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58분, 보관구역 3호의 프린터는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종이를 토해냈다. 종이 끝이 떨리다가 멈추자, 미라는 맨 위 문장을 먼저 읽었다. 정미라. 오전 6시 보존 재확인 동행. 그 아래 줄이 더 차가웠다. 정현우 폐기 전환 임시 검토. 마지막에는 승인자 칸이 비어 있었고, 그 빈칸 위에만 검은 인장이 한 번 더 눌려 있었다. 인장은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이름을 다음 칸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끝내려는군요.” 미라가 말했다.
보안요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프린터 옆에 붙은 작은 안내문만 턱으로 가리켰다. 책임자 동행 시 보류 요청 가능. 공개 기록 필수. 미라는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밤새 식지 않은 열이 손끝에 남았다. 책임자라는 말이 달아오른 손목의 표식과 함께 그녀를 물고 있었다. 그 표식은 전날보다 한 겹 더 두꺼워져 있었다. 확인자가 아니라 책임자.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문서의 중심으로 끌어다 놓은 것이다.
“보류 요청하면 정현우가 멈춥니까.”
“절차상 이동이 지연됩니다.”
“지연이 아니라 멈춤이 필요해요.”
보안요원은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만으로도 미라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멈추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멈춤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그녀는 안쪽 문으로 걸어가며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금속 봉합막 너머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희미하게 출렁였다. 어젯밤과 달리 바닥에는 수레 자국이 더 깊어져 있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이미 옮겨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하 7층으로 내려가는 서비스 통로는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수직 운송축이었다. 정식 문서가 붙은 노선이 아니면 바람부터 달랐다. 미라는 벽면을 스치는 냉기 속에서 철 냄새와 젖은 종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아주 약하게, 익숙한 잉크 냄새도. 청문회장에서 보았던, 검은 인장이 눌릴 때만 남는 냄새였다.
운송축 앞에는 야간 이송 담당자 하나가 졸린 얼굴로 서 있었다. 이름표에는 이도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미라를 보자 눈썹을 찡그렸다. “여기 출입권한 없으십니다.”
“지금부터 있습니다.” 미라가 출력지를 내밀었다. “책임자 동행입니다. 보류 요청을 넣을 거예요. 정현우 이름이 폐기 전환으로 넘어가는 걸 공개 기록에 남기기 전까지 이송을 멈춰 주세요.”
이도윤은 종이를 받지 않았다. “저는 이동 지시만 받습니다.”
“그럼 지시를 보여주세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목 단말을 돌렸다. 화면에는 오전 6시 03분 이송 지시가 떠 있었다. 정현우, 7층 폐기전환실, 재난사업부 직인. 미라는 화면 아래쪽의 작은 각인을 보았다. 검은 인장. 문장보다 먼저 찍힌 인장. 표면은 같았지만, 아래에 미세하게 다른 숫자가 숨겨져 있었다. 3년 전 실종 의뢰서에 남은 것과 같은 형식. 같은 손이 찍었다.
“재난사업부가 직접 받네요.” 미라가 낮게 말했다.
이도윤이 목을 삼켰다. “저도 처음 봤습니다.”
“처음 봤다고 넘어갈 수는 없죠.”
그녀는 단말 화면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정현우는 보존 대상입니다. 보존 대상이 폐기 전환으로 넘어가려면 보류 이력과 공개 확인이 남아야 해요. 지금 화면에 그게 없습니다. 그러니 이송은 멈춰야 합니다.”
이도윤은 더 이상 변명하지 못했다. 미라는 그의 침묵이 아니라 뒤편에서 들려오는 바퀴 소리에 귀를 세웠다. 운송축 아래쪽에서 무언가 올라오고 있었다. 철제 캐리어가 레일을 긁는 소리, 잠금쇠가 풀렸다 조여지는 소리, 종이 봉인 테이프가 뜯기는 소리. 정현우의 이름이 붙은 이송함이 이동 중이었다.
“도와줘요.” 미라가 말했다.
“제가요?”
“당신도 열람할 책임이 있어요. 공개 기록입니다.”
그 한 마디가 이도윤을 멈췄다. 그는 마지못해 장비함을 열어 보류 태그 한 묶음을 꺼냈다. 노란색 종이 테두리에 붉은 선이 둘러진 태그였다. 보류 사유란과 확인자 칸이 비어 있었다. 미라는 그것을 받아들고 종이의 모서리를 손톱으로 살짝 비볐다. 압흔이 드러났다. 정식 문구 아래에 더 작은 글씨가 숨어 있었다. 분쟁 대상. 이동 중단 시 책임은 현장 확인자에게 이관.
