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종료된 장비
폐병원에서 온 수리 요청은 정확히 살아 있는 장비의 문법으로 쓰여 있었다.
`SEORIM-H3-ECG-0307.`
`오류 41: 전극 L2 단선.`
`환자 파형 손실 예상: 00:47:12.`
`현장 기사 배정 요청.`
오수빈은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수신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02분. 세림병원 철거 시작까지 아홉 시간 남았다.
"이거 시험 서버에서 온 거죠?"
야간 팀장 최봉식은 커피를 마시며 화면을 한 번 봤다.
"폐기 장비가 마지막으로 밀린 로그를 뱉었겠지. 닫아."
"환자 파형 손실 예상 시간이 현재 기준으로 줄고 있습니다."
00:46:51.
00:46:50.
수빈이 창을 새로 열어도 숫자는 이어졌다. 저장된 오류라면 같은 값에서 시작해야 했다.
최봉식이 한숨을 쉬었다.
"세림병원은 3년 전에 닫았어. 화재 뒤 모든 장비 전원 종료한 사람이 너잖아."
수빈의 이름은 종료 확인서 마지막 줄에 있었다. 심전계 24대, 인공호흡기 11대, 중앙 감시 서버 2대. 전원 차단 및 환자 분리 확인.
그날 연기가 너무 짙어 병실 하나하나를 직접 보지 못했다. 병원 전산 담당이 건넨 목록과 중앙 서버의 오프라인 표시를 대조해 서명했다.
그 서명 때문에 보험사는 모든 장비가 정상 종료됐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확인해야 합니다. 제 서명이 맞다면 신고 경로가 설명돼야 하고, 틀리다면 더 늦기 전에 알아야 합니다."
"내일 철거팀이 보면 돼. 지금은 봉인 건물이고 출입 허가도 없어."
"47분 뒤 파형 손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환자가 없다고."
수빈은 작업 명령의 `보류`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이 사유를 요구했다.
`현장 접근 불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대신 `출동`을 눌렀다.
"회사 승인 아닙니다. 제 개인 판단으로 갑니다."
"그러면 자격 정지야."
"환자가 없으면 장비 회수 보고서 쓰고 받겠습니다."
수빈은 공구 가방과 절연 장갑, 휴대용 전원 분석기를 챙겼다.
최봉식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있으면?"
수빈은 종료 확인서 사본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는 자격보다 먼저 할 일이 생깁니다."
### 2. 307호
세림병원 정문은 합판과 철제 봉인으로 막혀 있었다. 철거 경비원 이호철은 작업 명령을 세 번 읽었다.
"전기가 다 끊겼는데 서버가 어떻게 연락해요?"
"그걸 확인하러 왔습니다. 혼자 들어가면 불법이니 입회해 주세요. 문을 열 권한은 경비 업체에 있습니다."
"저도 들어가야 합니까?"
"싫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다만 오류 예상 시간이 31분 남았습니다."
호철은 욕을 한마디 하고 봉인 개방 기록을 켰다.
두 사람은 손전등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화재 냄새는 삼 년이 지나도 벽에 남아 있었다. 3층 복도 바닥에는 당시 대피 방향 화살표가 희미했다.
307호 문은 잠기지 않았다.
병실 안에는 침대도 환자도 없었다. 심전계 한 대만 창가에 놓여 있었다. 전원 케이블은 뽑혀 있었다.
그런데 화면은 켜져 있었다.
초록 파형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심박수 38.
체온 29.1.
전극 L2 단선.
호철이 문밖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유령 아닙니까?"
"유령이면 제조사 오류 코드를 이렇게 정확히 쓰진 않겠죠."
수빈은 장비를 만지기 전에 사진을 찍고 봉인 상태를 기록했다. 그다음 외부 전원부터 확인했다. 벽 콘센트는 0볼트. 장비 내장 배터리는 제거돼 있었다.
그런데 후면 네트워크 단자에 가는 검은 선이 꽂혀 있었다. 일반 통신선보다 두꺼웠고, 미세한 직류 전압이 흐르고 있었다.
"통신선으로 전원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수빈은 화면 메뉴에서 파형 출처를 확인했다.
`실시간 원격 전극.`
저장 재생이 아니었다.
"그럼 환자가 어디 있다는 겁니까?"
"이 선 반대편입니다."
검은 선은 벽 안으로 들어갔다. 설계도상 307호 뒤에는 배관 공간뿐이었다.
수빈은 전극 진단 펄스를 보냈다. 0.4초 뒤 반사가 돌아왔다. 선 길이는 약 60미터. 아래 방향.
오류 예상 시간 19분.
"지하입니다."
### 3. 치료하지 않는 사람
지하 1층 세탁실 벽 뒤에서 검은 선이 다시 나타났다. 오래된 건조기 아래를 지나 폐수 배관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호철이 설계도 앱을 확대했다.
