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오십이 분, 신도윤은 외부 보관소 이관대기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예비 인수표를 집어 들었다. 종이는 방금 프린터를 지나온 열을 아직 머금고 있었지만, 서명란만은 손끝이 닿는 순간 이상하게 차가웠다. 비어 있는 칸이 아니라, 누군가 뜯어낸 자리를 억지로 눌러 펴 놓은 것 같았다. 아버지 사건 번호는 그 빈칸 바로 위에 찍혀 있었고, 번호 아래로는 얇은 눌림 자국이 한 줄 더 겹쳐져 있었다. 도윤은 그 한 줄을 보자마자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글자가 사라진 게 아니라,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밀어낸 모양이었다.
"이건 아직 나가지 않았습니까."
보관 담당자는 도윤의 배지를 보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전송 대기표가 다시 밀렸습니다. 인쇄는 됐는데 마지막 줄이 계속 날아갑니다."
"날아간 게 아닙니다." 도윤은 인수표를 들어 형광등에 비췄다. "눌린 자국이 남아 있어요. 잉크가 빠진 자리가 아니라, 위에서 덮어 눌러서 다른 문장을 밀어낸 흔적입니다."
담당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희도 이상하다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부 접근이 막혀 있어서, 제가 더 보여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사실상 출입 금지 통보였다. 공식 이의제기자로 분류된 뒤부터 그의 배지는 계속 빨간 불을 내고 있었고, 기록실 열람 단말도 그의 손가락을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칸이 비어 있는 한 아버지 사건은 다섯 시 십 분에 다시 밖으로 넘어간다. 도윤은 그 사실을 생각한 뒤, 서명란 위에 손가락을 얹은 채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유지보수 로그를 열어 주세요."
담당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봤다. "지금 신도윤 씨는 접근 정지 상태입니다."
"압박 흔적은 아직 제 눈으로 보였습니다. 그럼 물성 확인은 제 책임으로 하겠습니다." 도윤은 인수표를 내려놓고, 빈 접수대 위에 놓인 책임확인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이의제기자가 로그 열람을 요청할 경우, 자료 유출 가능성과 절차상 분쟁을 스스로 부담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 번도 좋아 보인 적 없는 문장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없었다. 도윤은 펜을 들었다.
"한 번만 묻겠습니다." 담당자가 낮게 말했다. "이거 쓰면 진짜로 전부 기록됩니다."
"이미 기록되고 있었겠죠. 다만 제가 못 봤을 뿐입니다."
그는 이름과 사건번호 옆에 떨림 없이 서명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지나치게 또렷했다. 마지막 획이 끝나자마자 단말기에 붉은 창이 떴다. 이의제기자 신도윤, 내부 조회 제한 유지, 책임 열람 승인. 그와 동시에 그의 배지는 푸른 빛을 완전히 잃었다. 담당자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도윤은 그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는 이미 결정한 뒤였다. 이 서명이 그를 더 묶어 둘지라도, 아버지 사건이 사라지는 것보다 낫다.
유지보수실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잠금이 강한 문이 아니라, 강한 문인 척하는 문이었다. 안쪽에는 롤러 청소용 천, 열전사 헤드 교체 기록, OCR 교정용 샘플지가 서류철처럼 쌓여 있었다. 도윤은 샘플지를 한 장씩 넘겼다. 47건이었다. 정확히 같은 간격에서 한 줄씩 빠져 있었고, 빠진 위치는 모두 서명란 바로 앞이었다. 사건명, 인수 기록, 보존 지시문, 그리고 마지막에 남아야 할 대체 인수 문구. 그 자리만 기계적으로 비워져 있었다.
