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눌린 명령
정미라는 계약서에서 글자를 읽지 않았다. 글자 아래 눌린 명령을 읽었다.
길드 접수대의 흰 조명 아래에서 편광 렌즈를 왼쪽으로 돌리자 종이 섬유가 층마다 다른 색으로 갈라졌다. 파란 잉크는 오늘 인쇄한 토벌 조건이었다. 회색 압흔은 어제 결재한 보수표였다.
그리고 맨 아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검은 문장이 있었다.
`부차 목표: 핵종자 회수.`
`현장 목격자 잔존 금지.`
미라의 손가락이 렌즈 테두리에서 멈췄다.
"정 감정사, 다 봤으면 서명해요."
접수 직원이 재촉했다. 벽시계는 오전 5시 20분을 가리켰다. 폐창고 옆 새벽시장이 열리기까지 마흔 분 남았다.
표면 의뢰는 단순했다. 서해 7번 게이트에서 유출된 E급 곰팡이 짐승 한 마리가 냉동 창고를 점거했다. C급 공격대가 토벌하고, F급 감정사 정미라는 잔해에서 마석 등급을 확인한다.
성공 보수 2천만 원. 미라의 정규 감정사 승급 추천 포함.
"원본 대조 요청합니다."
"새벽 긴급 의뢰라 전자 원본만 있어요."
"이 종이는 두 번 인쇄됐습니다."
접수 직원의 미소가 얇아졌다.
"F급은 인쇄 감정까지 안 해도 됩니다. 마석만 보세요."
공격대장 차건호가 미라 어깨 너머로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그는 C급 쌍검사였고, 오늘 실적 하나면 B급 심사를 신청할 수 있었다.
"문제 있어?"
미라는 검은 문장을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목격자 잔존 금지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대신 표면 계약의 8조를 손톱으로 짚었다.
"의뢰 외 위험물이 확인되면 현장 감정사가 안전 중지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요청만. 결정은 대장이 한다."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원본을 보자는 겁니다."
건호는 계약서를 접어 자기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현장 가서 위험물이 있으면 보자고. 창고주가 여섯 시 전에 끝내 달래. 시장 열리면 민원부터 터져."
미라는 서명란에 이름을 썼다. 서명하지 않으면 검은 명령을 따라갈 수 없었다. 계약을 받아들인다는 뜻과 계약을 믿는다는 뜻은 같지 않았다.
### 2. 죽이지 못한 괴물
폐창고 안은 겨울인데도 여름 장마 냄새가 났다.
벽과 천장에 회색 균사가 혈관처럼 퍼져 있었다. 중앙에는 곰만 한 짐승이 웅크리고 있었다. 버섯 갓 같은 등이 숨을 쉴 때마다 부풀었다. 네 다리는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건호가 쌍검을 뽑았다.
"표적 확인. 지원 둘은 출구 봉쇄. 정 감정사는 뒤로."
미라는 렌즈를 눈에 댔다. 마력 잔광이 색띠로 갈라졌다. 짐승 몸은 탁한 회색이었지만, 배 아래에서 검은 빛 한 점이 박자 없이 뛰었다.
공격대 마법사가 화염탄을 준비하자 짐승이 몸을 더 낮췄다. 도망치거나 덮치지 않았다. 오히려 배 아래의 검은 점을 자기 균사로 덮었다.
"잠깐. 공격 중지 요청합니다."
"근거."
"표적이 핵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가두고 있습니다. 검은 물질과 짐승의 마력 파장이 반대예요."
건호가 미라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곰팡이 짐승은 원래 포자를 품어. 핵 깨고 마석 꺼내면 끝이야."
"일반 포자는 숙주와 같은 주기로 뜁니다. 저건 숙주를 침식하고 있어요."
미라는 바닥의 균사 한 줄을 핀셋으로 떼어 시약판에 올렸다. 회색 균사는 검은 점 쪽으로 자라다가 닿기 직전 스스로 타 죽었다.
짐승은 씨앗을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몸을 태워 번지는 걸 막고 있었다.
"계약 범위 외 위험물 확인. 8조에 따라 현장 안전 중지를 요청합니다."
건호가 그제야 돌아섰다.
"거절한다."
"왜죠?"
"네 추측 하나로 의뢰를 날릴 수 없어. 시장 열리기 전에 토벌한다."
팀 영상 기록기의 초록 불이 꺼졌다.
지원 헌터가 손목 단말을 두드렸다.
"길드 통신도 끊겼습니다. 창고 차폐 때문인가?"
미라는 천장의 중계기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 신호 세 칸이었다. 누군가 외부에서 기록을 끊었다.
검은 덧인쇄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현장 목격자 잔존 금지.
"대장님, 기록이 끊긴 상태에서 토벌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빨리 끝내야지."
건호가 바닥을 찼다. 쌍검에서 푸른 검기가 뻗었다.
짐승은 피하지 않았다. 몸을 말아 검기를 등으로 받았다. 회색 살이 찢어지자 배 아래 검은 씨앗이 드러났다.
씨앗 표면이 입처럼 벌어졌다.
검은 가루가 한 줌 흘러나왔다. 가루가 닿은 냉동 상자 표면에서 사람 손가락 같은 싹이 돋았다.
건호의 두 번째 검이 멈췄다.
"저게 뭐야."
"의뢰서 뒷면에 적힌 진짜 사냥감입니다."
### 3. 안전 중지
미라는 가방에서 은박 시료포를 꺼내 렌즈 앞에 댔다. 편광을 통과한 빛이 계약서의 검은 잉크를 보여 줄 수 있다. 문제는 계약서가 건호 주머니에 있다는 것이었다.