“이런 걸 숨겨두다니.” 미라가 웃지도 못한 채 말했다.
“숨긴 게 아니라 안 보이게 만든 겁니다.” 이도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지금 처음 봤어요.”
운송축 문이 열렸다. 차가운 김이 흘러나오고, 그 안쪽으로 검은 천으로 덮인 이동함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함의 외벽에는 정현우라는 이름 대신 대상 번호가 덧붙어 있었고, 그 위에 검은 인장이 두 번 찍혀 있었다. 한 번은 보존 확인, 한 번은 폐기 예비. 미라는 순간 목 뒤가 서늘해졌다. 실종도 보존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그의 이름을 단계별로 나누고 있었다.
“멈춰요.” 그녀가 말했다.
운송 담당 보안요원이 반발했다. “직권 없습니다.”
“있습니다.” 미라는 주머니에서 수정 인계표와 방금 받은 출력지를 함께 꺼냈다. “저는 책임자입니다. 그리고 이 문서에는 보류 조건이 누락돼 있습니다. 누락된 문서는 완결된 지시가 아니에요. 이송을 계속하면 공개 기록 위반입니다.”
보안요원이 주저하는 사이, 이도윤이 자동 잠금 레버를 반쯤 내렸다. 레일이 덜컹하며 멈췄다. 움직임이 멎자 이동함의 천이 조금 들리고, 안쪽에서 차가운 습기가 새어 나왔다. 미라는 캐리어 측면에 손을 대고 종이 표면의 눌림을 읽었다. 안에 든 것은 사람의 체온이 아니라 봉인된 보존함이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쪽, 손때가 묻지 않은 자리에 작은 종이 띠가 붙어 있었다. 폐기 전환실 임시 보류. 출고 대기 중.
그녀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여기까지 옮겨 놓고 아직 대기라고 적어놨네요.”
“그건 제가 붙인 게 아닙니다.” 이도윤이 얼어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미라는 태그를 뜯어냈다. 종이 뒤쪽에는 출고 원장 번호가 있었다. 7층 폐기전환실, 정현우, 이관 담당, 재난사업부. 그 번호를 보는 순간 그녀는 확신했다. 오빠는 아직 지하에 있었다. 실종이 아니라 이동 중이었다. 누군가 계속 옮기고, 계속 다른 이름을 붙이고, 마지막에는 폐기라는 칸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미라는 태그의 빈 확인자 칸에 자기 지문을 눌렀다. 종이 위로 붉은 글씨가 번졌다. 보류 요청 접수. 공개 기록 반영. 그리고 동시에 손목의 감시표식이 뜨겁게 뒤집혔다. 검은 선이 한 줄 더 늘어나며 화면이 잠시 먹통이 됐다. 이도윤이 놀라 외쳤다. “권한이 끊겼습니다!”
“알아요.” 그녀는 태그를 캐리어 손잡이에 단단히 묶었다. “지금부터 이건 제 책임으로 멈춥니다.”
철제 잠금이 닫히며 레일 전체가 정지했다. 그 짧은 순간, 이동함 안쪽에서 아주 미세한 기계음이 났다. 누군가 다른 층에서 잠금 해제를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류 태그가 먼저였다. 캐리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미라는 출고 원장 한 장을 떼어 주머니에 넣었다. 종이의 열은 이미 식었지만, 거기에 적힌 숫자는 식지 않았다.
그때 벽면 프린터가 다시 돌아갔다. 이번에는 짧고 두꺼운 종이였다. 종이 위에는 재난사업부 직인이 눌려 있었고, 제목은 현장 심문 소환이었다. 정미라. 오전 8시 10분. 7층 폐기전환실 대면 출석. 아래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 정현우 폐기 전환 승인 여부 확인.
미라는 종이를 읽고도 바로 찢지 않았다. 찢는 순간 그녀의 감시표식이 더 깊이 잠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종이를 접어 손바닥에 눌렀다. 7층은 이미 그녀를 불렀다. 이번에는 확인자가 아니라 심판자처럼, 그러나 칼을 든 쪽은 저쪽이었다.
이도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가면요?”
미라는 태그가 묶인 캐리어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러면 오늘은 정현우가 사라집니다. 가면, 적어도 누가 그렇게 지우는지는 남아요.”
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도, 열람망도, 지상 이동권도 그녀에게서 하나씩 멀어졌다. 하지만 손안에는 보류 태그와 출고 원장이 남아 있었다. 실종이 아니라 폐기 전환. 누가 그 이름을 찍었는지, 그녀는 이제 공개 기록으로 들고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오전 8시 10분, 7층에서 그 종이를 받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답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