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구장의 흙은 비를 먹고 무거워졌다. 포수 뒤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적었지만, 재하는 그 몇 방울만으로도 오늘 타이탄스가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번트가 잘 먹히는 날이었다. 공이 죽고, 발이 살아나는 날. 그리고 자기 왼손이 제일 먼저 시험받는 날.
그날 전력분석표는 이상하게 친절했다. 번트 특화 1번 타자, 좌타 대타, 짧은 번트 뒤 홈 압박. 마치 재하가 읽기 쉽게 일부러 적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감독은 벤치 끝에 앉은 채 물었다.
“손은?”
재하는 검지에 감긴 테이프를 한 번 눌렀다. 붕대 아래로 열이 올라와 있었다.
“손은 안 좋고, 타이탄스는 더 나쁩니다.”
민석이 옆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보다 더 말랐다. 재하는 그 떨림을 보고 웃었다. 공을 던지는 손보다 먼저 흔들리는 건 투수의 어깨였다. 어깨가 먼저 굳으면 번트도, 강공도 다 겁이 된다.
첫 타석. 번트 특화 1번 타자는 배트를 짧게 쥐고 타석에 섰다. 재하는 그의 발끝을 봤다. 배트 끝은 공보다 느렸고, 시선은 민석이 아니라 포수 앞 흙바닥에 박혀 있었다. 공을 치려는 게 아니라, 공이 오는 순간까지 기다리다 도망치려는 자세였다. 겁먹은 사람의 몸은 늘 한 박자 늦게 반응한다. 그 한 박자를 잡으면 된다.
재하는 민석에게 미트를 아주 조금 안쪽으로 돌렸다. 초구, 낮은 커브. 민석은 흔들렸지만 던졌다.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 떨어지는 순간 타자는 번트를 대지 못하고 배트를 거둬 버렸다. 재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밀었다. 튀어 오른 공이 왼쪽으로 흘렀다. 왼손은 아팠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공을 먼저 눌러 잡고, 뒤늦게 몸을 일으켜 1루를 향해 던졌다.
공이 글러브에 박히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웃.
재하는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 손끝을 접었다 폈다. 검지 안쪽에서 찢어지는 느낌이 올라왔다. 통증은 예고처럼 길게 오지 않았다. 짧고 날카롭게, 몸 안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얼굴을 들지 않은 채 미트를 다시 세웠다.
“좋습니다.” 민석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좋은 건 지금부터야.” 재하는 대답했다.
두 번째 타자는 더 교묘했다. 번트 자세를 취한 채 초구를 흘려보냈다가, 민석이 자신감을 되찾는 순간 배트를 거둬 주자를 2루로 보냈다. 그건 반쯤 성공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재하는 이미 그 작은 성공의 냄새를 맡았다. 타자는 방망이를 대는 것보다, 방망이를 뺐다가 도망치는 쪽에 더 익숙했다. 진짜 두려움은 공이 아니라 실패한 번트 뒤의 시선이었다.
재하는 수비수들을 한 칸 앞으로 불렀다. 1루수와 3루수가 조금씩 더 나와야 했다. 타이탄스가 노리는 건 공간이었다. 그 공간만 줄이면 번트는 죽는다.
민석이 고개를 저었다. “또 안쪽이요?”
“손 떨리면 바깥으로 빠지고, 안 떨리면 안쪽. 네가 던지는 걸 내가 못 믿으면 여기서 끝이야.”
민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재하는 그 작은 동작에서 미세한 분노를 읽었다. 겁먹은 투수는 공을 놓치고, 화가 난 투수는 공을 똑바로 넣으려 한다. 오늘은 둘 다 필요했다. 그는 민석의 어깨가 한 번 올라가는 걸 보고 세 번째 공을 요구했다. 몸쪽 낮은 코스. 타자는 배트를 내지 못했다. 공은 타자의 허리를 스치며 흘렀고, 주자는 멈췄다가 다시 뛰었다. 그 멈춤이 바로 재하가 기다리던 틈이었다.
“이쪽!”
유격수가 2루 베이스로 파고들었다. 재하는 공을 던지는 대신 짧게 밀었다. 송구가 정확히 들어갔고, 주자는 태그를 피하지 못했다. 아웃카운트가 늘자, 타이탄스 더그아웃에서 짧은 욕설이 튀었다.
여섯 번째 이닝까지 그렇게 흘렀다. 재하는 번트를 받아내고, 짧은 도루를 끊고, 공 하나를 막을 때마다 왼손의 감각이 줄어드는 걸 느꼈다. 테이프가 젖어 붉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트를 내리지 않았다. 손을 감싸쥐면 더 크게 흔들린다. 흔들림은 약점이 아니라 신호였다. 약점을 숨기려는 순간, 상대는 그 안을 파고든다.
그리고 상대는 끝내 다른 문을 열었다. 좌타 대타. 방망이를 짧게 쥔, 작고 단단한 타자였다. 3루 주자는 이미 발끝을 홈으로 두고 있었다. 그 자세를 보는 순간 재하는 알았다. 짧은 번트 뒤 홈 충돌. 공이 죽는 동시에 사람이 뛰는 작전.
그는 민석보다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높게. 몸쪽이 아니라, 한가운데 위로. 겁먹은 타자는 낮은 공을 기다린다. 재하가 원하는 건 기다림이 아니라 멈칫이었다.
민석이 공을 놓쳤다. 순간 제구가 떠올랐다. 타자는 배트를 내지 못했고, 3루 주자는 이미 뛰고 있었다. 공이 미트로 들어오는 찰나, 재하는 홈 플레이트 앞을 가로막았다. 왼손으로 잡는 대신 몸을 던졌다. 오른팔로 공을 안고 왼어깨를 플레이트 위에 얹었다. 충돌이 왔고, 흙과 물이 얼굴을 때렸다. 그 충격이 지나가자 재하의 왼손 검지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그런데도 주자는 멈췄다. 발끝이 플레이트 앞에서 밀렸다. 심판이 팔을 올렸다.
아웃.
재하는 숨을 들이마셨다. 피가 붕대 아래로 번지는 게 느껴졌다. 손끝 감각이 거의 사라졌지만, 미트를 쥔 손은 아직 남아 있었다. 더그아웃 쪽에서 민석이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재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야 번트 같네.”
하지만 타이탄스 벤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다음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좌타 대타는 타석을 내려오면서 3루 코치를 바라봤고, 3루 주자는 다시 홈을 향해 발끝을 들이밀었다.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짧게 굴려, 홈에서 끝낸다. 재하는 그 얼굴을 보고 알았다. 다음 공은 번트를 막는 공이 아니라, 홈을 막기 위해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 공이었다.
붕대 아래 검지가 한 번 더 욱신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