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빗속의 손님
비가 오는 날에는 얼룩보다 기억이 먼저 불었다.
문하람은 세탁기 뚜껑이 한 번씩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손님 없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오늘 들어온 옷은 없었지만 비 냄새를 빼려 빈 통에 미지근한 물을 돌리고 있었다.
가게 간판은 석 달째 `기억 세`까지만 불이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은 나머지 글자를 알아서 읽었고, 대부분 모른 척 지나갔다.
밤 아홉 시가 넘어서 문이 열렸다.
교복 입은 학생이 투명 비닐봉지를 안고 서 있었다. 우산은 없었다. 머리와 어깨에서 물이 떨어졌다.
"문 닫았나요?"
"아직입니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요. 수건 드릴게요."
"이거 세탁할 수 있어요?"
학생은 비닐봉지를 계산대 위에 올렸다. 안에는 접힌 교복 재킷이 있었다. 오른쪽 소매에 검붉은 흙물이 번져 있었다.
하람이 봉지를 열지 않았는데도 귀 안쪽에서 빗소리가 커졌다. 자동차 브레이크, 젖은 운동화가 미끄러지는 소리, 받지 못한 전화 진동이 소매에 겹쳐 있었다.
"어디까지 지우고 싶습니까?"
학생의 입술이 떨렸다.
"전부요. 이 옷 입은 날 있었던 일 전부. 서슬기라는 이름도요."
하람은 접수표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 세탁소는 이름이나 사실을 지우지 못합니다. 옷에 붙은 감정 반응을 옅게 할 수는 있어요. 만졌을 때 숨이 막히거나 같은 소리가 반복되는 것처럼요."
"광고에는 기억을 세탁한다고 써 있잖아요."
"그래서 간판을 고치지 않고 있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이름이라서."
학생은 비닐봉지를 다시 잡았다.
"그럼 다른 데 갈게요."
"다른 곳에서 전부 지울 수 있다고 하면, 무엇이 없어지는지 먼저 물어보세요. 슬기 씨에 대한 기억과 사고 순간의 공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학생의 손이 멈췄다.
"제 이름은 한가연이에요."
"문하람입니다. 오늘은 옷을 여기 두고 가도 되고, 그냥 따뜻한 차만 마시고 가도 됩니다."
가연은 오래 서 있다가 젖은 운동화를 벗었다.
### 2. 소매의 진동
하람은 세탁을 시작하기 전에 세 가지를 확인했다.
"사고 사실은 남깁니다. 슬기 씨 이름도 남깁니다. 죄가 누구에게 있는지 제가 옷에서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줄일 수 있는 건 교복을 만질 때 오는 공황과 반복 소리입니다. 동의합니까?"
가연은 차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면 전화가 왔던 것도 기억나요?"
"네. 다만 그 진동이 지금 여기서 다시 울리는 느낌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어요? 안 받은 건 똑같은데."
"사실을 볼 때 숨을 쉴 수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숨을 쉬어야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 정할 수 있으니까요."
가연은 접수표에 서명했다.
하람은 교복을 찬 빗물에 먼저 담갔다. 감정 얼룩은 뜨거운 물에서 오히려 섬유 깊이 익었다. 소매에서 검은 물이 천천히 빠졌다.
물 위에 장면이 떠올랐다.
학교 뒤 횡단보도. 가연과 슬기가 서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가.`
가연이 한 말이었다.
슬기가 길 건너편에서 전화를 걸었다. 가연의 주머니가 진동했다. 그는 화면의 이름을 보고도 받지 않았다.
그 뒤 자동차 불빛이 젖은 도로를 가로질렀다.
하람은 장면을 더 보지 않았다. 세탁자는 손님의 기억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소매를 물속에서 뒤집어 감정 매듭이 뭉친 실밥만 찾았다.
안감 안쪽에 작은 종이 한 장이 박혀 있었다. 물에 젖었지만 글씨가 남아 있었다.
`푸른 우산 손잡이 수선. 맡긴 사람 서슬기. 찾는 사람 한가연.`
가연이 숨을 들이켰다.
"그날 슬기가 제 우산을 빌려 갔어요. 부러뜨렸다고 고쳐 준다더니."
"수선소 보관표 같습니다."
"왜 제 소매에 넣었지?"
"그 답은 옷이 모릅니다."
하람은 모르는 것을 채워 넣지 않았다.