"이 뒤에 방이 없어요."
"설계도에 없는 방이거나, 선이 다른 건물로 나갑니다."
수빈은 벽면 타일을 두드렸다. 한 구역만 속이 비어 있었다. 비상 개방 레버는 세탁기 배수판 뒤에 숨겨져 있었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쏟아졌다.
안에는 투명한 캡슐 하나가 있었다. 성인 여성이 얼음 같은 젤 속에 누워 있었다. 가슴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목 옆 동맥 위 센서가 희미하게 뛰었다.
캡슐 옆 생명유지 장치는 병원 자산 목록에 없는 외국산 모델이었다. 전원 조절기 경고등이 붉게 깜박였다.
`냉각 유지 00:12:08.`
호철이 손잡이를 잡았다.
"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열지 마세요. 저는 의료기기 기사입니다. 환자를 깨우거나 상태를 진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보고만 있어요?"
"장비 전원을 유지하고 의료진을 부릅니다. 역할을 나눠야 합니다."
수빈은 119에 위치, 장비 모델, 표시 수치, 봉인 병원이라는 사실을 차례로 알렸다. 저온 치료 경험이 있는 의사와 특수 이송팀을 요청했다.
그다음 전원 조절기를 열었다. 주 전원 퓨즈는 멀쩡했다. 냉각 모터가 돌 때만 출력이 꺼졌다. 세 개의 축전지 중 하나가 역전압을 내고 있었다.
"고칠 수 있어요?"
"완전 수리는 못 합니다. 불량 축전지를 분리하고 휴대 전원을 보조로 연결하면 이송팀이 올 때까지 40분 정도 벌 수 있습니다."
"실패하면?"
"냉각이 급격히 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모든 수치를 영상으로 남겨 주세요. 제가 무엇을 만지는지도."
호철은 휴대전화를 고정했다.
수빈은 절연 장갑을 끼고 불량 축전지 단자를 분리했다. 전류가 팔꿈치까지 튀는 느낌이 왔다. 휴대 전원 케이블을 연결하자 조절기 화면이 한 번 꺼졌다.
캡슐 속 파형이 평평해졌다.
호철이 숨을 멈췄다.
수빈은 환자를 보지 않았다. 전원 분석기만 봤다. 입력은 정상, 출력 릴레이가 붙지 않았다. 수동 우회는 제조사 지침상 10초까지 허용됐다.
그는 우회 스위치를 눌렀다.
하나, 둘, 셋.
릴레이가 붙었다.
초록 파형이 다시 올라왔다.
심박수 39.
냉각 유지 예상 00:43:17.
수빈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 4. 두 명 더
특수 이송팀은 17분 뒤 도착했다.
의사는 환자의 생존을 확인했지만 현장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경찰이 캡슐 아래에서 발견한 명찰에는 `한예림 간호사`라고 적혀 있었다. 화재 당일 실종자로 처리된 사람이다.
수빈은 자신의 종료 확인서를 경찰에게 제출했다.
"저는 중앙 서버에서 모든 환자 분리 완료라는 표시를 보고 서명했습니다. 이 비공개 장치는 목록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병실을 직접 확인하지 않은 책임은 있습니다."
형사가 물었다.
"누가 이런 시설을 만들었을까요?"
"모릅니다. 장비 로그와 구매 기록을 봐야 합니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전극선이 307호 심전계를 경보 중계기로 썼다는 것뿐입니다."
"왜 하필 오늘 신호가 왔죠?"
수빈은 전원 조절기 로그를 가리켰다.
"철거 준비로 외부 비상 전력이 오후 열 시에 끊겼습니다. 내부 축전지가 버티다가 하나가 고장 났고, 심전계가 등록된 마지막 서비스 주소로 요청을 보냈습니다."
유령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이 삼 년 동안 이 환자를 숨긴 이유였다.
동이 틀 무렵 수빈은 회사에서 자격 업무 정지 통보를 받았다. 무단 출동과 봉인 시설 진입, 승인 없는 장비 개방. 경찰은 구조를 인정했지만 회사 규정은 별도였다.
최봉식 팀장이 전화를 걸었다.
"네 판단이 맞았다고 규정 위반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압니다. 조사받겠습니다. 대신 세림병원 장비 종료 목록 전부 다시 대조해 주세요."
"건물은 오늘 철거야."
"멈춰야 합니다."
말이 끝나기 전에 수빈의 작업 단말이 울렸다.
새 작업 명령이었다.
`SEORIM-H4-VENT-0412.`
세림병원 4층 412호 인공호흡기. 철거 기록에는 화재 때 완전히 소실된 장비였다.
오류 코드 대신 짧은 글자가 입력돼 있었다.
`두 명 더.`
수빈이 응답 창을 열자 다음 문장이 나타났다.
`종료 확인자 오수빈에게만 위치를 공개합니다.`
병원 철거 굴착기가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