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닫히기 전의 문서
죽은 자의 이름은 젖어 있었다.
정강 원년 정월 하순, 눈은 신봉구문의 검은 처마에서 쉬지 않고 녹았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물이 검사대의 배나무 판을 두드렸다. 수레바퀴에 으깨진 눈에서는 볏짚과 말똥 냄새가 올라왔다.
황하 북쪽 길이 끊겼다는 소문은 눈보다 빨리 개봉 안으로 들이쳤다. 성 밖 사람들은 들어오려 했고, 성 안 사람들은 나가려 했다. 그 사이에서 피난첩(避難牒)은 사람 하나를 문턱 이쪽이나 저쪽에 두는 종이가 되었다.
스물세 살의 연소하(燕素河)는 젖은 소매 안에서 오른손 셋째 손가락을 폈다. 감각이 반 박자 늦었다. 청하서방(淸河書坊)의 관급 교정판을 넘기고 돌아가면 숫돌물에 손을 담글 생각이었다.
검사대 맞은편에 선 스물일곱 살의 도윤(都潤)이 교정판 대신 다른 종이를 내려놓았다. 붉은 인영이 눈 녹은 물에 번져 있었다.
"연 각수, 이 획을 보시오."
소하는 종이를 잡지 않았다. 먼저 등불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피난첩 이름 칸의 마지막 삐침이 왼쪽으로 가늘게 들렸다. 목판에서는 오른쪽으로 칼을 밀었을 흔적이었다.
자신이 배운 밀기와 같았다.
아니, 같아 보였다.
"제 교정판과 나란히 놓아 주십시오."
"이미 놓았소."
도윤은 종이 옆에 청하서방의 판을 세웠다. 소하가 오전 내내 고친 군량 항목이었다. 거울상으로 새긴 획 끝이 두 판본에서 같은 높이로 꺾였다.
"두 장을 만든 손이 같소?"
"찍힌 것과 새긴 것은 다릅니다. 먼저 종이부터 떼어 보셔야 합니다."
"대답을 피하는군."
"질문이 둘인데 하나처럼 물으셨습니다. 이 문서가 거짓인지, 제가 새겼는지는 다른 질문입니다."
도윤의 엄지가 검사패 모서리를 한 번 눌렀다. 그의 시선은 소하의 얼굴이 아니라 허리 안쪽 도구집에 멈췄다.
"칼을 검사대 위에 올리시오."
소하는 쌍월각도(雙月刻刀)를 한 자루씩 꺼냈다. 굵은 여백을 미는 왼칼과 가는 획을 세우는 오른칼. 배나무 손잡이 끝의 반달 홈이 서로 마주 보았다.
"생업 도구입니다."
"그래서 보자는 것이오."
피난첩을 들고 온 여자는 방책 옆에 웅크려 있었다. 젖은 머릿수건 아래에서 입술이 파랬다. 군졸 하나가 그녀와 성 안쪽 통로 사이를 막고 있었다.
"돈을 주고 산 것은 맞아요. 하지만 이름이 죽은 사람 것인 줄은 몰랐어요. 아이를 데려오려면 이 종이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도윤은 여자에게 몸을 돌리지 않았다.
"누구에게 샀소?"
"흰 종이를 접어 손처럼 보이게 한 표식만 봤어요. 얼굴은 못 봤어요."
"그 말을 증명할 사람이 있소?"
여자의 손이 빈 소매를 움켜쥐었다. 대답 대신 젖은 숨만 나왔다.
소하는 피난첩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종이 발은 관급 교정지와 같은 방향이었다. 인영도 거칠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진짜 동계의 깊이를 가졌다. 하지만 이름 칸의 먹은 가장자리만 유난히 솟아 있었다.
"발급 대조에는 있습니까?"
"없소. 이름 주인은 지난해 죽었소."
"그렇다면 인영 하나로 이 사람을 제작자까지 묶을 수는 없습니다."
"인영이 맞고, 종이가 맞고, 당신 판과 칼결이 닮았소. 지금 가장 가까운 제작자는 연 각수요."