"원본을 주세요. 지금 팀 기록을 다시 켭니다."
"통신이 죽었다며."
"외부 송신만 죽었습니다. 기록기는 내부 저장이 됩니다."
지원 헌터가 기록기 측면의 수동 스위치를 올렸다. 붉은 불이 켜졌다.
건호는 계약서를 꺼내지 않았다.
검은 싹이 두 번째 상자를 뚫었다. 짐승이 남은 균사를 뻗어 가루를 덮었다. 찢어진 몸이 바닥에 더 낮게 가라앉았다.
미라는 건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선택하세요. 표면 계약대로 짐승을 죽이고 저 씨앗을 풀어 주든지, 숨은 명령을 기록에 남기고 중지하든지."
"중지하면 승급 추천은 끝이야. 네 것도, 내 것도."
"알고 있습니다."
"보수도 못 받아."
"그것도 압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해?"
미라는 짐승의 등에 난 상처를 보았다. 삼 년 전 오빠 정현우의 마지막 의뢰도 `단순 잔해 감정`이었다. 현장 기록은 11분간 비어 있었고, 돌아온 것은 검게 탄 길드패뿐이었다.
"모르는 명령을 완수한 대가는 이미 한 번 냈으니까요."
건호는 이를 악물고 계약서를 던졌다.
미라는 기록기 앞에 종이를 펼쳤다. 은박을 뒤에 대고 창고 비상등 각도를 조절했다. 육안에 없던 검은 글자가 화면 위에서 떠올랐다.
`핵종자 회수.`
`현장 목격자 잔존 금지.`
지원 헌터가 욕을 했다. 마법사는 준비하던 불꽃을 껐다.
건호가 기록기를 향해 선언했다.
"현장 대장 차건호. 계약 8조에 따라 토벌을 중지한다. 범위 외 오염원 봉쇄로 임무를 전환한다. 결과 책임은 내가 진다."
미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요청자는 저입니다. 제 이름도 넣으세요."
건호가 잠시 그녀를 보더니 다시 말했다.
"감정사 정미라의 위험물 판정에 근거한다. 공동 책임으로 기록한다."
그들은 짐승을 죽이지 않고 씨앗을 떼어 내야 했다. 미라는 냉동 창고의 소금 포대와 활성탄 필터를 떠올렸다. 검은 포자는 수분과 마력에 반응했지만 건조한 무기질 표면에서는 멈췄다.
지원 헌터들이 소금으로 원을 만들었다. 마법사는 불 대신 차가운 바람으로 포자를 원 안에 밀었다. 건호는 방패처럼 두 검을 교차해 씨앗의 싹을 잘라 냈다.
미라는 짐승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잠깐만 버텨. 네가 놓으면 우리가 받는다."
짐승이 사람 말을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미라가 은박 포획함을 배 아래로 밀어 넣을 때 균사를 조금씩 거두었다.
씨앗이 포획함에 떨어졌다.
뚜껑이 닫히자 창고 전체의 검은 싹이 움직임을 멈췄다.
### 4. F급의 기록
길드 징계실에서 검은 글자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재난사업부장 서문기가 새 계약서를 탁자 위에 놓았다. 깨끗한 표면에는 `곰팡이 짐승 토벌 실패`라고만 적혀 있었다.
"현장 영상은 편광 간섭으로 판독 불가 판정이 났습니다."
"원본 계약서를 분석원에 넘겼습니다."
미라가 말했다.
"길드 재산을 외부로 반출한 추가 위반이군요."
"오염물과 함께 경찰 산하 각성재난분석원에 인계했습니다. 인수증도 공개 기록에 붙였습니다."
서문기의 눈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시장이 열리기 전 창고는 봉쇄되었고, 상인들은 대피했다가 두 시간 뒤 돌아왔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곰팡이 짐승도 격리 치료 중이었다.
하지만 계약은 완료되지 않았다.
"정미라 감정사. 의뢰 보수 전액 박탈, 정규직 승급 추천 취소, 규정 위반 경고 2회. 이의 있습니까?"
"있습니다."
"징계 수위에?"
"사건 분류에요. 토벌 실패가 아니라 범위 외 위험물 봉쇄입니다. 그리고 감정사가 현장 대장 결정과 다른 의견을 공개 기록에 남길 독립 칸을 요구합니다."
서문기가 웃었다.
"F급이 규정을 만들겠다고?"
"이미 영상과 인수증이 외부 사건 번호를 받았습니다. 길드가 빈칸을 남기면 분석원 기록만 기준이 되겠죠."
침묵이 길어졌다.
서문기는 결국 징계서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현장 감정 이견서 제출권을 본 건에 한해 인정함.`
승급은 사라졌지만, 미라의 판단은 대장 서명 뒤에 묻히지 않고 독립 문서가 되었다.
그녀는 징계실을 나가기 전 검은 씨앗의 봉인 사진을 받았다. 포획함 바닥에는 처음 보지 못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날개가 잘린 새를 세 개의 원이 둘러싼 문양.
미라는 지갑 안쪽에서 탄 길드패 조각을 꺼냈다.
오빠가 실종된 현장에서 돌아온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 뒷면에도 같은 검은 인장이 눌려 있었다.
서문기의 목소리가 닫히는 문 사이로 들렸다.
"정 감정사. 그 문양을 알아보면 오늘 집에 곧장 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미라는 문을 다시 열지 않았다.
복도 끝 승강기 표시창에 지하 7층이 잠깐 나타났다. 길드 건물 안내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층이었다.
검은 새 인장이 표시창 안에서 한 번 날개를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