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하는 원정 버스 맨 뒷좌석에서 검지에 감긴 테이프를 풀지 못했다. 풀면 아플 것이고, 안 풀면 또 보였다. 얇게 감은 테이프가 아니라 종아리만큼 굵은 약점이 거기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창 밖으로 성북 시내가 멀어질수록 민석은 말이 없어졌다. 어제까지는 공만 보면 웃던 투수였다. 오늘은 검지를 한 번, 재하의 미트를 한 번, 자기 손등을 한 번씩 봤다.
“아프면 말하세요.”
“아프다고 하면 공이 덜 날아오나.”
민석이 웃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재하는 그 표정을 봤다. 두려움은 경기 전에 먼저 도착했다. 투수는 경기를 망칠까 무서워했고, 자신은 그 두려움이 보이는 순간만 믿었다.
“오늘은 네 공이 먼저 무너질지, 타자가 먼저 겁먹을지 보자.”
민석이 물었다. “손가락으로 그걸 어떻게 봅니까.”
“손가락이 아니라 네 어깨로 봐. 네가 공을 숨길 때 어깨가 먼저 굳어.”
도착하자마자 더그아웃 바닥에 남부 타이탄스의 새 분석표가 놓여 있었다. 한 장 더 복사된 쪽지에는 어제와 같은 문장이 굵게 적혀 있었다. 포수 왼손을 흔들어라. 아래에는 도루 성공률이 높은 타자 셋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재하는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이미 자신을 상대로 한 작전 회의는 끝난 상태였다.
“좋아.” 재하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회의하자.”
그는 민석을 벽 쪽으로 불러 세우고, 방금 전까지 쓰던 사인을 지웠다. 검지로 원을 그리면 아팠다. 그래서 그는 미트 뒷면을 두드리는 순서를 바꿨다. 한 번은 빠르게, 두 번은 길게, 세 번째는 아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로 바꾸었다. 투수는 그 소리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상대는 더 오래 걸릴 것이다.
“내가 아파 보이면?” 민석이 물었다.
“더 던져. 흔들리면 던져야 한다. 오늘 타자들은 네가 흔들릴 때 뛸 거야. 그럼 우리가 먼저 불안해 보이면 안 돼.”
경기 시작과 함께 타이탄스는 정말로 뛰기 시작했다. 1회 첫 타자는 번트를 대며 재하를 앞으로 끌어냈고, 2루 주자는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재하는 반사적으로 미트를 낮췄다. 공은 바깥쪽으로 빠졌고, 왼손 검지가 미트 가장자리에 눌렸다. 눈앞이 잠깐 하얘졌다.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공이 빠지지 않게 배를 먼저 붙였다.
“세이프!”
심판의 손이 올라갔다. 주자는 살았고, 타이탄스 덕아웃에서 짧은 웃음이 터졌다. 재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면 상대가 자기 얼굴을 읽을 테니까.
다음 타석에서 민석의 초구가 높게 뜨자 주자가 다시 스타트했다. 재하는 이번엔 던지지 않았다. 던지면 손가락이 버티지 못한다. 대신 몸을 낮추고, 공이 빠진 방향을 따라 바로 태그를 밀었다. 포수의 발이 홈을 더듬고, 주자의 손이 먼저 닿을 듯 말 듯한 순간 심판이 아웃을 선언했다. 더그아웃에서 코치가 욕설을 삼켰다.
민석이 마운드 위에서 숨을 헐떡였다. “방금 왜 던지지 않았어요?”
“네가 무서워서 공이 떠서야.”
“내가 무서웠다고요?”
“그래. 타자보다 네가 더.”
민석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다음 공을 던졌다. 이번엔 컷패스트볼이었다. 타이탄스의 3번 타자는 배트를 늦게 냈고, 땅볼이 2루수 앞으로 흘렀다. 이닝이 끝났지만 재하는 손가락 끝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감각을 떨칠 수 없었다. 검지 쪽 테이프에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3회에도 주자들은 움직였다. 타이탄스는 재하의 왼손을 보라는 작전대로, 번트와 힛앤런으로 계속 흔들었다. 재하는 송구를 줄이고, 블로킹과 태그를 늘렸다. 공을 잡는 순간마다 손가락이 울렸지만, 그의 선택은 분명했다. 던질 수 있을 때만 던지고, 못 던질 때는 아예 몸을 던졌다. 그것이 포수의 선택이었다.
6회, 점수는 1대1이었다. 민석은 선두타자에게 볼넷을 내주고 갑자기 커브를 두 개 연달아 흘렸다. 공이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게 보였다. 재하는 마운드에 뛰어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덕아웃을 향해 타임을 요청하고, 민석의 헬멧 챙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지금 네가 무서운 건 삼진이 아니라 맞는 거야.”
