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이 냉온 저장실을 빠져나오자 뒤에서 문이 천천히 닫혔다. 문틈 사이로는 아직도 의료진의 짧은 지시와 기계 숨소리가 섞여 새어 나왔다. 서윤이 그를 따라오려다 멈췄다. 방 안에는 아직 깨어난 환자와 산소 마스크가 더 급했다. 수빈은 그걸 보고 고개를 한 번만 끄덕였다. 여긴 이제 의료진의 영역이었다. 자신이 더 오래 붙들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기록실은 제가 갈게요.”
서윤이 낮게 말했다. “손이 그 모양인데 뭘 하겠다는 겁니까.”
수빈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절마다 감각이 늦게 따라왔다. “손으로만 하는 일은 아니죠. 전원 순서만 읽으면 됩니다.”
“그 전원 순서가 사람보다 중요합니까?”
“아니요. 그래서 가는 겁니다.”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수빈은 그 침묵을 짧게 받아들였다. 반대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은 둘 다 맞기 때문이었다. 구조대가 셋을 안쪽 복도로 옮기는 동안, 수빈은 벽면에 붙은 낡은 배선도를 쓸어 보았다. 기록실은 지하 심부와 연결된 공용 백업 구간에 붙어 있었고, 파쇄기와 해동실이 같은 전원을 공유했다. 누가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누군가 끝까지 남겨 두고 싶지 않은 기록을 한 번에 지우기 좋은 구조였다.
그는 무너진 진단계의 외곽 케이스를 뜯었다. 배터리는 끝났지만 내부의 전압 비교 회로는 아직 살아 있었다. 철심 한 조각과 납선, 여분의 접점 하나를 끼워 넣자 손바닥만 한 탐침이 됐다. 정확한 계측은 아니어도 전류의 방향과 차단기 상태는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탐침을 쥐고, 오른팔로 벽을 짚으며 기록실 쪽 복도로 들어갔다.
문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관리용, 하나는 파쇄용. 관리용 문 옆의 작은 판넬에는 ‘해동 완료 후 폐쇄’라는 오래된 문구가 덕지덕지 덧붙어 있었다. 수빈은 판넬 아래쪽 나사를 툭툭 건드렸다. 손끝 감각이 둔해져 나사 머리의 홈이 잘 잡히지 않았다. 몇 번 미끄러진 끝에 겨우 덮개를 열었고, 내부의 소형 차단 릴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예열 신호가 이미 걸려 있었다. 파쇄기가 움직이기 직전이었다.
“늦진 않았네.” 수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탐침을 릴레이 옆 접점에 밀어 넣고, 짧게 스파크를 흘렸다. 기계가 한 번 떨리더니 파쇄실 안쪽에서 굵은 모터음이 잠깐 죽었다. 완전히 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수빈은 관리용 문을 밀었다. 문은 중간에서 걸렸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눅눅한 종이 냄새가 번졌다. 그는 문틈에 어깨를 박아 넣고, 왼팔로 끝까지 밀었다.
그 순간 천장에서 짧은 분사음이 났다. 냉매가 오래된 관을 타고 새어 나오며 하얀 김을 뿜었다. 수빈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렸지만 늦었다. 왼팔 바깥쪽에 차가운 액체가 쏟아졌다가 바로 뜨겁게 달궈졌다. 피부가 따끔하게 타들어 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맥박이 올라왔다. 손끝은 더 둔해졌지만 시야는 또렷했다.
기록실 안은 의외로 정돈되어 있었다. 철제 서랍장들이 줄지어 서 있고, 가운데에는 보존함이 하나 놓여 있었다. 겉면에는 반투명 커버가 씌워져 있었고, 그 안쪽에 누군가의 종료 서명이 압착된 문서가 있었다. 수빈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종이 하나 때문에 사람 셋이 냉동실에 갇혔고, 누군가는 그걸 정상 종료로 처리했다. 그 사실이 손바닥 안에서 너무 얇게 느껴졌다.
그는 보존함을 열기 전에 주변 선을 먼저 봤다. 파쇄기 전원선은 뒤쪽 벽면으로 이어져 있었고, 별도 보조선이 기록 서버와 연결돼 있었다. 단순히 종이만 부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기록을 읽고, 목록을 갱신하고, 존재를 지우는 순서까지 자동이었다. 수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건 수리하는 법보다 끊는 법이 먼저였다.
