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오십삼 분, 신도윤은 보전명령서의 마지막 줄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는 분명히 한 번 찍혀 있었는데, 재판장 서명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얇은 공백만 남아 있었다. 잉크가 지워진 모양이 아니었다. 글자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종이 섬유가 매끈하게 죽어 있었다.
"이것도 빠졌습니다." 기록 담당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처럼요."
도윤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어제처럼이 아니라, 같은 방식입니다."
그는 사본이 아니라 원본을 요구했다. 기록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자동 정리대는 전원을 끈 채 봉인되어 있었지만, 봉인 인장 주변에 희미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전원이 꺼진 기계에서 저렇게 따뜻할 리가 없었다. 도윤은 인장 위를 향해 비스듬히 빛을 비췄다. 붉은 인장 표면에 아주 가는 글자들이 겹쳐 떠올랐다. `재가동 대기`라는 두 글자가, 누군가의 손톱으로 긁어낸 듯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건 인장이 아니라 대기표시입니다."
기록 담당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요. 봉인은 어제 밤에 끝났어요."
도윤은 서랍에서 기록지 한 장을 꺼내 보전명령서 아래에 포개고, 사라진 서명의 위치를 맞췄다. 빈 자리의 폭과 깊이가 보전명령서와 판결문, 그리고 어제 사건 기록의 비어 있는 한 줄과 정확히 같았다. 누락은 내용이 아니라 공정의 크기였다. 같은 손, 같은 압력, 같은 간격으로 비워졌다.
그는 곧장 유지보수실로 내려갔다. 전산실 직원은 새벽 근무표를 넘기며 말없이 화면을 돌렸다. 자동 정리대의 마지막 점검 시간은 밤 열한 시가 아니라 새벽 네 시 오십팔 분으로 찍혀 있었다. 전원을 껐다는 기록 뒤에 다시 켜졌고, 그 뒤로는 아무 작업도 없다고 적혀 있었는데, 로그의 공란 사이로 아주 짧은 문자열이 숨어 있었다. `정리 대상 재확인`. 그 문장은 두 번 찍혀 한 번은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누가 다시 켰습니까?" 도윤이 묻자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허가 없이는 안 돼요."
"허가가 없었겠죠. 그래서 지워졌습니다."
직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판사님들이 쓰는 보전명령서도 같은 프린터를 탑니다. 장비는 하나예요."
그 말이 끝나자 도윤은 시선만 들어 기록실 창을 봤다. 같은 장비를 거쳤다면, 사라지는 문장은 사건 기록만이 아니었다. 명령도, 서명도, 판사의 손도 같은 정리대를 통과한 흔적이 남는다는 뜻이었다. 변조는 최종 결과물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출력 직전의 정리 단계에서 시작된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부터는 변호인의 전략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기록 위에 올려야 하는 단계였다. 열두 살 때 죽었다고 들은 아버지의 사건이 목록 첫 줄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숨긴 채 움직이면 훨씬 편했다. 누군가의 부주의한 결함 정도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같은 장비를 거친 47개 사건이 보이고, 그 첫 사건이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순간, 도윤은 더 이상 관망할 수 없었다.
그는 법정으로 올라가자마자 말했다. "기록상 이해충돌이 있습니다. 목록 첫 사건은 제 부친 사건입니다. 그 사실을 누락한 채 조사하면 제가 이 장비의 정리를 막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숨기지 않겠습니다."
배석석이 들릴 만큼 방 안이 조용해졌다. 재판장은 눈썹을 미세하게 올렸다. "그 가족관계를 지금 처음 밝히는 겁니까?"
"네. 그리고 그 대가도 받겠습니다. 기록실 내부 열람은 일시 제한돼도 좋습니다. 대신 원본은 봉인해야 합니다."
검사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국선이 자기 사건을 끌어오네요."
도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기 사건이 아니라, 같은 기계가 사람 47명의 진술과 한 판사의 서명을 함께 비운 사건입니다. 공정이 같으면 결론도 하나입니다. 원본을 봐야 합니다."
그는 토너가 묻은 가장자리와 압흔이 선명한 사본을 내밀었다. 서명 칸 주변의 압력 흔적은 잉크보다 깊었다. 새로 인쇄한 서명이 아니라, 이미 찍힌 문장을 다른 레이아웃으로 덮어씌운 흔적이었다. 감정인이 가까이 다가와 확대경을 댔다. 그가 손목을 멈춘 채 말했다. "한 번 더 출력한 자국입니다. 삭제가 아니라 재출력입니다. 같은 장비에서 나왔어요."
재판장은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 그 몇 초가 도윤에게는 엄청나게 길었다. 마침내 재판장이 탁자를 두드렸다. "자동 정리대 사용을 즉시 중지한다. 47개 사건 원본과 보전명령 원본을 모두 봉인해라. 유지보수 로그, 접근기록, 인장 사용 내역을 분리 보존한다."
검사가 반발했다. "과잉조치입니다."
"과잉이 아니라 늦은 조치입니다." 재판장이 말했다. "오늘 새벽까지 이 법원은 서명을 믿었고, 이제부터는 압흔을 믿는다."
그 말이 떨어지자 기록실 직원이 잠깐 숨을 멈췄다. 문서 봉인 스티커가 새로 붙었고, 자동 정리대의 전원은 완전히 내려갔다. 도윤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국소적 보상은 분명했다. 적어도 오늘 새벽, 원본은 살아남았다. 같은 기계가 다시 한 줄을 삼키기 전에 멈췄다. 보전명령은 효력을 갖고, 47개 사건은 임시로 묶였다. 자백과 진술을 밀어 넣던 통로도 닫혔다.
하지만 대가는 즉시 왔다. 법정 밖에서 윤리 담당 서기가 도윤을 붙잡았다. "아버지 사건 관계가 공식 기록에 올라갔습니다. 당신은 이 묶음 열람에서 빠져야 합니다. 내부 접근은 중지됩니다."
도윤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기록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유지보수 로그에는 새벽 다섯 시 오 분, 외부 보관소 이관 예정이라는 문장이 찍혀 있었다. 47개 원본을 아침 교대 전에 옮기라는 지시였다. 그리고 그 목록 맨 앞에는 익숙한 번호가 있었다. 아버지 사건 번호였다.
마지막 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절반쯤 비어진 채 끊겨 있었다. `이관 대상 1번, 신도윤 부...`
도윤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내일 새벽 다섯 시까지 원본이 외부 보관소로 넘어가면, 오늘 확보한 압흔과 유지보수 흔적은 법원 내부에서 다시 분리될 수 있다. 그보다 먼저 아버지 사건 파일을 꺼내 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누군가가 도윤의 이름을 알면서도, 그 사건을 첫 줄에 올려두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입안에서 한 번 굴리고, 계단 아래 어두운 복도를 바라봤다. 다음 새벽에는 서명만이 아니라, 어느 쪽이 먼저 사라질지 결정해야 했다. 아버지 사건을 지키려면 외부 보관소 이관 전에 그 번호부터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