민석이 눈을 크게 떴다.
“볼넷 줘도 돼. 대신 다음 타자를 봐. 걔는 지금 네 커브를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 압니까.”
“어깨가 먼저 반응했어. 공을 기다리는 어깨야.”
민석은 숨을 길게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공은 바깥쪽 체인지업이었다. 타자는 배트를 뻗었지만 허공만 갈랐다. 이어진 컷패스트볼에 6-4-3 병살이 나왔다. 재하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투수의 두려움이 꺾이는 순간은 늘 아주 작았다. 어깨 하나, 숨 하나, 미세하게 흔들리는 손목 하나.
7회 무사 1,2루. 타이탄스는 기다렸다는 듯 런 앤 히트를 걸었다. 1루 주자가 출발하는 순간, 타자는 일부러 약하게 밀어 친 내야 땅볼을 만들었다. 2루 주자는 이미 3루를 돌고 있었다. 재하는 공을 잡자마자 던질 생각을 버렸다. 검지가 찢어질 것 같았다. 던지면 둘 다 놓친다. 그는 본능적으로 홈으로 뛰는 주자의 진로를 읽고, 바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무릎이 흙을 쓸고 지나갔다. 왼손이 미트와 함께 바닥을 짚는 순간 통증이 손목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태그는 정확했다. 주자의 발이 홈 플레이트를 스치기 직전, 재하의 미트가 그의 허벅지를 눌렀다.
“아웃!”
잠시 뒤 관중석이 술렁였다. 다시 보니 공은 이미 뒤로 빠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하의 손가락이 버틴 것이 아니라, 버티게 만든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민석이 마운드에서 보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8회 초, 타이탄스의 좌타 대타가 들어왔다. 재하는 그 타석이 자신을 향한 시험이라는 것을 알았다. 상대 벤치가 자신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다. 대타는 초구부터 파울을 길게 만들며 시간을 끌었다. 두 번째 파울이 날아오는 순간, 재하는 민석에게 짧게 사인을 줬다. 높은 직구. 그 다음은 바깥 체인지업.
“지금?” 민석이 물었다.
“지금. 얘는 네 공보다 내 손을 보고 있어.”
직구가 몸쪽으로 꽂혔다. 타자는 반사적으로 배트를 움찔했고, 이어진 체인지업에 완전히 속았다. 헛스윙 삼진. 민석이 포효했고, 재하는 왼손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검지는 아팠지만, 경기는 그 아픔보다 천천히 흘러갔다.
경기가 끝난 건 9회였다. 성북 웨일스가 한 점을 더 뽑아 2대1로 앞섰고, 마지막 타구는 좌익수 뜬공으로 끝났다. 민석은 마운드에서 내려오며 재하의 헬멧을 세게 쳤다.
“오늘은 형이 맞췄어요.”
재하는 피식 웃었다. “맞춘 게 아니라 덜 틀린 거지.”
그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다 상대 전력분석 코치를 보았다. 코치는 노트북 화면을 닫지 못한 채 재하를 보고 있었다. 화면 한쪽에 멈춘 영상은 7회 홈 태그 장면이었다. 그 아래 자막처럼 남은 메모가 있었다. 왼손이 아니라 몸 전체를 흔들어야 한다.
재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상대가 이미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타이탄스가 진짜 노리는 것은 손가락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픈 손을 숨기려고 무리하는 습관, 던져야 할 순간과 버텨야 할 순간을 헷갈리게 만드는 압박 그 자체였다.
락커룸으로 돌아오니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경기 선발이 좌타자 특화야. 너 손 상태로 또 할 수 있겠나?"
재하는 대답 대신 테이프를 다시 감았다. 검지는 붓고 있었고, 테이프 아래에서 열이 났다. 하지만 손을 내리면 더 크게 흔들릴 것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할 수 있는 만큼 말고, 이길 수 있는 만큼만 쓰겠습니다.”
감독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하는 락커 문을 닫기 직전, 오늘 경기의 영상 파일이 송신되는 것을 보았다. 타이탄스가 아마 벌써 돌려보고 있을 것이다. 자기 몸짓 하나하나를, 사인 하나하나를, 손가락이 흔들리는 타이밍까지.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받자마자 짧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성북 웨일스 재하 맞지? 내일 선발 라인업 봤어. 네 왼손, 이제는 공보다 먼저 흔들리게 해주지.”
통화는 끊겼다. 화면에는 문자 한 줄이 추가로 떠 있었다.
내일 첫 타석, 번트로 시작한다. 그다음엔 네 손가락을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