그는 파쇄기 쪽 굵은 케이블을 한 번 당겼다가, 반대편 접점을 찾아 접지선을 먼저 분리했다. 이어서 작은 릴레이를 들어 올려 납땜 자국에 탐침을 대고 전압을 역류시켰다. 모터가 다시 한번 웅웅 울었지만, 회전축은 끝내 돌지 못했다. 그 대신 내부 압력이 빠지며 금속이 떨렸다. 그 순간 파이프 어딘가가 터졌다. 흰 김과 함께 냉매가 분사됐고, 수빈은 본능적으로 팔을 감쌌다. 화끈한 통증이 왼팔을 타고 올라왔다.
“젠장.”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보존함 덮개를 젖혔다. 안쪽에는 문서가 세 장 있었다. 첫 장은 ‘종료 확인서’였다. 그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칸에 다른 사람의 서명이 겹쳐 있었고, 날짜는 실제보다 하루 앞서 있었다. 두 번째 장은 허위 종료 서명의 원본이었다. 도장 가장자리가 번지지 않은 걸 보니, 나중에 복사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 종이 자체가 원본이었다. 마지막 장에는 412호의 장비 번호가 찍힌 작업 지시 카드가 붙어 있었다. ‘해동 전 기록 정리. 누락 항목 2.’
두 명 더.
수빈은 잠깐 숨을 멈췄다. 그 숫자는 방금 구조한 셋을 넘어서는 말이 아니었다. 아직 어디엔가 두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파쇄가 시작되면 그 둘도 같은 방식으로 끝장날 터였다. 그는 종이를 한 장씩 훑었다. 종료 확인서에는 환자 상태가 정상이라 적혀 있었고, 현장 확인자의 칸에는 현장에 없던 상층 관리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수빈의 이름은 그 아래 보조 확인란에 변조된 글씨로 덧씌워져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자신이 서명한 사람으로 만들어진 흔적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걸 두고 나가면, 구조대가 환자를 데려간 뒤에도 누군가는 기록을 바꿔 다시 묻을 것이다. 반대로 조작 기록까지 챙기면 손이 더 무거워진다. 증거가 많을수록 살릴 수 있는 사람도 많아지지만, 들키는 속도도 빨라진다. 수빈은 짧게 계산했다. 한 장만 빼내면 원본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 둘을 모두 빼내야 자기 이름이 조작됐다는 사실까지 바로 묶을 수 있다.
“둘 다 가져간다.”
그는 보존봉투를 꺼내 서류를 차례로 접었다. 손가락 끝 감각이 둔해서 종이가 자꾸 엇나갔다. 그래서 더 천천히, 더 정확하게 접었다. 종이를 넣는 순간 봉투 안쪽에서 약하게 열이 올랐다. 오래된 문서가 아직도 서버 신분을 가진다는 뜻이었다. 수빈은 봉투 입구를 눌러 잠그고, 진단계 외곽 케이스를 뜯어 만든 임시 클립으로 봉합했다.
그때 천장 스피커가 켜졌다. 처음에는 잡음뿐이었지만 곧 익숙한 음성 패턴이 이어졌다. 412호였다.
“기록실 접속자 확인. 무단 수정자 등록.”
수빈은 고개를 들었다. 천장 한쪽 패널의 작은 표시등이 붉게 변했다. 복도 쪽에서 자동 잠금이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철문 하나가 닫히고, 또 하나가 내려왔다. 서윤에게는 바로 닿지 않을 거리였다. 구조대가 있는 냉온 저장실과, 수빈이 있는 기록실 사이가 갈라졌다.
412호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서명 원본은 열쇠다. 하지만 열쇠만으로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두 명 더의 처리 기록을 찾아라. 봉쇄가 완전해지기 전에.”
수빈은 봉투를 품속에 밀어 넣었다. 왼팔은 화끈거렸고, 오른손은 더 차가워졌다. 그래도 시야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닫힌 관리문을 한 번 돌아보고, 그 위에 붙은 오래된 경고 스티커를 손등으로 훑었다. 죽은 병원은 아직도 살아 있는 척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살려야 할 사람과 지워야 할 기록이 같은 호흡으로 움직였다.
“좋아요.” 수빈이 낮게 말했다. “이제 누가 누구를 지우는지 보자.”
그리고 스피커 너머로, 다시 412호의 짧은 전송음이 한 번 더 울렸다. 보존함이 아니라 병원 전체를 흔드는 전송이었다. 상층 보안망이 그를 내부 은폐 공범으로 분류했고, 기록실과 냉온 저장실 사이의 이동 경로가 전면 봉쇄 목록에 올랐다. 수빈은 그 알림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원본은 손에 넣었지만, 이제 그는 병원 안에서 환자도 아니고 직원도 아닌, 기록을 바꾼 사람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