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고의 두 번째 문은 열쇠를 꽂는 순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 아래로 미세한 떨림이 번졌다. 쇠가 아니라 숨결 같은 진동이었다. 세령은 그 감각을 아는 척하지 못했다. 번역관으로 살아온 세월 동안 문은 늘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거짓을 읽는 일은 언제나 사람의 몫이었다.
문 안쪽은 생각보다 밝았다. 천장까지 닿는 서가가 반원형으로 둘러서 있고, 가운데에는 검은 돌로 만든 심문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얇은 수면이 고여 있었다. 물인지 유리인지 알 수 없는 표면이었다. 두 사람이 발을 들이자 수면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수면 속에서 문장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사라졌다.
"심사 대상 확인."
낮고 평평한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사람 목소리 같았으나 감정이 없었다. 세령은 고개를 들었다. 서가 사이 높은 창문 아래, 은빛 가면을 쓴 서기 하나가 서 있었다. 손에는 봉인봉이 들려 있었다.
"이곳은 국경 기록고 내부 심사실입니다. 외부 승인만으로는 열람할 수 없습니다. 공동 열쇠 소지자는 자신의 계약이 자발적임을 입증해야 합니다."
이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미 의회 승인은 끝났습니다."
"의회는 바깥의 승인입니다. 이곳은 조항의 진위를 묻습니다."
세령은 심문대 위 수면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분명 아무것도 없던 표면 아래로, 얇은 글자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제1조부터 제12조까지는 익숙한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 마치 물속에 가라앉은 뼈처럼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잉크가 아니라 검은 실로 수놓은 듯한 글자였다.
`제13조. 어느 한쪽이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 다른 한쪽은 본 계약에 관한 기억을 잃는다.`
세령의 목 안이 바싹 말랐다. 글자는 방금 전보다 더 또렷해졌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법조문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한 단어 때문에 조항 전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조항은 누가 썼습니까?" 세령이 물었다.
서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봉인봉 끝을 돌 위에 톡 부딪쳤다. "작성자가 아니라 발생 원인을 따지겠습니다. 이 조항은 당신들의 의지가 닿는 계약에만 반응합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거부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이든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럼 없애면 됩니다."
"없애는 방식은 하나입니다."
"뭡니까."
"기록. 감정이 계약을 해치기 전에 원인을 기록하고 봉인할 것. 기록이 늦으면 조항은 먼저 작동합니다."
세령은 심문대 가장자리에 놓인 동판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오래된 국경어가 얇게 새겨져 있었다. 문자 사이사이가 비어 있어 마치 일부러 숨을 쉬는 문장 같았다. 그녀는 눈을 좁히고 그 공백을 읽었다. 단어가 아니라 습관이 먼저 보였다. 누가 무엇을 감추려 했는지, 어떤 순서로 숨겼는지. 그리고 아주 오래전 같은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계약이 사람을 묶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을 속일 때 문이 생긴다는 문장.
"이건 경고가 아니라 방어문입니다." 세령이 말했다. "제13조는 로맨스가 아닙니다. 계약의 기억이 권력 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는 자가 증식형 봉인입니다."
"설명은 충분하군요." 서기가 말했다. "그럼 입증하십시오."
심문대 위 수면이 갈라지며 두 개의 금속 접시가 떠올랐다. 각각 이름을 적는 자리와 기억을 올리는 자리가 있었다.
"공동 열쇠를 얻으려면, 각자 한 조각의 기억을 담보로 내놓아야 합니다. 기록고는 허위 동맹을 싫어합니다. 거짓 동맹이 아니라면, 잃어도 되는 기억 하나쯤은 있겠지요."
세령은 이든을 봤다. 그는 아주 잠깐 눈썹을 내렸다.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계산 중인 얼굴이었다. 그 표정은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그가 이 순간을 낭만으로 넘기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무엇을 담보로 합니까?" 세령이 물었다.
"상대에게 고정된 첫 인상. 계약을 시작할 때의 판단. 그 기억은 조항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세령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첫 인상. 이든이 청색 셔츠 차림으로 맞은편에 앉아, 왕관 없이도 왕실의 압박을 숨기던 얼굴. 자신은 그를 위험한 협상 상대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계약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내놓으라는 말은, 지금껏 그녀를 버티게 한 첫 단추를 잘라내라는 뜻이었다.
이든이 먼저 금속 접시에 손을 올렸다. "좋습니다. 제 몫부터."
"무엇을 내놓습니까."
"내가 의회에서 통과시킨 세 번째 심사증의 기억. 내 손으로 찍은 도장과, 그 도장을 받은 자들의 이름."