그는 순한 비누를 풀고 소매를 눌렀다. 브레이크 소리가 거품 속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하람의 오른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감정 잔향을 옷에서 빼면 일부는 물로 흘렀고, 일부는 세탁자의 몸을 통과했다.
"아저씨 손 괜찮아요?"
"오늘 밤 조금 떨릴 겁니다. 작업 비용에 포함된 일입니다."
"그런 건 접수표에 없었는데요."
하람은 잠시 멈췄다. 손님에게 자기 비용을 숨기지 말라는 원칙을 자신이 어겼다.
"맞습니다. 다시 설명했어야 했어요. 계속할지 선택해 주세요. 멈춰도 지금까지 한 만큼만 정리합니다."
가연은 물 위 장면을 보지 않고 하람의 손을 보았다.
"계속해 주세요. 대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요."
"헹굼 물을 세 번 갈아 주세요. 기억에는 손대지 말고 물만."
두 사람은 일을 나눴다.
### 3. 남겨 둔 것
새벽 한 시, 교복 소매의 흙물은 아주 옅은 회색으로 남았다.
가연이 물었다.
"왜 완전히 안 빠져요?"
"흙 얼룩이 아니라 섬유가 긁힌 자국입니다. 더 빼면 천이 찢어집니다."
"보기 싫은데."
"안쪽으로 수선할 수는 있습니다. 없던 것처럼 만들지는 못해요."
하람은 회색 자국 위에 같은 색 실로 가는 빗금 세 개를 놓았다. 흉터를 가리는 자수가 아니라 더 찢어지지 않게 잡는 바느질이었다.
교복이 마르는 동안 두 사람은 24시간 우산 수선소에 갔다. 보관 기한이 반년 지났지만 주인은 푸른 우산을 버리지 않았다.
"사고 난 학생 물건이라 손이 안 가더라고."
우산 손잡이에는 새 나무가 덧대어져 있었다. 안쪽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싸우고 비 맞지 말 것.`
가연은 그 문장을 읽고 울었다. 이번에는 숨이 막혀 주저앉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인도에서 천천히 울었다.
다음 날 오후, 가연은 세탁한 교복을 입고 다시 왔다.
"슬기 추모식에 가요. 어머니께 우산 드리려고요. 전화 안 받은 것도 말할 거예요."
"그분이 어떤 반응을 할지는 세탁할 수 없습니다."
"알아요. 용서해 달라고 먼저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있었던 일을 말하려고요."
가연은 세탁비 봉투를 내밀었다. 하람은 절반만 받았다.
"왜요?"
"헹굼 세 번은 가연 씨가 했습니다. 공동 작업비를 뺀 겁니다."
"간판도 제가 고쳐 줄게요. 저희 아빠 전기 기사예요."
"그건 별도 견적을 받겠습니다."
"꼭 그렇게 계산해야 해요?"
"그래야 다음에도 부탁할 수 있습니다."
가연은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 4. 세탁할 수 없는 코트
사흘 뒤 세탁소 간판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
`비 오는 날의 기억 세탁소.`
하람은 `기억` 위에 작은 안내판을 덧붙였다.
`사실은 지우지 않습니다. 감정 잔향 세탁은 범위와 비용을 먼저 합의합니다.`
가연의 아버지는 전선값만 받았고, 하람은 작업 시간에 맞춰 정식 영수증을 발행했다. 가연은 슬기 어머니와 함께 우산을 찾으러 왔다. 두 사람은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같은 우산 아래 돌아갔다.
가게에는 다시 손님이 한두 명씩 생겼다.
그날 밤 하람은 창고 맨 안쪽의 낡은 코트를 꺼냈다. 실종된 누이 문해리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회색 코트였다. 어떤 물과 비누를 써도 잔향이 빠지지 않아 `세탁 불가` 표찰을 달아 두었다.
코트에는 원래 얼룩이 없었다.
지금은 왼쪽 소매가 젖어 있었다.
하람이 만지자 빗소리 대신 기차 안내 방송이 들렸다.
`마지막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젖은 자국이 천천히 글자 모양으로 번졌다.
`문해리.`
그 아래 날짜는 누이가 사라진 7년 전이 아니라 내일이었다.
하람은 코트를 세탁기에 넣지 않았다. 먼저 접수표를 꺼냈다.
의뢰인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
가게 문밖에서 누군가 우산을 세 번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