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대답의 값
후원 계약은 서명으로 맺지 않았다. 대답하는 순간 맺어졌다.
한겨울의 오른쪽 시야에 금빛 문장이 떠 있었다.
`후원자 <일곱 혀의 공작>이 청동 단검을 제안합니다.`
`조건: 후원자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것.`
그 아래로 새 제안이 겹쳤다.
`후원자 <잠들지 않는 객석>이 통증 차단 3분을 제안합니다.`
`조건: 가장 두려운 기억을 공개할 것.`
겨울은 어느 쪽도 읽지 않은 사람처럼 걸었다.
발밑의 유리 회랑은 폭이 한 뼘 반이었다. 아래에는 도시가 아니라 검은 관중석이 펼쳐져 있었다. 별처럼 보이는 빛 하나하나가 자신을 보는 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밤하늘도 더는 아름답지 않았다.
회랑 끝까지 180미터.
남은 시간 14분.
참가자는 스물셋이었고 무후원자는 겨울 한 명뿐이었다.
앞쪽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참가자가 웃었다. 불과 오 분 전까지 평범한 체육복 차림이던 사람이었다.
"야, 무음. 아직도 버티냐? 한마디면 칼이든 방패든 준다잖아."
겨울은 왼손으로 턱 아래를 두 번 두드렸다. 수어로 `괜찮다`는 뜻이었다.
"말 못 하는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열 살 때부터 수어를 쓴 어머니 덕분에 말하지 않고 대화하는 법을 먼저 배웠을 뿐이었다. 이 경기장이 사람 목소리를 계약 버튼으로 쓴다는 걸 첫 안내에서 알아챈 뒤에는 그 습관이 무기가 되었다.
붉은 갑옷 참가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떨어져도 비명은 지르지 마라. 시끄러우니까."
그가 후원 방패를 앞세우고 달렸다. 회랑 위로 하얀 광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방패는 빛을 튕겨 냈지만, 튕긴 광탄 하나가 뒤에 오던 진우의 발밑을 때렸다.
유리가 깨졌다.
진우의 몸이 아래로 꺼졌다. 그는 간신히 회랑의 금속 테두리를 잡았다. 손가락 아래로 금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전 관중석이 동시에 밝아졌다.
겨울의 시야를 입찰창이 덮었다.
`<일곱 혀의 공작>: 단검을 장검으로 상향. 조건은 '받겠습니다' 한마디.`
`<붉은 승리자>: 매달린 참가자를 밟고 통과할 경우 돌진화 지급.`
`<다정한 해부자>: 구조 장갑 지급. 조건은 구조 후 그의 손가락 하나를 바칠 것.`
진우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가지 마. 나 잡으면 둘 다 떨어져."
겨울은 무릎을 꿇었다.
### 2. 관객을 위한 구조
겨울이 손을 내밀자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지대가 금 갔어. 네 체중까지 못 버텨."
그 말은 맞았다. 겨울은 손 대신 회랑 옆면을 살폈다. 유리 아래에는 중계용 수정 렌즈가 일정한 간격으로 달려 있었다. 관중은 그 렌즈를 통해 참가자의 얼굴과 맥박, 후원창을 보았다.
광탄이 날아올 때마다 렌즈 가장자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열을 먹고 빛의 방향을 바꾸는 구조였다.
겨울은 허리띠를 풀어 금속 테두리에 감았다. 진우 손목에도 한쪽 끝을 던졌다.
"이걸로는 못 올라가."
겨울은 손가락으로 셋을 세었다. 셋 뒤에 몸을 오른쪽으로 흔들라는 뜻을 동작으로 보였다.
입찰가는 더 올라갔다.
`현재 구조 성공 예상률 18%.`
`침묵 참가자의 첫 발화 독점권 경매를 시작합니다.`
겨울은 처음으로 창을 똑바로 보았다. 관중은 진우의 목숨보다 자신의 입에서 나올 첫 단어를 더 비싸게 사고 있었다.
그는 중계 렌즈 하나를 양손으로 잡았다. 수정은 달군 프라이팬처럼 뜨거웠다. 손바닥 살이 붙는 냄새가 났다.
새 제안이 떴다.
`<상냥한 정오>: 화상 면역을 지급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겨울은 이를 악물고 렌즈를 비틀었다.
고정 나사가 하나씩 빠졌다. 렌즈가 회랑 밖으로 기울자 다음 광탄이 겨울을 향해 왔다. 그는 렌즈를 방패처럼 들지 않았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보다 아래로 눕혔다.
광탄이 렌즈를 통과해 넓고 약한 빛으로 퍼졌다.
회랑 바닥 안쪽의 금속 뼈대가 드러났다. 투명 유리에 가려 보이지 않던 굵은 지지선이었다. 진우가 매달린 자리 오른쪽 두 칸에 온전한 뼈대가 있었다.
겨울은 발로 세 번 테두리를 찼다.
하나, 둘, 셋.
진우가 몸을 흔들었다. 겨울은 허리띠를 당기는 대신 옆으로 뛰었다. 진우의 체중이 금 간 유리에서 온전한 지지선 쪽으로 이동했다. 유리 한 장이 통째로 떨어졌지만 허리띠는 금속 뼈대에 걸렸다.
겨울은 바닥에 엎드려 진우의 팔꿈치를 잡았다. 화상 난 손바닥이 찢어졌다.
"놓으라니까!"
겨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진우를 끌어올렸다.
