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사과문
사과문에는 숫자가 없었다. 그래서 엘린은 그것을 찢었다.
종이가 둘로 갈라지는 소리가 왕실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현악단은 진작 연주를 멈췄고, 금박 천장 아래 모인 귀족 백여 명이 그녀의 손만 보고 있었다.
섭정공 베르낭은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조카야.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느냐?"
"제가 쓴 글이 아니니까요."
"사과에 저자가 중요한가? 진심이 중요하지."
엘린 로제트는 찢어진 종이를 은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마음을 상하게 한 모든 분께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누구의 마음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무엇을 돌려줄지는 없었다.
연회장 중앙에 선 마라 베인에게는 그런 문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쉰 살의 포도 농부는 빌린 검은 예복 아래에 흙 묻은 작업화를 신고 있었다. 왕궁에 들어오기 위해 새 구두를 살 돈도, 자기 신발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마라가 접힌 문서를 펼쳤다.
"로제트 영애의 서명으로 우리 마을 열두 집이 포도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수확이 흉작이라 세금을 못 냈다고 적혀 있었죠. 그해 수확은 지난 십 년 중 가장 많았습니다."
귀족석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엘린은 그 문서를 알고 있었다. 재무관이 된 첫해, 스무 살의 자신이 서명한 압류 명령이었다. 결산표에는 병충해로 생산량이 70퍼센트 감소했다고 적혀 있었다. 현장 확인란에는 베르낭의 관리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서명을 의심하지 않았다.
무지해서 한 서명도 서명이었다.
"맞습니다."
엘린이 말했다.
베르낭의 웃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마라가 물었다.
"무엇이 맞다는 겁니까? 속았다는 말입니까?"
"열두 집을 내보낸 명령에 제가 서명했습니다. 생산량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고, 압류 뒤 수익이 어디로 갔는지도 삼 년 동안 묻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제 우셨으니 끝입니까?"
"울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장부를 가져왔습니다."
엘린이 손짓하자 시종들이 붉은 가죽 장부 세 권과 작은 철제 상자를 연회장 가운데로 옮겼다.
베르낭이 낮게 말했다.
"가문의 결산 원본은 외부에 공개할 수 없다."
"제가 재무관으로서 공개 허가했습니다."
"그 권한은 가문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가문의 거짓을 지키라고 받은 적은 없습니다."
### 2. 서명한 사람
엘린은 첫 장부를 펼쳤다.
"압류 당시 신고된 포도 수확은 480통입니다. 같은 해 왕도 도매상에 판매된 로제트산 포도주는 2,900통입니다. 재고로 설명할 수 없는 양입니다."
그녀는 두 번째 장부를 나란히 놓았다. 잉크색은 같았지만 숫자를 쓰는 손이 달랐다.
"마을 장부에는 흉작, 판매 장부에는 대풍년. 차이는 포도원 소유권을 빼앗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귀족 한 명이 물었다.
"그 조작을 영애가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제가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오늘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압류 명령은 제 서명 없이는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엘린은 자기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것은 제 책임입니다. 그 다음 줄부터는 누가 이익을 받았는지에 대한 조사입니다. 둘을 섞어 제 책임을 줄이지 않겠습니다."
마라는 장부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가 쫓겨난 뒤 포도원은 누구 것이 됐습니까?"
"로제트가의 서류상 유령 회사 셋으로 나뉘었습니다. 최종 배당 수령자는 아직 한 명을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특정도 못 했는데 왜 오늘 공개했죠? 완벽한 범인을 찾고 나서 멋지게 잡아야 영애 이야기답지 않습니까?"
비웃음이었지만 엘린은 피하지 않았다.
"완벽한 범인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분 땅은 계속 제 가문의 수익을 냅니다. 반환과 수사는 따로 해야 합니다."
그녀가 철제 상자를 열었다.
청동 열쇠 열두 개가 검은 천 위에 놓여 있었다. 각 열쇠에는 포도원 필지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마라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조롱이 사라졌다.
"저게 뭡니까?"
"열두 필지의 저장고 열쇠와 소유권 원상복구 증서입니다. 삼 년 동안 발생한 순수익도 이자와 함께 돌려드립니다."
베르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재원을 누가 승인했지?"
"제 남부 지참 영지를 어제 매각했습니다."
연회장 뒤쪽에서 잔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엘린의 약혼자 루시앙이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놓친 것이었다. 남부 영지는 두 가문의 혼인 계약을 떠받치는 재산이었다.
"엘린."
루시앙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계약을 상의도 없이 무효로 만들었군."