소하의 분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까운 것과 맞는 것은 다릅니다, 도 검사관."
밖에서 해가 성벽의 검은 벽돌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문 위의 북이 한 번 낮게 울렸다. 줄에 선 사람들이 모두 같은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 문서를 압수하고 당신을 해 질 때까지 붙들 수 있소. 문을 열거나 새 첩을 내줄 권한은 없소."
도윤이 피난첩을 검사대 가운데로 밀었다.
"해가 성벽 밑으로 떨어지면 이 사람은 간첩 혐의로 본청 심문에 넘기오. 그전까지 연 각수가 다른 설명을 내놓으면 함께 기록하겠소."
"제 말을 믿겠다는 뜻입니까?"
"확인하겠다는 뜻이오. 믿음은 기록 항목이 아니니까."
소하는 도구집을 닫지 않았다. 돌아갈 길이 검사대에서 끊겼다.
### 2. 금계의 값
도윤이 마른 천을 내밀었다. 소하는 피난첩의 물기를 찍어 내지 않고 가장자리만 받쳤다. 젖은 먹을 문지르면 눌림의 순서가 사라졌다.
"보이는 것부터 말하겠습니다. 종이는 관급과 같은 발입니다. 인영도 같은 계열입니다. 하지만 이름 칸은 다른 판에서 나중에 눌렀습니다."
"왜 그렇게 보오?"
"첫째, 이름 먹만 종이 섬유 위에 떠 있습니다. 둘째, 인영의 눌림이 이름 먹 아래로 들어갑니다. 셋째, 이 삐침은 제 칼각을 닮았지만 끝을 누른 힘이 다릅니다."
"눈으로 본 판단이오. 틀릴 수 있소?"
"틀릴 수 있습니다. 젖은 종이는 결을 속이고, 급히 찍은 판은 익숙한 손도 비뚤게 만듭니다."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하오?"
소하는 검사대에 놓인 오른칼을 보았다. 손잡이에 밴 제 손의 기름, 날등에 붙은 배나무 가루,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호흡의 박자가 있었다.
무흔각문(無痕刻門)은 판에 남지 않은 힘을 함부로 들려주지 말라고 가르쳤다. 관원 앞에서는 더더욱.
"판이 필요합니다. 종이 말고, 이 이름을 새긴 판이요."
"어디 있는지 아오?"
"모릅니다."
"찾을 수는 있소?"
소하는 왼소매로 오른손을 덮었다.
"방법은 있습니다."
"값부터 말하시오."
도윤의 말은 느려졌다. 소하는 그가 조급할수록 더 공식적인 낱말을 고른다는 것을 처음 알아챘다.
"그 감각을 관원 앞에서 쓰면 사부님과 서방까지 문초를 받습니다. 오래 쓰면 제 손도 망가집니다."
도윤은 동정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그 감각으로 무엇을 압니까?"
"닿은 물건을 통해 지금 전해지는 힘의 방향, 세기, 간격입니다. 사람 마음도, 어제 일도, 벽 너머 얼굴도 모릅니다."
"위조자를 알 수 있소?"
"인영을 누가 훔쳤는지, 판을 누가 새겼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쓰겠다는 것이오?"
소하는 방책 옆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문 안을 보지 않았다. 성 밖 눈길만 보고 있었다. 데려오지 못한 아이가 어느 쪽에 있는지 소하는 묻지 않았다.
해가 한 치 더 내려갔다.
"그래도 판을 보겠습니다."
도윤이 군졸들을 두 걸음 물렸다. 그는 소하의 칼을 돌려주지 않고 검사대의 좌우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접촉 위치는 내가 정하겠소. 먼저 문서, 다음 검사대. 느낀 뒤에는 움직이지 말고 말하시오. 내가 기록하겠소."
"제가 느끼는 순서와 나리께서 적는 순서가 다르면요?"
"둘 다 남기오. 다르면 그 차이도 증거니까."
소하는 피난첩 가장자리에 두 손가락을 댔다. 여자의 떨림이 종이를 타고 왔다. 가늘고 불규칙했다. 그것은 두려움의 이름이 아니라 단지 떨리는 힘이었다.
