 주자의 몸통이 재하의 가슴을 밀어냈고, 재하의 왼손이 플레이트 가장자리에 다시 찍혔다. 이번엔 뼈가 아니라 감각이 먼저 비틀렸다. 검지 끝이 안으로 꺾이는 느낌이 손 안쪽에서 번쩍 지나갔다. 그는 숨을 한번 삼키고도 손을 펴지 못했다. 그럼에도 공은 살아 있었다. 오른손에 붙은 공은 떨어지지 않았고, 심판은 이미 팔을 옆으로 세우고 있었다. 아웃. 타이탄스 더그아웃 쪽에서 짧은 탄식이 새었다. 재하는 그 소리를 듣고도 손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보면 끝일 것 같아서였다. 대신 민석을 봤다.
민석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재하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민석이 입술을 떼고 물었다. "손 괜찮아?"
재하는 대답 대신 침을 한번 삼켰다. "괜찮으면 너한테 말 안 하지."
그 말에 민석이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이닝을 붙들어 주는 끈 같았다. 하지만 타이탄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다음 타자를 꺼냈다. 이번에는 좌타가 아니라 우타였다. 배트를 길게 쥔 강한 타자였고, 1루 주자는 이미 두 걸음을 떼고 있었다. 번트는 끝, 대신 빠른 땅볼과 주루 압박이다. 공이 먼저가 아니라 발이 먼저인 작전. 재하는 이를 악물고 자세를 낮췄다. 민석에게는 짧게 말했다.
"낮게. 바깥 말고 몸쪽 낮은 걸로. 얘는 배트만 믿는다."
민석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재하는 그 떨림까지 읽었다. 투수는 공을 놓칠까 두려워하고, 타자는 타이밍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둘 다 자기 공포에 갇혀 있으면, 포수가 먼저 문을 열어야 한다. 그는 굳은 왼손을 숨기듯 미트 안쪽으로 말아 넣고, 오른손으로만 사인을 정리했다. 1루 쪽을 잠깐 비우는 척한 뒤 다시 홈을 닫았다. 그 미세한 이동에 타이탄스가 반응했다. 1루 주자가 더 벌어지고, 타자는 배트를 더 움켜쥐었다. 바로 그 반응이 재하가 기다리던 흔들림이었다.
민석의 공이 들어왔고, 우타 타자는 뻗어나오다 말고 배트를 돌렸다. 공은 허리를 스친 듯 낮게 깔렸고, 타구는 투수 정면으로 죽었다. 민석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자 재하는 이미 한 걸음 앞에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잡지 않았다. 잡을 수도 없었다. 공은 오른손에 붙고, 그는 한 번에 몸을 낮춰 1루로 돌렸다. 2루 주자는 이미 출발했고, 1루 주자도 속도를 올렸지만 그 속도는 방향을 바꾸기엔 늦었다. 재하는 던지는 순간 왼손 검지가 미트에 걸린 채로 다시 비틀리는 걸 느꼈다. 송구는 완벽하진 않았다. 그러나 늦지도 않았다. 1루수가 베이스를 밟는 소리가 먼저 났다. 2루 포스 아웃. 이어서 1루 주자가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유격수가 공을 받아 1루로 되돌렸고, 주자 하나가 더 묶였다. 병살이었다.
더그아웃이 일제히 숨을 내쉬었다. 민석은 한동안 마운드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다가, 그제야 모자를 벗어 얼굴을 닦았다. 재하는 서서히 일어났다. 왼손은 펴지지 않았다. 검지 끝이 안으로 말려 들어간 채, 붕대가 젖어 들러붙어 있었다. 손을 펴 보려다 실패한 그는 대신 미트를 던지듯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3루 코치가 재빠르게 외쳤다.
"괜찮아?"
재하는 짧게 웃었다. "이 정도면 아직 쓸 만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는 감각이 사라진 손가락 끝을 느끼지 못했다. 공을 막고, 몸을 던지고, 송구를 한 뒤에 남은 건 통증보다도 더 조용한 마비였다. 그 조용함이 더 무서웠다. 아프면 버틸 수 있지만, 안 느껴지면 언제 꺾였는지 모른다. 재하는 그런 생각을 털어내듯 마스크 끈을 다시 조였다. 흙 묻은 숨이 목구멍에 걸렸지만 그는 곧바로 다음 사인을 준비했다.
그런데 타이탄스 벤치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다음 타석 카드가 올라왔다. 이번엔 번트 자세가 아니었다. 우타 대타가 아니라 빠른 우타 주루형 타자, 그리고 1루에는 대주자가 서 있었다. 벤치 코치는 손가락으로 1루 쪽을 찌르며 짧게 말했다. "앞으로는 홈이 아니라 저쪽이야."
재하는 그 입모양을 읽었다. 그들은 포수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바꿨다. 홈을 막는 손이 아니라, 1루로 보내는 손을 노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붕대가 젖은 왼손을 천천히 내려다본 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마운드를 바라봤다. 그러나 타이탄스의 다음 사인은 이미 더 노골적이었다. 1루 쪽을 크게 가르는 강한 타구, 그리고 동시에 출발하는 주자. 이번에는 그의 몸만으로 끝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