두 사람 몸이 회랑 위에 포개진 순간, 관중석에서 빛의 파도가 일었다. 환호는 들리지 않았지만 시야 가장자리의 숫자가 폭발했다.
`동시 시청 1,204,881.`
`첫 발화 독점권 입찰가 83,000 성광.`
겨울은 자기 피가 묻은 렌즈를 들고 일어났다.
진우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왜 아무 조건도 안 받았어? 장갑만 받았으면 쉬웠잖아."
겨울은 손등으로 입을 가린 뒤 주먹을 쥐었다. `입을 빌리면 손도 빌린 것이 된다.` 어머니가 자주 하던 수어였다.
진우는 정확한 뜻을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 손은 빌려 줄게. 계약 없이."
### 3. 침묵의 길
겨울과 진우는 깨진 중계 렌즈를 번갈아 들었다. 광탄이 올 때마다 빛을 퍼뜨렸고, 잠깐 드러난 금속 뼈대를 따라 발을 옮겼다.
다른 참가자 둘이 그 뒤를 따라왔다. 후원 장비는 있었지만 방패의 사용 횟수를 아끼려는 사람들이었다. 겨울은 막지 않았다. 지지선은 누가 밟아도 같은 곳에 있었다.
붉은 갑옷 참가자가 회랑 끝에서 돌아보았다.
"내 방패 없었으면 렌즈 원리도 못 봤잖아. 통과 보상 나눠."
진우가 욕을 하려 했지만 겨울이 팔을 막았다. 그는 깨진 렌즈 뒷면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중계국 소유라는 표식과 함께 작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경기 설비를 훼손한 참가자는 관문 보상의 50%를 배상한다.`
겨울은 이미 통과 보상 절반을 잃었다. 갑옷 참가자에게 줄 몫도 없었다.
"그걸 알고도 뜯었다고?"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
그는 웃고 돌아섰지만, 자기 방패로 튕긴 광탄이 진우를 떨어뜨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관중은 모든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보고도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지는 다른 문제였다.
회랑 끝 문 앞에는 지문석 두 개가 있었다. 각 참가자는 자기 지문석을 눌러야 통과로 인정됐다. 진우의 돌은 추락할 때 반대편 난간 아래로 굴러가 있었다.
남은 시간 48초.
`<붉은 승리자>: 동료 지문석을 포기하면 즉시 통과 처리.`
`<상냥한 정오>: 이름을 부르면 시간 30초 연장.`
겨울은 깨진 렌즈를 회랑 아래로 내밀었다. 진우가 허리띠를 잡았다. 렌즈의 금속 테두리가 지문석 고리에 걸렸다.
남은 시간 12초.
둘이 함께 렌즈를 당겼다. 지문석이 허공을 그리며 올라왔다. 진우가 돌을 잡고 문에 손을 댔다.
남은 시간 3초.
두 사람의 지문석이 동시에 빛났다.
`유리 회랑 통과.`
겨울의 보상창에는 한 줄만 남았다.
`설비 배상 후 잔여 성광: 0.`
진우의 보상은 120 성광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절반을 겨울에게 보내려 했다.
이전 창과 다른 회색 확인창이 떴다.
`참가자 간 자발적 이전. 조건 없음.`
겨울은 그제야 손가락으로 확인을 눌렀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 4. 방송 밖
대기실에 들어오자 모든 후원창이 사라졌다.
그렇게 보였다.
겨울이 화상 치료수를 손에 붓는 동안 벽면 순위표가 갱신되었다. 전투 점수 0, 후원 수익 0, 관문 기여 3위. 종합 순위는 스물셋 중 열한 번째였다.
그의 이름 옆에는 새 표식이 붙었다.
`침묵 경매 대상.`
"이거 좋은 거야?"
진우가 물었다.
대답 대신 겨울은 순위표 아래 약관을 읽었다.
`참가자의 첫 자발 발화를 청취할 권리.`
`최고 입찰자는 발화 직후 단독 계약 제안권 1회를 얻는다.`
겨울은 입찰 거부 버튼을 찾았다. 없었다. 경기장에 들어온 순간 중계에는 동의했지만 목소리를 별도 상품으로 판다는 조항은 보지 못했다.
순위표가 갑자기 검게 꺼졌다.
대기실 소리도 사라졌다. 진우의 입은 움직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겨울 앞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작은 창이 떴다.
`익명 후원자가 비공개 60초를 선지급했습니다.`
`방송 차단 잔여 시간: 00:59.`
그 아래에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겨울아, 입을 빌리면 손도 빌린 것이 된단다.`
어머니가 죽기 전날,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수어였다. 말로 옮겨 적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겨울의 화상 난 손이 떨렸다.
새 질문이 이어졌다.
`네 어머니가 마지막에 대답하지 못한 질문을 알고 싶나?`
`원한다면 지금 "네"라고 말해라.`
남은 시간 00:41.
겨울은 닫힌 대기실을 둘러봤다. 카메라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처음으로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소리를 내는 대신, 자기 혀 아래에 숨겨 둔 작은 금속 조각을 꺼냈다. 유리 회랑에서 떼어 온 중계 렌즈의 나사였다.
겨울은 나사 끝으로 바닥에 한 글자를 긁었다.
`누구?`
익명 후원자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 00:12에 이르러서야 검은 창에 별 하나가 켜졌다.
그 별은 어머니의 묘비에 새겨진 점자 배열과 같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