"종이에서는 지금 이 사람 손의 떨림뿐입니다. 제작 때의 힘은 읽지 못합니다."
"계속하시오."
소하는 검사대에 손바닥을 붙였다.
호흡을 세 번 나누었다. 점 하나에 숨을 두고, 획 하나에 힘을 흘렸다. 그것은 무흔각문의 점획청경(點劃聽勁)이었다.
문짝 경첩의 낮은 울림이 먼저 왔다. 수레바퀴가 문밖 돌을 밟는 둔한 충격, 군졸의 창대가 바닥을 치는 가벼운 울림, 검사대 아래 어딘가를 누르는 길고 약한 힘이 겹쳤다.
소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신비처럼 보인다. 사부는 감각을 숨기려는 자가 오히려 과장된 몸짓을 한다고 했다.
"아래에 누가 손을 대고 있습니다."
도윤의 손이 검 손잡이로 가지 않았다. 검사패 가장자리를 눌렀다.
"사람이오, 물건이오?"
"모릅니다. 힘은 검사대 바깥 왼쪽에서 들어옵니다.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 무엇인가를 빼려는 방향입니다."
"판이라고 보오?"
"판일 수 있습니다. 보강목일 수도 있습니다. 뜯기 전에는 모릅니다."
도윤은 군졸 하나에게 검사대 왼쪽의 줄을 비우게 했다. 피난민들의 발이 눈 위에서 끌렸다. 소하는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긴 힘이 멈췄다.
검사대 아래에서 아주 짧은 충격이 세 번 뛰었다.
### 3. 판목 뒤의 두 행
"지금입니다. 아래 왼쪽, 세 번째 장부 받침 뒤입니다."
"연 각수는 손을 떼시오."
"먹이 젖어 있을 수 있습니다. 판면을 잡지 마십시오. 모서리만 잡으셔야 합니다."
"명령은 내가 하오. 감식 지시는 들었소."
도윤이 군졸에게 받침못을 뽑게 했다. 못 하나가 빠질 때마다 검사대가 울었다. 소하는 그 울림을 더 읽지 않았다. 이미 손을 뗐고, 이제는 눈으로 볼 차례였다.
보강목처럼 보이던 판 하나가 반 치 밀려 나왔다. 배나무였다. 손 두 뼘쯤 되는 귀퉁이 판목, 가장자리는 급히 톱질되어 눈에 젖어 있었다. 판면에는 이름 칸의 글자가 거울상으로 파여 있었다.
도윤이 천으로 모서리를 잡아 꺼냈다.
"이것이오?"
"아직 뒤집지 마십시오."
"이유는?"
"뒷면에 누른 자국이 있습니다. 젖은 검사대에 닿은 면부터 기록해야 합니다."
도윤은 판을 허공에서 멈추었다. 소하가 등불을 가까이 가져오게 했다. 판 가장자리의 붉은 먹이 피난첩 인영과 같은 빛으로 번졌다.
"인영 먹과 같소?"
"눈으로는 같은 빛입니다. 같은 곳에서 왔다고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연 각수는 단정을 싫어하는군."
"칼은 한 번 잘못 들어가면 글자를 도려냅니다. 말도 비슷합니다."
도윤이 판을 세웠다. 뒷면에 두 행이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소하는 판각공의 습관대로 머릿속에서 좌우를 바꾸어 읽었다.
城雪壓燈人未寐
一刀翻字鬼先行
성의 눈이 등불을 누르고 사람이 아직 잠들지 못하는데, 칼 하나가 글자를 뒤집자 귀신이 먼저 간다.
소하는 어느 시문집에서도 본 적 없는 작자 없는 문구라고 말했다. 역사적 시구의 권위를 빌린 흔적보다, 판을 주고받는 자들이 알아볼 표식에 가까웠다.
"좋은 글이오?"
"좋고 나쁜 것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행의 ‘번’과 ‘귀’가 다른 글자보다 깊습니다. 찍으면 먼저 먹을 먹습니다. 표식일 수 있습니다."