세령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황태자에게 심사증은 명분의 혈관이었다. 그 기억을 잃는다는 건, 다음 정치적 압박에서 자신이 누구를 움직였는지 일부 놓친다는 뜻이었다.
"그건 너무 큽니다." 세령이 말했다.
"당신도 덜 중요한 것만 내놓을 수는 없겠죠."
그 말이 이상하게 공평하게 들려서, 세령은 잠시 웃을 뻔했다. 결국 그녀는 심문대 위 이름판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이 손바닥의 열을 빨아들였다.
"내가 내놓을 기억은 아버지의 주석입니다."
서기가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번역 메모를 옮겨 적을 때, 아버지가 덧댄 한 페이지. 그 문장들 덕분에 나는 고어를 읽었습니다."
그건 작은 기억이 아니었다. 세령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주석에는 세령 가문이 몰락하던 날의 시간표와, 기록고에 접근하면 살릴 수 있는 문서의 목록이 있었다. 그것을 잃으면 그녀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한동안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서기가 봉인봉을 들었다. "담보 수락."
수면이 끓듯 일렁였다. 두 기억이 접시 위에 놓이는 순간, 세령은 머릿속 어딘가가 얇게 뜯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아버지의 손글씨가 떠오르려던 자리가 하얗게 비었다. 완전히 비는 것은 아니었다. 빈자리에 종이 냄새와 잉크의 따뜻함만 남았다. 이름은 아직 있었지만, 문장 하나가 사라졌다. 그 한 페이지를 다시는 온전히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든도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세령은 그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황태자가 잠깐 말을 잃는 일 자체가 이미 큰 비용이었다.
"계약의 자발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서기가 선언했다. "두 분은 하층 기록실 열람권을 받습니다. 공동 열쇠에는 추가 각인이 새겨집니다."
돌 위에 놓인 열쇠가 천천히 돌아가더니, 표면에 미세한 선이 하나 더 생겼다. 열두 개의 선 사이에 가느다란 한 줄. 숫자처럼 보이되 숫자가 아니었다. 세령이 손을 뻗자 그 선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손끝을 밀어냈다.
그때였다. 심문대 아래 수면이 다시 갈라지며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주의. 제13조는 기록되지 않은 감정을 먼저 감지한다.`
세령의 시선이 굳었다. 서기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부가 고지 있습니다. 자정 전까지 '첫 감정의 출처'를 기록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13조가 자동 발효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든이 물었다.
"기록되지 않은 감정은 계약 기억을 흡수합니다. 한쪽이 먼저 자각하면 다른 한쪽은 계약의 맥락을 잃습니다. 그때 잃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계약이 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모든 기억입니다."
세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고정되었다.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감정이 문제였다. 감정이 생겨서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먼저 해석하느냐가 문제였다. 이 계약은 둘 중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려는 장치가 아니었다. 더 잔인했다. 서로의 기억을 지키려면, 감정의 발생 원인까지 공동으로 해석해야 했다.
기록고의 북쪽 벽이 열리며 좁은 계단이 나타났다. 아래로는 어둠이 길게 이어졌다. 하층 기록실이었다. 세령이 발을 옮기려는 순간, 손목 안쪽이 따끔했다. 공동 열쇠에 새겨진 추가 각인이 피부로 옮아온 듯했다.
거기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한쪽이 먼저 마음을 인정하면, 다른 쪽은 계약을 기억하지 못한다.`
세령은 그 문장을 읽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뒤에서 이든의 목소리가 낮게 따라왔다.
"지금은 도망칠 수 없겠군요."
세령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도망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기록해야 합니다. 먼저 누가 무엇을 느꼈는지, 왜 그 감정이 계약을 건드렸는지."
"기한은?"
서기가 대답했다. "다음 날 자정. 그전까지 첫 감정의 출처를 제출하지 못하면, 한 사람의 계약 기억은 봉인실로 넘어갑니다. 되찾는 데는 더 긴 심사가 필요합니다."
세령은 하층 계단을 내려다봤다. 아래에는 진짜 기록이 있었다. 위에서 승인받은 계약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처음 생겨난 것들이 숨겨진 곳.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이든을 봤다.
"내일 자정까지입니다."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 찾아봅시다. 당신이 잃은 주석도. 내가 잃은 심사증도. 그리고 그 조항이 누구의 의지로 자라났는지도."
세령은 대답 대신 계단 첫 칸에 발을 올렸다. 그 순간, 기록고 깊은 곳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이미 아래에서 그들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서가 너머로, 아주 조용한 속삭임 하나가 흘러왔다.
"사랑은 기록되지 않으면, 먼저 지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