"압류도 주민과 상의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제 소유를 돌려주는 데 당신 허가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약혼도 여기까지다."
"알고 서명했습니다."
그 말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아픔은 이미 매각서에 도장을 찍을 때 지나갔다.
### 3. 용서하지 않을 권리
엘린은 열쇠를 마라에게 건넸다.
마라는 받지 않았다.
"이걸 받으면 우리가 영애를 용서한 모양이 되겠죠. 사람들은 내일 신문에 '악녀의 눈물, 농민의 화해'라고 쓸 겁니다."
"그래서 울지 않았습니다."
"눈물 대신 장부를 펼치면 계산된 연기가 아닌가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귀족석에서 숨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답은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엘린은 상자 옆에 별도 문서를 놓았다.
"반환은 여러분의 권리라서 제 평판과 상관없이 집행됩니다. 열쇠를 오늘 제 손에서 받기 싫다면 왕실 공증관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반환 기록에 함께 넣을 수 있습니다."
마라는 문서를 읽었다.
"우리가 감사단을 꾸리고 로제트 장부를 볼 권한도 있군요."
"포도원 관련 거래에 한해 육 개월입니다. 제 조사와 별개로 열람하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영애가 숨긴 게 나오면?"
"왕실 재판소에 직접 제출하십시오."
"당신을 끌어내릴 수도 있어요."
"그래야 권한입니다. 제가 허용할 때만 쓸 수 있다면 호의죠."
마라는 오래 침묵했다. 마침내 열쇠 하나를 집었다. 자기 집 번호 7이 새겨진 열쇠였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기록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장부는 보겠습니다. 당신이 또 눈을 감는지 지켜볼 겁니다."
"그것도 기록하겠습니다."
나머지 주민 대표들이 앞으로 나왔다. 누구는 열쇠를 직접 받았고, 누구는 공증관에게 넘기라고 했다. 한 노인은 엘린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열두 필지는 돌아갔다.
연회장의 박수는 드문드문 시작되다 곧 멎었다. 박수칠 장면이 아니라는 걸 누군가 먼저 알아챘다.
베르낭은 말없이 퇴장했다. 루시앙도 깨진 잔을 두고 떠났다.
엘린에게 남은 것은 빈 철제 상자와 공개된 서명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해야 했다.
### 4. 열세 번째
연회가 끝난 뒤 마라가 엘린을 불렀다.
"상자 바닥이 흔들립니다."
검은 천을 걷자 얇은 나무판이 나왔다. 엘린이 칼끝으로 틈을 들어 올렸다. 숨은 공간 안에 작은 열쇠 하나가 더 있었다.
열세 번째 열쇠.
필지 번호 대신 날개 달린 사슴과 세 개의 점이 새겨져 있었다. 섭정공 베르낭의 개인 회계 표식이었다.
"당신이 넣은 게 아닙니까?"
마라가 물었다.
"아닙니다. 상자는 압류 창고에서 봉인된 채 가져왔습니다."
열쇠 밑에는 접힌 쪽지가 있었다.
`열두 집을 돌려주는 것으로 끝내고 싶다면, 열세 번째 문은 열지 마라.`
글씨는 베르낭의 것이 아니었다. 엘린 자신의 필체였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 흉내 낸 자신의 필체였다. `열`의 마지막 획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엘린은 늘 오른쪽으로 마무리했다.
마라가 쪽지를 등불에 비추었다.
"어느 문 열쇠죠?"
엘린은 장부의 유령 회사 목록을 떠올렸다. 세 회사 모두 왕도 북쪽의 같은 창고에 우편함을 두고 있었다. 베르낭이 사냥 전리품을 보관한다고 알려진 13호 창고.
"섭정공의 비공개 회계 창고입니다."
"그럼 조사단 첫 일정이 정해졌군요."
엘린은 열쇠를 마라에게 내밀었다.
"당신이 보관하십시오."
"왜 나죠?"
"제가 가진 채 발견되면 제가 넣었다고 할 겁니다. 당신이 가지면 당신을 훔친 사람으로 몰겠죠.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선택지가 없네요."
"이번 장부에는 원래 그런 것만 있습니다."
마라는 열쇠를 받되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왕실 공증관을 깨워 공동 봉인 주머니에 넣었다. 엘린, 마라, 공증관의 서명이 모두 있어야 열 수 있게 했다.
공증관이 마지막 밀랍을 누르자 열쇠가 주머니 안에서 한 번 돌아갔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도.
멀리 북쪽 창고 방향에서 종이 울렸다. 자정 통행금지 종보다 한 번 많았다.
열세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