"누구의 표식이오?"
"모릅니다."
"아는 말보다 모른다는 말이 많군."
"모르는 칸을 비워 두지 않으면 거짓을 새기게 됩니다."
도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판의 이름 칸을 등불 아래로 돌렸다.
소하의 숨이 한 획에서 멎었다.
시작 칼은 자신이 배운 순서였다. 가로획의 오른쪽을 먼저 열고, 세로획이 닿을 자리에 머리카락만 한 여백을 남기는 습관. 사부가 수백 번 손등을 때려 몸에 넣어 준 순서였다.
그러나 끝이 달랐다.
자신의 오른손은 획 끝에서 힘을 거두었다. 이 판을 새긴 손은 끝을 아래로 눌렀다. 나무 섬유가 발톱처럼 말려 있었다.
"왜 멈췄소?"
"닮았습니다."
"당신 칼과?"
"제가 배운 시작 순서와요. 하지만 같은 손은 아닙니다."
"근거는?"
"제 오른칼을 보십시오. 획 끝에서 날등을 세워 힘을 거둡니다. 이 판은 손목을 안으로 눌렀습니다. 같은 순서를 배워도 몸은 다르게 남습니다."
"누구에게 배웠소?"
소하는 오른손을 소매 속에 넣었다.
"그 질문은 이 문서가 거짓이라는 판단 다음에 답하겠습니다."
"거부로 기록하겠소."
"그렇게 하십시오. 대신 이것도 기록해 주십시오. 인영은 맞아도 이름이 없고, 종이는 맞아도 판이 다릅니다."
도윤은 잠시 소하를 보았다. 처음으로 도구집이나 손이 아니라 눈을 보았다.
"기록하겠소. 소지자의 손은?"
소하는 여자의 손톱과 소매를 보았다. 먹이 없다는 것만으로 결백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씻었을 수도, 판을 만지지 않는 역할이었을 수도 있었다.
"목분도 먹도 없습니다. 그것만으로 결백하다고는 못 합니다. 다만 이 판은 방금까지 검사대 아래에서 다른 힘에 잡혀 있었습니다. 소지자는 방책 옆에서 군졸이 지켜봤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지금 판을 빼려던 손은 저 사람이 아닙니다."
도윤이 새 삼끈을 꺼냈다. 판목을 두 바퀴 감아 봉인하려는 순간이었다.
검사대 나무가 소하의 왼손등을 두드렸다.
한 번.
짧게 두 번.
### 4. 이름을 되찾으러 온 손
나무가 전한 것은 힘의 방향과 세기와 간격뿐이었다.
세 번의 충격은 바깥 왼쪽에서 안쪽 오른쪽으로 좁혀 왔다.
그 힘이 누구의 것인지, 왜 왔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소하는 고개를 들었다. 곡물 수레의 볏짚 아래에서 검은 철편이 날았다. 철편 끝의 갈고리가 삼끈을 걸었다.
"판을 놓으십시오!"
도윤이 판을 몸 쪽으로 당겼다. 끈이 팽팽해졌다. 철편을 던진 자는 회색 솜옷의 어깨를 군중 사이에 숨기고 있었다. 얼굴은 젖은 천으로 가렸다.
"군졸, 줄을 멈춰라. 문 안 통로를 비워라."
도윤의 목소리는 오히려 느렸다. 군중이 밀려들자 그는 검을 뽑지 않고 두 팔로 길을 갈랐다.
회수자가 손목을 틀었다. 갈고리가 봉인끈을 끊었다. 판목이 검사대 끝에서 튀어 올랐다.
소하는 왼칼을 집었다.
"연 각수, 추격하지 마시오."
"사람은 안쪽. 판은 제 쪽입니다."
"판만 막으시오. 문밖으로 나가면 붙들 권한도 지원도 없소."
"압니다."
소하는 검사대와 곡물 수레 사이를 보았다. 군졸의 창대, 피난민의 바구니, 반쯤 닫힌 방책. 직선은 모두 막혔다. 그러나 글줄 사이에는 여백이 있듯 물건 사이에도 몸 하나가 지날 빈칸은 있었다.