그는 샘플지 아래에 깔린 유지보수 로그를 꺼냈다. 로그의 시간은 늘 새벽 네 시 사십칠 분 전후에 몰려 있었고, 같은 작업자 코드가 반복됐다. 롤러 압착값 상승, 열판 재정렬, 문자 사전 재적용, 출력 정합 오류 없음. 그러나 그 아래 숨은 줄 하나가 있었다. 외부 전송용 재배열 작업. 긴급. 대체 인수표 자동 생성. 도윤은 로그 끝부분을 손톱으로 짚었다. "삭제가 아니군요. 문장을 지운 게 아니라, 문장 자리 자체를 전송 지시로 바꿔 놓은 겁니다."
작업대 너머에서 야간 관리인이 숨을 삼켰다. "우린 그런 지시 받은 적 없습니다."
"받은 적이 없으면 더 문제입니다." 도윤은 압착 자국이 찍힌 샘플지를 한 장 들어 올렸다. 형광등 아래에서 보면 빈칸은 완전한 공백이 아니었다. 아주 얕은 점들과 선이 겹쳐 있었다. 롤러가 지나가며 남긴 압흔이었고, 같은 깊이의 눌림이 47건 모두에서 동일했다. 그는 샘플지 뒷면을 손으로 문질렀다. 온도 차가 올라오자 지워진 문장 뒤에 남은 글자 끝이 희미하게 살아났다. 그건 판결문도, 인수인 이름도 아니었다. 외부 보관소 송부 대상 자동 재배치.
도윤은 그 순간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내부 접근은 완전히 끊기고, 자신이 손댄 로그도 증거능력 시비에 휘말린다. 그러나 멈추면 아버지 사건은 예비 인수표대로 넘어간다.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관리인에게 책임확인서를 다시 내밀었다. "이 로그를 원본 봉인 상태로 법정에 제출하겠습니다. 대신 지금 즉시 정리대를 멈추세요. 그리고 47개 사건 전부를 별도 봉인하십시오."
"그건 재판부 지시가 필요합니다."
"그럼 제가 지금 만들겠습니다."
복도로 뛰어나온 도윤은 서기에게 바로 전화가 아닌 서면을 요구했다. 전화를 쓰면 중간에 빠질 수 있다. 그는 유지보수 로그 일부와 압착 샘플지를 들고, 기록실 당직 재판부 앞에서 짧게 말했다. "47개 사건의 누락은 서로 다른 실수가 아닙니다. 같은 롤러, 같은 시간, 같은 출력 조건에서 반복된 재배열입니다. 빈칸은 우연이 아니라 전송 준비입니다."
서기는 도윤이 건넨 샘플지의 눌림 자국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잠시 뒤, 재판부 쪽 문이 열렸다. 판사는 이미 결재용 안경을 쓴 채 나왔다. "정리대 사용 중지. 47개 원본 임시 봉인. 외부 보관소 이관은 전면 보류합니다."
담당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기록 담당자는 즉시 봉인 스티커를 들고 뛰었다. 도윤은 그 장면을 보며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사건은 적어도 지금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누르던 빈칸이 문서 위에서 멈춰 섰다. 그는 이것이 최종 승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 줄을 되찾아 오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법원은 정리대와 전송 대기표를 증거물로 묶었고, 47개 사건과 아버지 사건의 송부는 멈췄다. 누락이 사고가 아니라 장치의 습관이라는 점도 공식 기록에 남았다.
그런데 안정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봉인된 정리대의 출력함에서 한 장의 새 표가 미끄러져 나왔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열전사 헤드가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종이를 밀어낸 것이다. 도윤이 허리를 굽혀 그 종이를 집어 들었을 때, 그의 손가락이 먼저 알아봤다. 맨 위 줄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신도윤 이의신청 사건. 그 아래에는 아버지 사건 번호가 붙어 있었고, 대체 인수인 칸은 또 한 번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관리인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건 왜 나옵니까?"
도윤은 종이를 접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증명한 그 정리대가,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물고 있었다. 다섯 시 십 분 자동 전송 목록의 첫 줄이 그의 사건으로 바뀌어 있었고, 외부 보관소 이관 대기표는 더 이상 아버지만 가리키지 않았다. 그 빈칸은 이번엔 도윤 자신을 향해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