행간보(行間步)는 빠른 달리기가 아니었다. 막힌 줄을 읽고, 다음 빈칸에 발을 먼저 두는 걸음이었다.
소하는 검사대 모서리를 왼손으로 짚고 몸을 비틀었다. 바구니와 창대 사이, 수레바퀴와 방책 사이를 두 걸음에 건넜다. 회수자의 갈고리가 빈 소매만 긁었다.
"오른쪽을 막아라. 소지자는 검사방 뒤로!"
도윤이 군졸 둘을 돌렸다. 피난민 여자는 끌려가지 않았다. 도윤이 열어 둔 길을 보고 스스로 방책 안으로 뛰었다.
회수자가 판목을 발로 찼다.
판은 눈 녹은 진흙 위를 미끄러져 바깥 문짝 쪽으로 갔다. 붉은 먹이 흰 눈에 한 줄 끌렸다.
"저 판이 문밖으로 나가면 이름도 함께 사라집니다."
"내가 문을 열어 둘 수는 없소."
문 위의 북이 두 번째로 울렸다. 바깥 문짝을 밀 준비를 하던 군졸들이 굵은 밧줄을 당겼다.
"교대 북이 세 번 울리면 바깥 문짝을 닫는다. 그때 판이 밖에 있으면 압수는 끝이오."
"이송 시각은요?"
"끝나지 않았소. 판을 잡아도 해를 되돌리지는 못하오."
두 시계는 서로를 용서하지 않았다. 여자를 살릴 감식 시각과 판을 지킬 문짝 시각이 각자 다른 것을 빼앗으려 했다.
회수자가 짧은 단도를 뽑았다. 칼끝은 소하의 얼굴이 아니라 오른손을 향했다. 그가 노리는 것이 판인지, 손인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 각수, 물러서시오. 판은 다시 찾을 수 있소."
"이 판이 사라지면 저 사람 말은 다시 혼자가 됩니다."
"당신 손이 잘리면 감식도 끝이오."
"그러니 잘리지 않게 막으십시오."
도윤의 입가가 굳었다.
"명령을 거래하는 버릇이 있군."
"나리께서 선택지부터 주셨습니다."
회수자가 달려들었다.
### 5. 거꾸로 베는 칼
소하는 오른칼까지 집었다. 저린 두 손가락이 손잡이의 오래된 균열을 늦게 찾았다.
회수자의 단도가 오른손 손목을 향해 곧게 들어왔다. 소하가 판목으로 달려들 것을 예상한 칼이었다. 가장 짧은 길을 먼저 막은 정확한 수였다.
소하는 왼칼을 판 쪽으로 뻗었다.
회수자의 시선이 왼손을 좇았다. 단도가 반 치 더 깊이 들어왔다.
그 반 치가 여백이었다.
소하는 오른손 날을 바깥으로 세우지 않았다. 목판에 정방향 글자를 새기면 종이에는 거꾸로 찍힌다. 상대가 읽은 직선의 반대편으로 손목을 접었다.
반서도(反書刀).
오른칼이 회수자의 단도 안쪽을 타고 돌아갔다. 쇠와 쇠가 부딪쳤다. 마른 금속음 하나가 눈 젖은 문 안을 갈랐다.
소하는 사람을 베지 않았다. 상대 칼등을 아래로 눌러 문지방에 박았다. 동시에 발뒤꿈치로 판목 모서리를 찼다.
판목이 문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회수자는 단도를 놓지 않았다. 손잡이를 비틀어 소하의 오른칼을 깨물고, 무릎으로 그녀의 팔꿈치를 밀었다.
오른손 셋째 손가락의 감각이 꺼졌다.
소하는 칼을 놓칠 뻔했다. 점획청경의 잔향이 문짝, 밧줄, 수십 사람의 발을 한꺼번에 올려 보냈다. 신호가 뒤엉켰다. 존재하지 않는 네 번째 충격이 오른쪽에서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 감각을 믿지 않았다.
보이는 칼만 보았다.
"도 검사관, 판!"
도윤이 검집을 뻗었다. 회수자의 발목을 치는 대신 판목 앞을 막았다. 판이 검집에 부딪혀 멈췄다.
"연 각수, 뒤로!"
"아직 칼이 묶였습니다."
"그럼 놓으시오."
"판각공에게 칼을 놓으라니, 비싼 명령입니다."
"살아 있으면 값을 청구하시오."
소하는 오른칼 손잡이를 놓았다.
회수자가 균형을 잃었다. 소하는 왼칼의 넓은 날등으로 그의 손목을 밀었다. 단도와 오른칼이 함께 진흙에 떨어졌다.
세 번째 북이 울렸다.
문짝이 움직였다. 젖은 목재의 낮은 울림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회수자는 판이 아니라 바깥 군중을 택했다. 수레 밑으로 몸을 낮추고 닫히는 문틈을 빠져나갔다.
도윤은 쫓지 않았다. 군중을 향해 검을 휘두르면 한 사람의 이름을 지키려다 여러 몸을 베게 된다. 그는 문짝 안쪽 선을 지켰다.
"바깥 줄은 물러서라. 문이 닫힌다. 넘어진 자부터 세워라."
군졸들이 밧줄을 당겼다. 검은 문짝 둘이 눈발을 잘라 냈다. 마지막 틈으로 회색 솜옷이 사라졌다.
도윤은 판목을 군졸의 창집으로 끌어당겨 문 안쪽에 놓고, 새 삼끈을 두 번 감아 검사패의 밀랍을 눌렀다. 역명판은 이제 그의 압수 아래 있었다.
소하는 오른칼을 들여다보았다. 가는 획을 세우던 날 끝에서 쌀알만 한 이가 빠져 있었다.
"이 칼로는 내일 교정판을 못 새깁니다."
"오늘 판 하나는 지켰소."
"남의 판을 지키고 제 판을 잃었군요."
"그 값을 보고서에 적을 수는 있소. 갚는 권한은 없지만."
소하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도윤이 사과 대신 권한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다.
방책 안쪽에서 피난민 여자가 아이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도윤은 군졸에게 그녀를 검사방으로 안내하게 한 뒤 소하를 보았다.
"새 첩을 내준 것이 아니오. 이 사람을 문 안 검사방에 밤새 보호하고, 증언을 따로 받겠소."
"본청 이송은요?"
"제작 혐의는 분리해서 보고하겠소. 위조 문서를 산 책임까지 내가 없앨 수는 없소."
소하는 봉인된 판목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찍힌 종이를 쥐었을 뿐, 새긴 판을 쥔 손은 아닙니다."
"그 문장도 함께 기록하겠소."
"제 이름으로요?"
"연 각수의 이름으로. 이제 숨기기는 늦었소."
무흔각문의 금계는 판목보다 먼저 봉인 밖으로 나왔다. 소하는 저린 손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 도윤은 보았지만 다시 묻지 않았다.
그가 판목 뒷면의 젖은 먹을 살폈다.
"화로 곁에 두면 번짐이 마를 것이오."
"마르면 가장자리 압흔도 굳습니다. 누가 먼저 눌렀는지 비교하기 어려워집니다."
"개봉부 대조소가 여는 시각은 새벽이오."
"그 전에 옮겨야 합니다."
"당신은 아직 억류 중이오."
"그럼 검사관께서 억류한 채 데려가시면 됩니다."
도윤의 엄지가 검사패 모서리를 네 번째로 눌렀다.
"연 각수는 협조와 항명을 같은 목소리로 하는군."
"찍힌 것과 새긴 것이 다르듯, 붙들린 것과 따른 것도 다릅니다."
문밖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닫힌 문짝 너머에서 수레바퀴 소리만 길게 지나갔다. 봉인된 판목 뒤에는 작자 없는 두 행이 젖은 채 남아 있었다.
새벽까지 두 사람은 같은 판목을 지켜야 했다. 서로를 믿어서가 아니라, 젖은 거짓이 마르기 전에 각자의 절반을 대야 했기 때문이다.